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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인협회 군산 탐방-채만식문학관 외
일시:2015년 5월 14일 목요일
탐방지:채만식문학관, 진포대첩기념탑, 금강하구둑, 뜬다리, 경암철길마을, 근대역사박물관, 동국사, 적산가옥 등
* 찬안 휴게소
서초문인협회 문인들의 봄 문학기행은 서초구민회관에서 오전 7시 30분에 출발했다. 군산 채만식 박물관 등 탐방을 하는 정기 봄 문학기행이다. 맛있는 떡을 먹으며 달린 버스는 천안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천안은 고향 같은 곳이다. 나는 교사 첫 발령을 이곳 천안시 신안초등학교에 받았고, 남산초등학교에서도 근무했다. 그래서 그날의 교단시절 회억이 떠올라 행복하다. 서초문협 문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오늘도 행복한 문학나들이다.
* 채만식 문학관
채만식 문학관은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다. 몇 년 전에도 서초문인협회에서 탐방했던 곳이다. 먼저 문학관 입구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햇살이 화사하여 뜨락이 곱다. 재향 소설가 백릉 채만식의 문학 업적을 기리고자 설립하였다. 2001년 3월 10일 개관하여 그의 문학작품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군산 개항 100주년 기념관 건립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채만식에 관한 각종 자료 및 친필 원고, 개항 100주년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소설 '탁류'의 무대인 금강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 문학사적으로 더욱 의미 깊은 곳이다. 아담한 2층 건물로, 1층에는 전시실과 자료실이 있는데 전시실에는 연대기 순서로 채만식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열거해 놓았다. 해설자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았다.
그의 대표소설 '탁류'를 소개하는 글이 잘 보이는 곳에 걸려있다. 탁류는 장편소설로 194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대표작이다. 군산을 배경으로 쓰여진 글이며 바닷물과 금강물이 만나는 혼탁한 탁류와 아주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군산에 미두米豆라는 투기노름이 성하던 때의 이야기다. 군고원을 지낸 정주사의 딸 초봉이는 정주사가 미두에 미쳐 가계가 어렵게 되자, 양약국 제중당에서 일을 했다. 혼기가 된 데다 미모인 초봉이를 노리는 남자가 많았다. 제중당 주인 박재호, 호색가인 은행원 고태수, 동정심으로 연모하는 금호병원 조수인 남승재 등이다. 서울로 유인하려던 박재호는 아내의 훼방으로 실패하고, 매파에게 홀린 부모의 권유로 고해수와 결혼했다. 꼽추인 장형보의 흉계로 남편을 잃고 꼽추에게 몸을 버린 초봉이는 무작정 서울로 가다가 박재호의 유혹으로 그의 첩이 되었다. 얼마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딸을 낳았다. 그때 장형보가 나타나 그 아이가 자기의 것이라고 하며 박재호에게서 초봉이를 빼앗았다. 남편을 죽이고 강간하고 선량한 박재호에게서까지 자기를 빼앗은 것이 곧 장형보인 것을 안 초봉이는 마침내 꼽추 장형보에게 극약을 먹이고 급소를 차 죽여 버렸다. 동생 계봉이와 그의 연인이 된 남승재가 초봉이를 구출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탁류에 희생이 된 초봉이는 살인자임을 자수한다. 풍자와 냉소, 욕설과 좌절감이 충만하고 음울한 모함과 사기, 살인이 전반을 통해 흐르는 이 작품은 1930년대 한국의 사회상을 집약한 것이다. 그 당시의 혼탁한 사회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채만식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모습도 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그의 나이별로 작품활동을 새겨 두어서 읽으며 걸어 올라갔다. 2층 영상 세미나실에서는 채만식의 일대기를 관람한다.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채만식은 6남3녀 중 다섯째 아들이다.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부속고등학원에 입학하였으나 1923년 중퇴하였다. 그 뒤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개벽사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6년부터는 창작생활만을 하였다. 1920년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45년 낙향하였고, 1950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제 식민지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였다. 풍자적 수법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작가 가운데 가장 투철한 사회의식을 가진 사실주의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대 문인의 발자취를 따라 문학은 무엇이며, 문인의 사명은 무엇인지 배우는 보람찬 문학나들이다.
