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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교훈(수6:15-25)-2023.7.30
견고한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무너진 것이지요. 그러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철옹성 같은 성을 무너뜨림이 목적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리고성의 무너뜨림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공급하는 능력으로 살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자기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누구나 여호와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여리고성의 전투는 기독교인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한 전쟁이지요. 전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용담 같은 것이 아닐까요?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첫 번째 마주하는 여리고 성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하는 전쟁의 서막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여리고 성은 무척 견고했습니다. 완전 비무장상태로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로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성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전투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방식이었지요. 하나님이 지시하신 여리고성 전투 방식은 유난히 일곱이라는 숫자를 강조하십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나팔, 칠일동안 성을 도는 것, 마지막 날 성을 일곱 번 도는 것 등입니다. 모두가 다 일곱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곱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식은 누가 보더라도 유치한 전술입니다.
당시 여리고성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1절). 출입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에 비상령이 내린 것이지요. 당시 여리고 성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와 같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 안의 분위기를 전혀 알 수 없었지요. 그 성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무기를 준비하고 무장되어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초긴장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명령을 하십니다.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는 것이지요(2절).
하나님이 붙였다는 것은 밥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붙인다’는 원어적인 의미는 ‘나탄’입니다. 그것은 ‘배당하다, 위임하다, 처분권을 주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붙이시면 하나님이 책임을 져주십니다. 당당하게 전쟁에 임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붙이심은 여리고성의 전투를 주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을지라도, 혹은 고성능 무기나 전술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아니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하시면 제 아무리 견고한 여리고 성이라 할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의 전투는 전쟁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성의 전투는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전투준비를 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신기한 방법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하십니다.
여리고 성은 기적 같은 방법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의 무너뜨림도 기적이지만, 여리고성이 그렇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도 기적입니다. 물론 우리 편에서는 기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아주 평범한 일이지요. 분명한 것은 여리고성의 무너짐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들의 믿음을 측정해볼 수 있는 온도계와 같았던 것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지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은 후 비로소 그들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는 기로에 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번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습니다. 물론 백점짜리 통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것이지요. 그들은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나마 그들이 광야에서 훈련받은 결과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들 중에 아무도 여리고성의 전투 방식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혹은 그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여호수아를 모독하거나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순종했던 때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번째 전투였던 여리고 성의 전투의 시작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광야에서 훈련한 것의 첫 열매가 매우 좋은 결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의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엄청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11장30절을 보면,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만나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아무리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막강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첨가되지 아니하면 그것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믿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져서 만들어낸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과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당해야 할 믿음이요, 그 믿음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이 수행해야 할 세 가지 과제는 이것입니다. 죽이라는 것과 살리라는 것과 바치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리고 성의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반드시 살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에서 탈취한 모든 물건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수행해야 할 세 가지 과제입니다.
(1) 죽이라는 것입니다(21절/공의)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미션은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진멸하라는 명령은 신명기서7장1절에서 4절까지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맺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혼인도 맺지 말고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신명기20장16절은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명기13장15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생축을 칼날로 죽이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민족의 성읍에서 호흡하는 생명체는 다 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토록 잔인한 명령을 하실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무자비하신 분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혹시라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을 본받아서 가증한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범죄할까 봐서 그런 것입니다(신20:18). 자기 백성에게 죄가 전염될까봐서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하셨던 것이지요.
때문에 여리고성의 모든 생명체는 다 죽여야 합니다(21절). 그것은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얻은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것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진멸해야 합니다. 진멸하는 것은 온전히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헤렘이라고 부릅니다. 때문에 여리고성의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절대 연민의 정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아깝다고 살려두면 안됩니다. 불쌍하다고 살려두어도 안됩니다. 비록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들이라 할지라도 무자비하게 죽여야 합니다. 혹은 자기 자식같이 올망졸망한 귀여운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라면 다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이 다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법대로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하나님의 법이지요.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법이 공의입니다. 거기에는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공의를 통해 죄를 다스리십니다. 죄에 대하여 묵과하지 아니하십니다. 덮어두지 아니하십니다. 두루뭉술하게 지나지도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다스리실 때는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율법의 성질은 지키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렇습니다. 법대로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품이 공의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피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 살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기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여리고 성의 생명체를 진멸하는데 아깝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사울 왕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삼상15:3).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모든 생명체를 죽이라는 것이지요. 이유는 아말렉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무시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울왕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선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기생각으로 꼼수를 부린 것이지요.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을 사로잡고 모든 백성은 진멸했습니다(삼상15:8). 그리고 양과 소 중에서 좋은 것과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진멸하지 않고 남겼습니다. 한마디로 쓸모없는 것,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죽인 것입니다(삼상15:9).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을 버리셨다고 최종통보를 하십니다. 불순종의 대가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가나안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당연히 여리고 성의 전투 역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는 가나안의 첫 열매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신다고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전쟁에 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 가나안 전쟁의 시작은 여리고 성의 전투였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반드시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면 공의의 칼날은 결국 자기들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아주 끔찍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수행했습니다.
