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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의 밤/ 권보드래 지음
3부 3.1운동의 얼굴들
1장 시위문화 : 정치, 일상의 재조직
◆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평양의 독립선언식은 3월1일 오후 1시에 시작.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등을 끝내고 소형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향해 행진. 외국 선교사들이 앞장선 평온한 행진 그리고 만세와 노래
3.1 운동은 한반도 사상 초유의 도시 거점 대중적 저항운동이었던 만큼 도시 봉기로서의 문화를 풍부하게 구축하지는 못했다. 상시 계엄령 체제와 같았던 1910년대, 도시문화 자체는 발달했지만 저항적 대중문화는 싹트지 않았던 것이다. 음악과 노래를 동원할 때도 그 원천은 주로 앞선 시대였다. <애국가>와 <학도가>, <혈성가>, <소년행진가(전진가)> 풍의 레퍼토리가 여러 지역에서 불렸다.
농촌 지역에서의 시위는 다소 달랐다. 농악이 주종이었다. 나팔과 징, 북을 동원. 원산에서는 장터에서의 선언식 후 “만세를 부르며 나팔을 불고 징과 북을 울렸다”고 한다.
◆ 팔각정, 가마니더미, 고무신수레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를 선창한 사람들은 높은 곳을 찾았다. 대한제국기 만민공동회 때도 종로 백목전 2층을 연단 삼아 썼다지 않은가. 쌀가마니나 소금가마니를 쌓아 단처럼 만들기도 했다. 고무신장수가 끌고 온 수레 위에서 선언서를 읽었다. 지붕 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 산상시위와 봉화
3.1운동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위 장소는 장터겠지만, 높은 곳으로 산으로 올라가 만세 부르는 일도 많았다. 마을 남산, 면사무소 뒷산, 금화산 꼭대기 등등
산상 만세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목격된다. 낮이 아니라 밤에 만세를 부르는 경우에도 흔히 산을 택했다. 밤에 산상시위를 벌일 경우 대개 횃불이나 화톳불이 동원됐다. 산상 봉화시위는 주로 촌락공동체에서 출현한 현상이다. 지역별 편차는 컸지만 밤에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동리도 많았다. 대개 3월말 4월초에 집중된 현상이었다. 봉화시위는 산상시위의 변종으로서 ‘단’ 위에서 외치는 방식이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고 어둠 속에서 끝났다. 경찰이나 군대와 대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원파악이 용이치 않다는 이점. 시위의 지속 및 참여자의 안전을 고려한 방식.
◆ 물동이 준비한 시민들과 한복 입은 학생들
3월1일 탑골공원을 출발한 시위대는 동서 두 갈래로 나뉜 후 다시 각각 두세 개의 대열로 갈라져, 시내 주요 간선도로를 거치며 덕수궁, 창덕궁을 경유하고 정동 해외 영사관 앞을 지나 후 어둑해졌을 때 오늘날의 명동 일대에서 해산됐다. 이때쯤에는 기마 경찰과 헌병이 동원되고 민간 일본이들도 칼이며 갈고리 등을 휘두르며 나서, 시위대 중 “먼저 도망하려는 자, 앞을 다투는 자, 노유부녀의 울부짖는 소리, 서로 밟고 서로 밀어 부상하는 자”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오후 내내 “만세”를 외치다 보니 목이 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염치불구 인근 민가로 들어가 목이 쇤 탓에 손짓으로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표시했다. 집주인은 꿀물을 만들어주고, 인절미도 꿀에 찍어 권했다. 물을 주고 떡을 먹이고, 시위 대중을 성원하는 움직임은 3.1 운동 내내 이어졌다. 시위가 잠잠해지고도 한참 동안, 투옥자 옥바라지를 위해 돈을 모으고 그 가족을 돌보는 일도 계속됐다.