* 진포대첩 기념탑
진포대첩 기념탑으로 가는 길은 금강 하구둑이 길게 보이는 아름다운 해변도로다. 시원한 군산 바다와 멀리 군산 시가지와 금강 하구둑을 조망하며 걸어서 갔다. 멀리서부터 우람한 진포대첩 기념탑이 오롯하게 보인다. 진포대첩이란 고려말 군산에서 있었던 전투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로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함포로 왜구 500여척을 무찌른 최무선의 진포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1380년 우왕 6년 왜선 500여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최소 25,000여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의 장군들로 하여금 최무선이 설계한 80여척의 병선과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최초의 화약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적을 소탕하였다. 기념탑 중앙에 최무선의 활약상을 조각상으로 세워 놓았다. 금강호 시민공원에 있어서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중앙 광장 옆에 높이 17.9m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진포대첩비가 높이 솟아 그날의 위용을 휘날리고 있다. 1999년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조형물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쳐부순 화포가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다. 5월의 화창한 날에 군산에서 최무선의 눈부신 활약상을 본다. 교과서에서만 만났던 인물인데 오늘 그의 장엄한 진포대첩 기념탑을 눈앞에서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본 보람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 금강 하구둑
나는 금강 하구둑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지만 탐방은 오늘이 처음이다. 군산이나 서천 부근에 여러 번 왔으면서도 저 길고 장엄한 금강 하구둑을 보지 않고 갔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조금 부끄럽고 미안했다. 진포대첩 기념탑으로 가며 자연스럽게 조망했다. 군산 앞바다의 싱그러운 갯바람을 쏘이며 해변도로를 따라 걸어서 갈 때, 긴 금강 하구둑은 물 위에 당당한 발로 서서 두 눈에 가득 담겨온다. 1,841m의 긴 제방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군산과 장항을 왕래하던 뱃길이 지금은 하구둑으로 인하여 자동차로 왕래한다. 강변의 갈대숲과 뒤편의높지 않은 구릉지 산이 더욱 자연경관을 아름답게 한다. 군산시 성산면과 서천군 마서면 사이에 있다. 전북 장수군에서 발원한 금강은 400여km로 전북 북부 지방과 충청도 땅을 동서로 가로질러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인공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금강 하구둑은 충남과 전북의 6개 시군의 대단위 농업개발로 농업기반공사가 8년 동안 공사하여 1990년도에 완공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한다. 토양과 모래가 흘러내려 강 하구에 쌓이는 것을 막아 군산항의 기능을 유지시키기도 한다.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농경지의 염해 피해도 막는다. 금강 하구둑이 완성되면서 주변의 갈대숲에는 겨울 철새들이 찾아온다. 국내 최대의 철새도래지다. 근처에는 철새조망대가 있어 금강 일대의 철새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조류공원, 철새신체탐험관, 부화체험관 등도 있어 철새생태 교육장소다. 군산 시가지와 바다, 금강 하구둑 그리고 해변의 갈대숲이 매우 아름다워 걸음을 자꾸 멈추게 한다. 가다가 다시 돌아보고, 길의 끝에서도 다시 고운 풍경을 그윽히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이었다.
