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선생님께서는 수 년 전부터 3·1절 기념행사를 전시민이 참여하는 축제로 만들려고 애쓰셨습니다. “안산지역사연구모임”과 광복회를 비롯한 단체들과 모임도 주선해 주셨는데 성사되지 못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올린 글을 보고 혹시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해서 우리회원의 의견을 모아 몇자 적어 말씀을 드립니다.
1) 안산시에서 “처음으로 3·1절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라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시청 주관 하에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저 ‘비석거리 삼일운동’에 참여한 안산주민들이 걸었던 와동에서 수인산업도로 부곡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삼일로’라 명명하였습니다. 또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걸었던 길가에 있던 ‘수암초등학교’의 명칭도 ‘삼일초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행사가 끊겨 2005년부터 뜻있는 안산시민들과 함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소규모의 삼일운동 기념 만세길 답사를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안산지역사연구모임’도 결성되었습니다. 이후 우리 회원들은 초중고 자녀들과 함께 10년 넘도록 매년 3월 1일 기념식을 갖고 만세길 순례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4~5년 전부터 여러 민간단체들이 합류하면서 우리 안산지역사연구모임에서 주관하는 삼일절 행사는 규모가 커졌습니다. 2014년에는 안산시에 거주하는 고려인 40여 명을 비롯한 일반시민 등 100여 명과 함께 3.1절 행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때는 민선 6기 지방선거를 앞두고 많은 시장 시도의원 후보들까지 참석하셔서 삼일절행사를 안산시에서 주관하겠다는 공약을 하셨습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참석하셨던 제종길 시장님이 당선되셨고 이에 따라 2015년 공식적 행사를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청의 공식적 행사는 우리 회원들이 참여하기에는 어려운 제약도 많아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초등학생은 참여할 수 없고 중고생은 봉사점수를 주기 때문에 인원이 이미 차있으며 성인의 경우 광복회원 이외에는 아무도 초청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단지 간단한 시청 강당에서 열리는 기념식에만 참여하는 것보다 청소년들과 함께 삼일운동의 현장을 돌아보며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것이 더 뜻깊은 일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년처럼 독립만세의 함성이 널리 퍼졌던 비석거리에 현장에 모여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제종길 시장님께서는 작년의 선거공약대로 삼일절기념 공식 행사를 개최하여 공약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원들 앞에서 직접 공약한 것이라고 바쁜 와중에 우리지역사연구모임 기념식에도 참석하셨습니다. 이 글을 빌어 제종길시장님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내년에는 부디 안산 시민이 다 함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독립만세의 현장인 수암동 비석거리나 안산초등학교 또는 삼일초등학교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삼일절행사를 같이 개최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 선생님의 글에서 제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약간의 오류가 있어 감히 말씀드립니다.
① “(최용신 선생은) 일제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하게 하는 우리글을 가르치고”
삼일운동 이후 일제는 친일파 양성책으로 통치방법을 바꾸어 조선어(한글)교육은 필수과목이었습니다. 1932년부터는 전국적으로 한글보급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38년의 3차 조선교육령에서 조선어를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꾸고 1943년 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 자체를 삭제하였습니다.
② “(최용신 선생은) 일본 경찰에 (중략) 성추행은 물론 험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 기록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있다면 최용신 선생은 훈격을 높일 수 있습니다. 현재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지만 애국장이나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가 충분하리라 확신합니다. 자료를 주시면 제가 앞장서서 추진하겠습니다.
③ “선감학원을 세운 때가 세계 2차 대전이 한 참 진행 중이어서 당시 일제가 불량배나 거지를 잡아 교화교육을 시킬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이 부분은 선생님께서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1936년에 서울 인구가 70만 명이었다가 1942년에는 110만 명에 이릅니다. 이때도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이 늘어나 서울에 토막(土幕)집이 늘어나고 부랑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후방의 치안을 든든히 한다는 소위 ‘총후보국(銃後報國)’정책에 의해 선감학원이 설립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지적해 주신 점 잘 보았습니다. 우선 지적한 부분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1.삼일절 행사에 대해서는 근자에 국가차원에서 안산시나 교육지원청 그 어느곳에서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민단체 스스로 한 것을 부정한 말은 안입니다.
최용신관련해서는1)최용신에 대한 기록중에 가르치지 못하도록한 한글을 가르치다 반월주재소에 잡혀갔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음. 2)반월주재소 또는 수원경찰서에 잡혀가 여자로서 수치스러운 고문을 당했다는 부분을 성추행으로 표현함 그 표현이 잘 못 됐다면 바로 잡겠습니다. 3)부랑아와 거지들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음. 그래서 제 조명이 필요하다고 했음
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정선생님이 안산지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라 인정을 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요. 그리고 애국을 위해 노력하신 점 높이 평가되어야할 것으로 믿습니다.
추신:참고로 알려드립니다.