호흡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였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리고성의 전투는 비교적 성공적인 전투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한 쾌거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여리고 성의 전투에 임한 이스라엘의 믿음과 순종은 몇 번을 칭찬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사실 믿는 자는 이런 믿음과 순종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은 그 믿음과 순종이 오래 가지를 못했다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이후에 이스라엘을 통해 이런 믿음과 순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성의 전투에서 그들은 금방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말지요. 그래서 눈물의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2) 살리라는 것입니다(17절/사랑)
그런 전쟁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살려야 할 사람을 지명하셨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과 그 집의 식솔들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2장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파송합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입구 여리고성을 정탐하게 되지요. 여리고 성에 잠입한 정탐군들은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서 유숙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이 들어왔다고 보고합니다. 여리고 왕은 기생 라합의 집을 샅샅히 수색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이미 정탐꾼들을 숨겨두었습니다. 지붕위로 올라가서 삼대에 숨겨서 보호해준 것입니다. 어쩌면 정탐꾼을 신고하면 포상을 받을 수도 있었고, 여리고 성을 지킨 영웅으로 추대를 받을 수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라합은 정탐꾼들이 이미 성문을 닫을 때에 나갔다고 거짓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자기 땅의 정보를 정탐꾼들에게 제공하고 협상을 시도합니다. 협상의 내용은 내가 당신들을 선대하였으니 당신들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전쟁할 때에 자기들의 생명을 살려달라는 것이지요.
자기 생명만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모든 자들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수2:12-13). 매우 지혜롭고 야무진 여자입니다. 비록 신분은 기생이지만 영적으로 깨어있는 믿음의 여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정탐꾼들은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해 주겠다고 언약을 합니다. 다만 자기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라합의 집에 붉은 줄을 달아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모두 다 집으로 모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리라고 맹세를 합니다. 결국 라합 가문에 속한 모든 식솔들을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맹세는 유효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전쟁시에 정탐했던 소년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라합은 물론이요, 그 부모와 형제와 친족들까지 모두 다 끌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16장 31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말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그 가족 전체를 살려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과 맹세했던 라합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여인의 믿음으로 온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의 전쟁에서 모든 생명체가 죽임을 받았지만 오직 라합과 그 가속들은 생명을 구원받는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라합의 가정을 살려낸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라합의 가정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자를 살립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고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당신의 공의로만 다스리신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공의로는 절대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원받을 인간을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의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는 공의요, 하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속성을 병행하여 사용하십니다. 공의로 다스릴 자는 공의로, 사랑으로 다스릴 자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절대 한 가지의 속성으로만 다스리지 아니하십니다. 만일 한 가지 속성으로만 다스리신다면 이 땅에서 한 사람도 남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로만 다스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공의의 칼날을 피할 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이 사랑으로만 통치한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버릇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는지 모릅니다. 어차피 어떤 죄를 지을지라도 사랑으로 용서하실 터인데 무엇 때문에 회개하겠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어차피 사랑으로 용서해주실 것이니까요. 역시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으로만 통치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회초리를 들어서 혼내야 할 때면 반드시 회초리를 가지고 따끔하게 혼내 줄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공의의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다스리실 때는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서 사랑의 법으로 다스려주십니다. 우리 인간처럼 꼬장을 부리지 않습니다. 아주 쿨하게 사랑하시는 것이지요. 어떤 조건이나 단서를 붙이지 않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당신의 두 가지 속성 공의와 사랑을 필요를 따라 적당하게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 가운데 사랑의 보자기가 공의의 보자기보다 크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공의의 보자기를 사랑의 보자기로 감싸주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3) 바치라는 것입니다(17절/구별)
하나님이 여리고 성의 전쟁에서 제시하신 또 한 가지 과업은 여리고 성에서 얻은 물건은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 여리고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여리고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헤렘이라고 말합니다. 헤렘은 ‘금하다’ 혹은 ‘사용을 금함으로 봉헌하다’ ‘멸절시키다’는 뜻입니다. 즉,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봉헌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헤렘은 ‘씨를 말리는 것’ 이른바 ‘완전한 멸족’을 의미합니다.
헤렘으로 지정된 것은 절대 인간들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물건은 헤렘으로 지정되어 진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21절). 성안에 있는 사람도 헤렘의 대상으로 진멸당해야 했고, 모든 재산도 소각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기구는 여호와의 곳간에 두었던 것입니다(24절). 다만 여호수아가 금은 동철 등 금속을 여호와의 곳간에 보관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추정컨대 금속품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헤렘으로 바쳐진 물건을 취하는 자는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됩니다(18절).
그런데 결국 우려했던 불상사가 이스라엘 가운데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과업을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범죄였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화가 미친 것입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획득한 물건을 도적질 한 것입니다. 그가 도적질 한 목록은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하였던 것입니다(수7:21). 결국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보기 좋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아이성은 아주 작은 성, 꼬마성이었거든요. 아간의 범죄로 하나님이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하신 것이지요.
그들은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실패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불편한 승리를 거둔 것이지요. 옥에 티가 난 것입니다. 나름대로 죽이라는 명령과 살리라는 명령은 순종했으나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탐심입니다. 비록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범죄행위였지만 신앙공동체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미친 해악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까지만 해도 축제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 뒤에 감추어진 불편한 진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이 숨겨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뒤에 감추어진 죄악을 찾아내십니다. 그것은 아이성 전투의 패배를 통해 찾아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전투를 만만하게 보았습니다. 그만큼 작은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물론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입은 인명피해는 36명밖에 안됩니다(수7:5).
하지만 그들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서 물같이 된 것입니다. 전쟁은 사기가 중요합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들이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바치라는 것을 바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모든 물건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일부를 도적질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의 물건을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가나안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는 것이지요. 성과 속을 구별하는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의 결론은 모두 다 구별이고 분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2장2절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구별하기 위해 주일이 필요한 것이요, 물질을 구별하기 위해 십일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들어가서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구별된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리고 성의 전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은 믿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의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세 가지 과업을 우리도 잊지 마십시다. 죽이라는 것은 죽이고, 살리라는 것은 살리고, 바치라는 것은 바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입니다. 반드시 이 세 가지 과업은 패키지로 지켜져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생각하면 안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했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리고 성의 전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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