* 군산 내항 뜬다리
군산 내항 뜬다리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군산 내항의 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다리 형태의 구조물이다. 참으로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의 미곡을 강탈해 가던 왜구의 그림자가 서린 곳이라 하니 아름다운 정경이 소슬하다. 극심한 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대형 선박을 접안시켜 미곡 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말까지 제3차와 제4차 축항공사를 하여 3기가 설치되었다. 다리 형태의 구조물을 연결하여 설치한 시설물이다. 바닷물의 들고나는 양에 관계 없이 다리는 뜨고 내리며 항상 양곡을 일본의 배에 실어주었다고 한다. 기가 막힌 기술이 놀랍지만 그 당시의 조상들에게는 피맺힌 다리다. 일본 제국주의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1926년 기공식에 참석할 만큼 제3차 축항 공사는 군산을 통해 미곡 수탈을 확대하고자 했다. 뜬다리를 통해 썰물 때에도 3천 톤급 기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진행된 제4차 축항공사에서 뜬다리 1기를 추가 설치하여 3천 톤급 기선 6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산 내항 뜬다리는 부분적으로 멸실되었고, 현재는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뜬다리 위를 걸어서 바다 가까이 가 보았다. 군산 바다에는 어선과 여러 배들이 정박하여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제는 당당한 조국의 풍요로운 바다다. 군산에서 슬픈 역사 한 도막을 보며 다시는 이런 족적을 남기지 않도록 조국을 잘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진포해양 테마공원
진포해양 테마공원은 군산 내항의 뜬다리 바로 곁에서 조망했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함포를 만들어 왜선을 500여척이나 물리쳤던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8년에 개관한 해양공원이다. 항만을 끼고 있는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지금은 쓰지 않는 군대 장비 13종 16대가 전시되어 있다. 월남전 등에 투입되었던 위봉함을 비롯한 해군함정, 장갑차, 자주포, 전투기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하다가 퇴역한 육, 해, 공군 장비들이다. 군장비 내부 안에 들어가 직접 승선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위봉함 내부에는 진포대첩 모형과 당시에 쓰였던 무기, 최무선 장군이 만든 화포이야기, 군함 병영 생활 체험 등을 전시해놓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우람한 풍경만 조망했다. 군산 바다와 뜬다리와 함께 매우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 경암 철길 마을
군산 시내의 명소를 돌아보다가 시가지 안에 있는 경암 철길 마을을 들러보았다. 1944년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에 준공하여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철로 주변의 마을 이름이다. 경암동 철길은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 철도다. 마을이 위치한 행정 구역 명칭에 따라 철로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경암동 철길 마을이라 불렀다. 1944년 일제 강점기 개설된 철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를 이루었고 1970년대 들어 본젹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암동 철길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최초로 개설되었다. 현재 경암동 철길 마을에 남아있는 집은 50여 채 정도이나 빈 집이 더 많다. 살고 있는 가구는 15가구 남짓이다. 철도 역시 현재 운행되지 않고 있다. 철길 마을의 건축물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건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벽 색깔은 대부분 푸른색, 자주색, 노란색 계열의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다. 문의 모양이 알루미늄 든 문, 판자 문, 양철 문 등 다양하다. 경암동 철길 마을은 방송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실제로 와서 걸어보나 경암 철길은 마을 사이의 기가 막힌 철도다. 그 당시 실제 그대로의 철도라는데 철길과 마을의 집이 거의 붙어 있는 곳도 있다. 이 좁은 철길에 어찌 기차가 다녔으며, 이 철길 가까이에서 어찌 사람이 살았는지 놀라운 풍경이다. 아직 훈훈한 사람의 거주 자취가 드리워진 좁다란 철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그림 같는 철길 주변 낡은 건물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낙서도 있고, 화분도 나와있고, 농작물이 자라는 영토도 있다. 이런 유적을 철거하지 않고 지켜 보존하는 군산시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한듯 모두 흐뭇한 얼굴로 철길을 걸어 나왔다.
* 군산 근대역사 박물관
군산은 우리나라의 근대 문화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근대역사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채만식 소설가를 소개하는 글과 그의 작품 제목이 적힌 책 모양을 단으로 쌓아 비석으로 세워 놓고, 그 당시의 유물과 활동인물들을 동상으로 제작하여 세워 놓았다. 근대역사 박물관은 전국 최대의 근대 문화유산을 소유한 군산 지역의 근대 문화와 해양 문화를 홍보하고자 건립하였다. 2009년에 착공하여 2011년에 개관하였다. 지하1층, 지상 4층 건물로 여러가지 전시장이 있다. 박물관 1층 입구에는 어청도 등대 모형이 있다. 영상실, 해양 물류 역사관, 어린이 박물관, 근대 규장각실, 탁류의 시대로 구성된 근대 생활관, 기획 전시실 등이 있다. 1층에 들어서자 높은 천정이 시원하고, 드넓은 공간이 열린다. 바닥에는 영상자료가 흐른다. 벽면에는 역사적인 해설과 유물, 신문 내용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당시 군산에 있던 조선은행도 소개하고 있다. 군산 해저에서 좌초된 일제의 배에서 꺼냈다는 세계 각국의 동전함이 아주 인상적으로 시선을 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일제시대에 우리 선조의 농작물을 찬탈해 가던 잔혹상이 하얀 동상으로 제작되어 소슬한 정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진과 여러가지 자료로 전통적 물류 유통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군산시의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군산에서 우리나라 역사의 한 단면을 보고 배운 소중한 시간이다.