위 최용신에 대한 글 배경을 알려드리니 한번 읽어 보세요.
제가 최용신에 대해 많은 자료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런데로 읽었습니다.
우선 기억나는 것중에 2010년 안산시가 발행한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책 p123~127, p152~162를 보면 최용신이 한글을 조선역사를 성경을 가르치다 일제의 탄압을``` 또 최용신이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술돼 있슴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성추행이라는 것 대단한 것 안입니다. 요즘 여자에게 심한 욕을 하거나 살갓을 닫기만해도 당사자의 뜻에 의해 성추행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자가 고문을 받은 것 요즘으로 말하면 성추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르치지 못하게 한 한글 가르치고 부분에 대하여 역사적 기록을 정확히 하여 많은 이해을 주신데 감사드립니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20년전 최용신선생에 관한 자료 조사와 여러 증언을 청취하였는데 증언자도 최선생 활동시기와 사후를 혼돈스럽게 증언하고 본인 또한 지역의 지명이나 정확한 시대 구분 부족등으로 혼돈이 생기기도 햇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쉽게 사전 역사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 많은 이해가 됩니다. 1930년대는 한글을 가르치도록 허용했지만 국어와 조선어의 시간표가 있었고 한글만 가르치면 안되는 걸로 들었습니다. 샘골학원도 철저히 시간표를 지키도록 강요받았던 것입니다.
국어표기를 일본어로 표기한게 발각되어 최용신선생이 곤역을 치른 이야기는 제자는 물론 여러분이 증언하는걸로 보아 맞는 사실같습니다.특히 안원순할머니(홍석창목사의 모친)의 증언에 의하면 수원경찰서에 호출받으면 이른새벽에 출발하면 밤늦게야 오는데 최용신선생은 몇일만에 왔는데 집에 가보니 온몸에 멍자국이고 정말 말로 옮기기도 민망한 몹쓸일을 당한 이야기을 자세히 들어던 기억이 납니다.구체적인 고문도구까지요. 다음날 밤새 얼마나 우셨는지 눈이 퉁퉁부어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한 선생님이셨다며 여성으로서 안해야 할 말을 다 해 버렸다...
제가 추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해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용신선생뿐 아니라 사후에는 교회앞에 사명당이란 신사를 차려놓고 들어갈때 나올때 인사을 하는데 조금 건성으로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걸리면 노인도 그냥 구둣발로 걷어차고 곤노 빠가야로를 외치며 빰을 사정없이 때려서 거의 기어가게 만들 정도였다는 증언도 들었습니다.참으로 지금의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던것 같습니다.
사실 최용신선생 기록은 당시 신가정, 중앙 (35.5월호) 잡지 등에 보도된 기록물과 최용신소전이 전부입니다..(일제시절 출판검열 통과내용)
이후 홍석창목사남이 1980년대에 증언을 청취하여 출판한 단행본이 있구요
1994년에 제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추서 신청을 하면서 당시에 생존하신 류달영교수, 신가정 잡지을 찾으면서 만난 잡지박사 김근수교수, 염석주의 조카 주의득선생을 비록 1930년대 청년으로 최용신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김종규,홍찬의 안원순 등의 증언자. 제자분들의 증언을 들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역에서 정리작업이 진행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록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만나 이야기 했으면합니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얼굴은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고 온몸이 피멍으로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물리적인 육체적 고통은 물론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물 고문, 특수제작한 고문기구를 이용한 전기고문을 당하여 몸이 온통 시퍼렇게 망가져서 돌아 왔다고 당시에 최선생의 방에 자주 놀러간 안원순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였다.제 블로그의 최용신 일대기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표현하기가 무척 고심스런 내용이라 제가 삭제한 기억만 있었는데 순화하여 남겨 났네요.
20년전에 20대의 나이에 증언을 들으면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류달영교수도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식민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무순 자유가 있어요 완전히 노예예요,,,, 한 나라을 송두리체 빼앗아 노예로 부리는 게 식민지 이구나...완전히 굴복시켜 조그만 저항의식조차 없애 버리려던 일제의 모습을 느껴던 기억이 난다.
요즘 아베와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픔니다. 당시 최용신 선생의 아픔이 그랬을거라 생각합니다.
일본내에서 혐한! 똑똑히 기억해야합니다. 안원순 할머니 증언 저는 글을 통해 간접으로 읽고 그것 여자가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것```````````````````````우리는 그들의 만행을 규탄해야합니다. 과거는 그만 두고 현재만 보더라도 그런 억찌가 어데 있습니까? 서기 512년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독도를 신라영토로 편입한 이후 줄곧 지나 온 가운데 1907년 한 때 일본이 강제 점유하고 자기들 각의에서 결의한 배경을 바탕으로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그것을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고 `````그것이 인간입
니까?
우리국민 모두 그것을 잘 알면서 ?인들 침묵이니 걱정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안산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시는 시민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많은 이야기가 이어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