3.1운동 내내 민족 내부의 분열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여든 학생들은 대개 교복 대신 한복을 착용했다. 쉽게 눈에 띄는 것을 피하려 한 것일 수도 있고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꺼린 까닭일 수도 있으며, 혹은 조선인 일반으로서의 정체성을 먼저 드러내고자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안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두루마기에 빵떡모자’, ‘두루마기에 사냥모’로 변복한 학생이 곳곳에 출몰했다. 신발은 구두 대신 미투리(구두는 대개 학교를 다닐 때만 신는다). 여학생들은 한결같이 흰 저고리에 회색이나 갈색 치마, 미투리를 신었다.
◆ 선언과 격문의 테크놀로지
민족대표 33인이 발단이 된 운동이 조직적으로 허약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손병희를 비롯해 민족대표 사이에서는 선언만으로 만족하자는 신중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대중 사이 자발적 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자 일각에서는 사후적으로나마 조직화를 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용의주도하게 집회를 준비했지만 국민대회에서 문자의 테크놀로지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등사기나 목판, 목활자 등의 인쇄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일이 손으로 써 어렵사리 선전물을 만들든가 기껏 탄산지로 몇 장씩 복사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유학자들은 죽은 황제를 애도하고 상복을 입는 데 앞장섰지만, ‘만세’를 거북해 했고 선언에도 참여치 않았다. 대신 이들은 상소나 청원을 통해 언어적 실천을 모색하고자 했다. 3월3일 고종의 장례식 날 순종의 행렬을 가로막고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3월 말에는 전국 유림이 서명한 장서를 파리를 향해 발송했다. 오래된 사상과 낡은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폭력에 최선 을 다해 항거했다.
◆ 유생 송준필, 서당 마룻장을 뜯어내 통고문을 인쇄하다
봉강 서당에 소속된 흥효당의 마루 나무가 감나무였으므로 한 장을 빼어다가 정결하게 다듬고, 송인집이 글을 쓰고, 송중립이 글을 새겼다. 목판에 먹을 발라 통고문을 인쇄한 것이 3000장. 일을 끝낸 후 마룻장은 다시 본래 자리에 넣어두었다. 1980년에 보고될 때까지 그 목판은 서당 바닥의 마루 중 한 장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 등사기 네트워크와 출판의 법리
3.1운동을 통해 선언서나 격문, 경고문 등 문서류의 절대다수는 등사기를 통해 제작됐다.
호리이 등사당- 조선 내 등사기의 급속한 보급에 기여, 호리이식 등사기의 발명으로 구약판이나 탄산지 복사가 고작이었던 소규모 인쇄의 영역은 크게 개척된다.
선언서나 신문 한 장을 구하면 수십 장을 등사, 배포하고, 자기 자신이 쓰고 덧붙이고, 다시 인쇄해내는 식의 증식과 변형에 등사기는 안성맞춤의 테크놀로지였다. 그런 만큼 3.1운동 이후 식민지 시기 내내 등사기는 위험한 기계였다. 당연히 등사기를 은밀히 간수했다. 등사기를 기름종이에 싸서 우물 속에 보관하기도 했다. 자기 집 부엌에서 불태우고 금속 부분은 집 뒤의 땅 속에 묻었으며 그 나머지는 부엌 아궁이 속에 숨기는 치밀한 해체 방식으로였다. 등사기를 구하고 종이와 잉크를 조달하고 집필과 인쇄, 배포 작업을 분담하는, 3.1운동 당시 그 자체 실천이자 현실었던 문자 언어, 그 중심에 위치한 등사기라는 기계는 그 자체로 불온이 증거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독립의 비밀, 독립의 자금
가마니 속에 감추거나 빨래 광주리, 보따리를 만들어 이거나 아이를 업듯이 둘러메어 날랐다. 두부모 아래 기름종이에 싸 넣고 장수인 양 짊어지고 다니다가 집집마다 신문을 밀어 넣기도 했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방법은 서울은 학생들이 지방은 기독교계가 평안도 지역을 천도계가 황해, 충청, 전라, 강원도 일원을 감당했다. 배송자 선정 및 배송 자체는 다소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무신 수레 위에 서는 데서 팔각정에 오르는 데까지, 손으로 쓴 격문에서 대량 인쇄의 출판물까지, 정감록 풍 주문에서 기독교의 찬미가까지-3.1운동은 실로 각색의 문화가 공존한 장이었으며, 각양의 테크놀로지가 병립한 현장이었다.