* 옛 군산 세관
군산 시가지 대로에 옛 군산세관이 서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군산항에 드나들던 물품에 세금을 징수하던 곳이다. 1899년 광무 3년에 설치된 세관이다. 이 건물은 1908년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당대 유일한 세관건물이다. 길 건너에서 바라보았다. 이 건물은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1908년부터 1993년까지 약 85년간 사용했던 세관이다. 건물의 설계는 독일인이 했고, 벨기에의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이다. 서울역사와 양식이 비슷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까지 주로 호남과 충청지역의 쌀, 곡식 등을 일제가 수탈하던 창구로 이용됐는데 지금은 호남세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세관의 발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료로도 쓰인다. 곁에는 오늘날의 군산 세관 건물이 현대풍으로 다부지게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빼앗기고 살았다. 일본은 자국의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나라에서 많은 쌀을 수탈해 갔다. 일본은 군산 주변 호남평야의 미곡을 거둬가려고 군산에 항만시설을 만들었다. 군산은 수탈과 착취의 슬픈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런 과거의 아픔이 여전히 군산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 군산 동국사
이번 문학탐방에서 군산의 유적지 곳곳을 돌며 상세히 본다. 일본 잔재로 남은 사찰 동국사로 오르는 길은 약간 가파르다. 도로변에는 군산이 고향인 고은 시인의 시가 걸려 있어 서초문협 문인들의 시선을 이끈다. 동국사에 고은 시인이 입문하여 10여년간 머물다가 속세로 나갔기 때문에 더욱 애잔한 그의 향수가 서려 있다. 이 사찰은 191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승려 우치다에 의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양식을 띠고 있다. 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다. 정원에는 울창한 나무 숲이 싱그럽다.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일본 에도 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처마에는 우리 나라 사찰과는 달리 아무런 장식도 없는 특징을 하고 있다. 김남곡 스님이 8·15 해방 후 금강사였던 이 사찰을 동국사로 개명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사찰은 모두 없어지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특히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일본 목조건축 양식의 사찰 건축물이다.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불교 사찰이다. 눈으로만 바라보면 대웅전과 주변 풍경이 매우 수려하다. 일본 현지의 사찰 앞에 선 느낌이다. 가슴으로 바라보면 서러운 일제 잔재다. 하지만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여 그 당시의 불교 역사를 전시함에 숙연해진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늬 사찰과 크게 다르진 않고 엄숙한 분위기다.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는 뼈아픈 과거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훈시하는듯, 동국사는 조국의 혼으로 승화되어 그렇게 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군산 적산가옥
적산가옥이라는 말이 생소하였는데, 군산 도심 한자락 내어 일본의 거리와 일본 주택을 그대로 전시한 풍경을 보며 새삼 깨달아 알았다.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영토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뜻한다. 적산가옥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부르는 말이다. 이런 적산가옥은 여기 말고 다른 곳에도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불하되었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본식 주택의 특성이 잘 나타나는 건축물로 일제 강점기 군산에 거주하였던 일본 상류층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약간 변형된 것도 있지만, 건축물의 구조와 내외부 공간, 장식 등에서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수많은 한국 영화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이곳 일본식 가옥은 1925년 사용 승인된 것으로 건축물 대장에 기록되어 있다. 2005년에는 국가 등록 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다. 대규모 목조 주택으로 2층의 본채 옆에 단층의 객실이 비스듬하게 붙어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다. 아름다운 정원에 연못이 있는 넓은 집도 있다. 몇 채의 가옥이려니 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일본 가옥 행렬이다. 크고 작은 목조 주택들이 그 옛날 유년의 향수를 자아낸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그 학교 건물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근무하던 오랜 역사를 지닌 천안남산 초등학교도 지금 보는 저 목조건물과 같은 형태의 건물이었다.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목조 건축의 초등학교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조국이 그리울 때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군산에서는 어느 유적을 보아도 재해석해야 한다. 피서런 왜적의 역사 유적인데 왜 그대로 둘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역으로 다시는 이런 역사의 마디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뜨거운 교훈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후손 대대로 길이길이 지켜야할 우리의 조국이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서초문인협회의 봄 문학탐방은 마무리 되었다. 서해안의 작은 도시로만 알았던 군산을, 이토록 깊은 역사가 담긴 소중한 도시로 재조명한 뜻깊은 문학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