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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은 대전 유성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했다.
예년에 비해 두 배가 넘는 회원들이 참석했다.
한 달 전, 예술인 장관의 탄생에 대한 기대 심리가 한 몫을 한 듯했다.
미술인들은 정책에 새 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정부의 선진국 수준 예술진흥정책의 서막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발표자들은 모두 정부의 일관성 없는 문화예술정책을 성토했다.
이어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전체의 공동 목표는 국민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앞당기자는 것이므로 이러한 여망을 하루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부흥시키고 진흥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 당국은 지금부터라도 문화 부양책을 어떤 정책보다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목에 힘줄을 세웠다.
또한 문화 예술 발전이 국가 위상은 물론 경제에 미치는 기여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설명했다.
향후 정부는, 예술에 대한 예산을 최대한 편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된다고 입을 모았다.
미술인들은 정부의 부양책에 힘입어 미술문화 전반에 활기가 생겨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문화관광부 담당 국장은 미술 시장을 비롯, 문화 발전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국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막대한 예산 투입에 어려움이 많다며 양해를 구했다.
50년 동안 되풀이 되어온 이 나라 문화 예술 관련 공무원들의 고정 레퍼토리에 참석자들은 맥이 빠졌다.
파격적 인사라며 언론의 초점이 되었던 영화감독 출신 장관의 의지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참여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기대했던 참석자들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씁쓰레한 기분으로 세미나를 마친 현빈은 모처럼 호수를 보고자 신탄진에서 대청댐 쪽으로 차를 돌렸다.
호수를 끼고 뱀처럼 굽어 있는 도로의 가로수들이 연녹의 이른 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중이어선지 댐 전망대에는 몇몇 사람들뿐이었다.
파란 호수는 산그늘에 안겨 잠자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따사로운 봄 햇빛들이 고기비늘처럼 수면 위에서 파닥였다.
갈증을 느낀 현빈은 매점에서 맥주 두 캔과 땅콩을 사서 야외 탁자로 가 앉았다.
자연을 대할 때면 현빈은 늘 경이로움을 느꼈다.
또한 이러한 자연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려 애썼던가.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자연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려 힘써왔다.
고동치는 생명의 빛과 소리를 정말로 똑똑히 보고, 듣고 싶었다.
언젠가는 자연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표현할 수 있는 눈이 트이게 되길 바랐다.
그리하여 그 아름다운 피조물의 ‘말 못 할 탄식’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현빈은 늘 삶이 버거워 고독하게 살아오면서 얼마나 멋진 경탄의 기쁨을 이런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가를,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아가 그 기쁨과 사랑 속에서 인간애로 통하는 길을 모색해 보려 했다.
그것은 소망이요, 꿈이었다.
언제 실현될 것인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연을 외면했다.
예술가들 또한 자연을 찬미할 수만은 없었다.
생계의 위협 때문에 전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국민들의 정신적 황폐와 위대한 작품의 소멸을 의미했다.
예술에 대한 국민들의 무지는 근본적으로 정치가와 정부 당국자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럴 때면 현빈은 자신이 그토록 최고의 가치로 갈망하는 화가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곤 했다.
술을 깨려고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깨어나니 밖은 이미 어둠에 쌓여 있었다.
현빈은 청주를 향해 차를 몰았다.
문의대교를 1킬로미터쯤 남겨 놓은 지점이었다.
급커브 길을 막 돌아서는데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승용차의 전조등 불빛이 현빈을 쏘았다.
순간, 상대방 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달려드는 느낌에 현빈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상대방 차는 미처 커브를 틀지 못하고 현빈의 차 뒷문짝을 세차게 들이받았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창졸간의 사고에 현빈은 잠시 동안 핸들을 잡고 앉아 있었다.
뒤따라오던 차량 운전자인지 어떤 사내가 현빈에게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었다.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선에 걸쳐 있는 상대 차량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자가 핸들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헝클어져 부푼 머리를 보니 여자였다.
현빈은 마음을 추스리고 차에서 내렸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현빈의 말에 서서히 고개를 든 30대 후반의 여인은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새처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여인의 얼굴에 물기가 번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현빈이 재차 묻자 여인은 녜,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너무 작아 현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차가 많이 밀려 있습니다. 내리세요, 제가 갓길로 대놓겠습니다.”
여인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현빈은 도로변에 설치된 가드 레인에 바짝 주차해 놓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몸을 옹크린 채 아직도 떨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차를 빼줘야 되니까……, 우선 제 차에 타십시오. 마음을 진정시킨 뒤 공업사에 같이 갑시다.”
문의마을로 들어오니 도로변에 ‘나루터’라는 커피숍 간판이 눈에 잡혔다.
차를 세우고 나오며 현빈은 다시 뒷문짝을 보았다.
문짝의 가운데 부분이 흉하게 움푹 들어가 있었다.
커피숍에 앉아서도 여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차를 주문 받으러 다가온 주인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커피 하시겠습니까?”
여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두 잔 주십시오.”
현빈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이며 자못 밝은 어조로 말했다.
“다치신 데는 없죠? 이만해서 다행입니다. 저 정도는 금방 고칩니다. 수리비도 별로 안 들고.”
현빈의 말에 위안이 되었는지 여인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자, 커피 한 잔 드시고 근처 카센터로 갑시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빈을 힐끗 쳐다보았다.
떨어뜨리려던 눈길을 다시 현빈의 얼굴로 돌린 여인의 눈빛이 갑자기 햇빛을 받은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현빈이 커피를 다 마시도록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어 놓고 젖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운전하신 지 얼마 안 되나 보죠?”
현빈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일어나시죠?”
현빈의 말에 다소 퉁명함이 묻어 있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현빈을 바라보았다. 현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인도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사고 지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인의 차는 전조등이 깨져 있었고 앞 범퍼가 부서진 채 도로에 내려앉아 있었다.
여인은 악몽이 되살아난 듯 차 문을 열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현빈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 자리에 서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현빈을 올려다보았다.
“못 하겠어요.”
제기랄, 현빈은 호수로 눈길을 돌렸다.
“키 이리 주고 옆으로 타십시오.”
현빈이 손을 내밀자 여인은 지갑에서 키를 꺼냈다.
“알고 있는 카센터라도 있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려는 듯 줄곧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현빈은 여인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뒤 휴대폰 번호를 묻고, 내일 공업사에서 견적이 나오면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고 경위를 설명하라고 일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