2장 평화 : 비폭력 봉기와 독립전쟁
◆ 식민자의 목숨과 피식민자의 목숨
3.1운동, 특히 3월 초,중순 도시 거점의 봉기는 평화주의적 숭고로 채색돼 있다. 난폭한 헌병의 칼을 빼앗고도 “개 같은 네 목숨을 남겨둠은 공약 3장의 정신을 위함이다”라며 무저항으로 죽음을 맞는 청년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의 정신, 즉”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는 당부는 여러 신문과 격문을 통해 반향되었다.
◆ 그들은 왜 무기를 탈취하지 않았나
제1차 세계대전 직전, 19세기 말~20세기 초는 폭력과 테러리즘이 번성한 시기였다. 그리고 1919년 평화의 역설과 폭력의 옹호가 교차하면서 전 지구적 유토피아니즘 속에서 평화와 폭력이 재조형되던 시기였다.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은 왜 비폭력을 선택하고 실천했을까? 세계적으로 평화, 폭력론이 재론되고 있었다지만 그것을 알 리 없었을 갑남을녀들, 그들이 목숨을 바쳐 평화를 추구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3.1운동 당시 조선인의 무장 능력이 일본인에 비해 현저히 미달했던 것은 사실이다. 비폭력이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일수도 있었으리라는 뜻이다. 3.1운동 직전인 1918년 말 조선인이 소유한 총기는 군용총과 권총, 장총, 엽총 등을 통틀어 전체 민유 총기의 6.8퍼센트인 총 1731정에 불과했다. 반면 일본 민간인은 군용총만도 1776정에 총 2만 5590정의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던데다, 경찰서에 총기를 위탁해야 했던 조선인과는 달리 개인 소지를 허가받아 한결 쉽게 무기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3.1운동을 통해 목적의식적 무기 확보 시도가 없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조선인에 의한 총기나 화기 사용 기록도 거의 없다.
3.1운동 직후 무력투쟁이 극렬해졌다는 사실은 3.1운동기, 특히 초기의 비폭력주의가 결코 불가피한 전략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3.1운동의 비폭력은 체계적이거나 수미일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사실상 전 국민은…국제적 도의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었다. … 그야말로 중세 유럽의 십자군 같았다. … 전 국민은 ‘평화조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위해 몸 바칠 각오가 돼 있었다./ “약소민족의 자유를 위해, 강대국이 약소민족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3.1운동의 대중은 면사무소와 헌병, 경관주재소를 파괴할지언정 인명을 다치려 하지 않았고, 반역자와 방관자를 응징할지언정 그 존재를 절멸코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권력)을 갈망하고 때로 폭력을 불사했으나 결코 비폭력과 평화라는 항구적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적대 없는 세계를 꿈꿀 정도로 무모했다. 3.1운동의 비폭력주의는 적대성의 철폐를 요청하고 차별과 공포의 통치성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정치적 항의이자 문화적 대안이었다. 평화론과 폭력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평화에의 기대가 최고로 드높아졌던 1919년, 조선인들은 세계의 전환에 공명하면서 그 전환의 완성을 끝까지 요청하고자 했다.
◆ “때리고 불 지른다고 해서 만세를 불렀다”
3월에 있었던 봉기의 경우 비폭력이 124건인 반면 폭력 사용은 28건에 불과했다. 3.1운동기 전체를 본다면 그 비율이 516건 대 332건으로 폭력 시위의 비중이 대폭 늘어나지만, 폭력의 양상은 몽둥이와 농기구 돌멩이가 고작이었다. 조선인에 의한 일본인 민간인의 희생은 전무했다. 3.1운동에 있어 ‘최후의 일각까지’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는 자세에 가깝지 억압자의 죽음을 목표로 한 전략이 아니었다.
