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파이 만드는 법
1. 파이팬에 쇼트닝을 바르고 밀가루를 묻혀 털어낸다.
아버지는 왜 그런 식으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2. 밀가루는 두세 번 체에 내리고 버터는 1cm 크기로 자른다.
아버지는 올해로 쉰여섯 살이었다.
3. 밀가루에 버터를 넣고 스크레이퍼로 잘게 자르면서 섞는다.
그 나이라면 조그씩 삶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질 때가 아닐까.
4. 냉수를 붓고 가볍게 뭉쳐서 비닐봉지에 넣어 30분간 냉장고에 둔다.
어쩌면 아버지는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롭다는 이유로 목숨을 버릴 만큼 아버지의 나이는 가볍지 않다. 삼십 분? 나는 잠깐,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본다. 허나 그것은 죽음처럼 잘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무거운 것들.
5. 4를 직사각형으로 밀어 세 번 접기를 3회 반복한다.
이제 나는 정말 혼자다. 그러나 잘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6. 사과를 깎아 씨를 빼고 8등분해서 4mm 크기로 썬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어머니의 기일이 일주일 지난 후였다.
7. 사과와 설탕을 함께 조린 다음 계피가루를 넣고 식혀 브랜디를 섞는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줄곧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8. 파이 반죽을 2~3mm 두께로 밀어 팬 크기로 잘라 바닥에 깐 다음 가장자리를 도려낸다.
그럴 만큼 아버지는 그토록 지독하게 어머니를 사랑했던 것일까.
9. 포크로 구멍을 낸 다음 그 위에 사과 조림을 넣는다.
어머니는 일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10. 파이 반죽을 1.5cm 폭으로 팬 크기보다 조금 더 긴 끈을 만든다.
남은 사람은 이모와 나 단둘밖에 없다.
11. 9의 둘레에 달걀물을 바르고 끈으로 엇갈리게 엮는다.
죽음을 준비한 장소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남아 있을 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모 또한.
12. 가장자리를 포크 끝으로 눌러주고 다시 달걀물을 바른다.
상가는 곧 헐릴 것이다.
13. 240~260C 오븐에서 굽다가 갈색이 나면 50~60C를 내려 40분간 더 굽는다.
어쩌면 이제 이모와 나도 헤어져야 할 시간인지 모른다. 나는 또 헤어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헤어지지 않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이모와 헤어질 것이다.
14. 살구잼과 브랜디를 섞어서 뜨거울 때 표면에 바른다.
아버지는…… 사과를 좋아하였다.
—조경란, 『식빵 굽는 시간』(문학동네, 1996)126~128p
첫댓글 저번에 올렸다가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삭제됐던 글입니다.
다시 타이핑했습니다.
소설에서 이러한 기법, 그것도 1996년도에 시도했었던.
사과파이 만드는 법과 아버지의 죽음을 매치시킨,
앙꼬만 다를 뿐, 국화빵 틀이나 붕어빵 틀 속에서 찍어내는 듯한 글보다는
이렇게 기법을 달리한 글을 보게 되면 신선하다는 느낌이 먼저 묻어나오곤 합니다.
그러네요.,
어쩜 사과파이와 아버지의 죽음을 연관시켰을까...
읽으며 한참을 생각하였습니다...
조경란 작가가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은 소설인데,
소설 중간에 이런 기법을 삽입한 걸 보고 참신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지사방 꽃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봄날 되시길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