반면 조선인 내부의 폭력, 살해 협박은 적잖이 목격된다. 군수나 면장과 헌병보조원 등, 식민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조선인을 향한 협박이 우선이었다. 이완용과 박희병 등 ‘친일파’로 소문난 인사들의 집이 파괴되고 그 타살이 선동되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폭행이 두려워 만세를 불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3월 중순 청량리 일대에 뿌려진 전단에서는 “이 동네 사람들은 왜 만세를 모르난다. … 이달 말까지 만세 부르지 않으면 석유 2~3미차면 전멸하리라”고 공포했다. 방화를 겁내 피난 가거나 실제로 만세를 거부하는 이를 구타하거나 그 집에 방화한 사례도 있었다.
3.1운동기 봉기 대중이 행사한 물리력의 양상은 그렇듯 화해와 대동의 언어이기도 했던 ‘만세’를 연상시킨다. 만세 부르지 않으면 구타한다고, 시위에 협력하지 않으면 불지른다고 위협할 때, 그것은 물론 위험을 나누자는 협박이었지만 동시에 환희를 함께하자는 초대이기도 했다.
◆ 구타와 파괴, 때로는 축제 같은
3.1운동은 폭동이자 축제였다. 이미 독립했다는 소문이 그런 분위기를 고무했겠지만, 3.1운동의 봉기 대중은 근 10년 식민통치의 고통을 벗어나 자존을 찾게 된 경험에 열렬하게 환호했다. 힘을 과시하고 향유하면서 스스로의 위력을 유쾌한 것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자네가 삽을 휘둘러 주재소 게시판을 칠 때 비호 같더라” “주재소 유리창을 내리치자 쉽게 부서져 유쾌했다” ”헌병들과 실랑이를 벌였고…칼을 빼앗으려고 했고…물어뜯고 방해”했다. 감정의 배치로 따질 때 공포가 아니라 유쾌, 환희, 희망의 성분이 결정적인 이같은 장면은 3.1운동의 특징적 국면 중 하나다.
1910년 이후 숨죽인 채 근 10년을 살았던 후다. 꼭 민족을 아끼고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세금이 신설되고 부역에 동원되고 물가가 폭등하는 세월 끝에 1919년 봄은 모처럼 속 시원한 시절이었다. 마을 구장의 증언에 의하면 귀가길 사람들은 “순사를 때려죽이고 왔다고 하면서 대단히 뽐내”고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듯 축제 같은, 난장 같은 일면이 없었다면 3.1운동의 봉기는 훨씬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비굴했던 자아를 펴고 힘을 발휘하면서 3.1운동의 대중은 공동행동에 의해 탄생하는 권력을 만끽했다. 그것은 존재가 새롭게 개시되는 순간, 폭력과 비폭력의 인간주의적 구분을 재고케 만드는 순간이었다
◆ 3.1운동 이후의 무장투쟁, 잔혹한 반격 그리고
3.1운동기의 비폭력이 회의되고 부정되는 순간은 이광수의 장편[유랑], 이기영의 [두만강], 나카니시 이노스케 [너희들의 배후에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해외에서는 1919년 5월 독립전쟁을 위한 군정서가 설치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암살, 파괴, 폭파를 행동방식으로 채택한 의열단이 창설됐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하고 공중전에 대비할 비행기 구입까지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밖에도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보합단, 광한단 등 다양한 무장투쟁단체가 줄지어 탄생했다. 국경 지역뿐 아니라 서울 등 내륙에서도 총기를 동원한 각종 사건이 빈번해졌다.
청산리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식민자다운 보복을 단행했다. 간도대학살이라고도 불리는 경신참변이 바로 그 결과다. 일본군은 약 2만명의 대병력을 동원, 간도 지역 한인촌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으며, 소탕과정에서 주민들을 독가스로 살해하고 칼로 난도질하고 작두로 목자르고 산 채로 불에 던졌다.[독립신문]에 따르면 경신참변 희생자는 총 3693인, 이재민은 약 5만 인에 이른다.
돌이켜보면 3.1운동은 인도의 사땨그라하처럼 철두철미한 정신적 기반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3.1운동의 평화와 비폭력은 그 사상 자체를 정련하는 방식으로는 거의 계승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