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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빛을 찾아 샴발라에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샴발라 센터 본부 방문기
글 | 이성범 KBS PD (한국언론진흥재단 장기해외연수자)
삼발라 핼리팩스 센터
초감 트룽파 린포체
뉴저지 중부에 아카시아 꽃이 막 피어나 꽃향기가 동네 언덕위로 흩어져 나갈 즈음 미주현대불교에서는 특별 취재를 준비했다.
그동안 본지에서는 북미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샴발라 센터들을 다양한 지면을 통해 소개 해왔다. 이번 특별 기획은 그동안 소개하지 못했던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의 핼리팩스(Halifax)에 위치한 샴발라 센터 본부를 취재하는 일이다.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샴발라 센터의 본산(本山)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핼리팩스의 본부로부터 취재 허가를 받은 후 미주현대불교 김형근 편집인과 필자는 취재를 위해 5월 말에 3박 4일간의 출장을 떠났다. 자동차를 타고 육로로 이동하기에 뉴욕을 출발해 미국 북동부의 최북단에 위치한 메인(Maine)주를 거쳐 미국·캐나다 국경을 통과하고 다시 캐나다의 뉴브런즈윅 주를 지나 노바스코샤 주에 다다르는 왕복 1000마일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다.
북미 대륙에만 136개가 있는 샴발라 센터(Shambhala Centre)와 그룹은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가운데 하나로 수행을 중시하는 카규파의 대표적 스승인 트룽파 툴구(화신이란 뜻의 티베트 말)의 11대 화신인 초걈 트룽파(Chogyam Trungpa)가 창립한 불교 명상센터이자 사찰이다.
초걈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 출신의 명상 지도자이자 예술가이다.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300여명의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탈출하기에 이른다. 히말라야 산맥을 열 달이 걸려 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50여명만이 생존하여 인도로 망명할 수 있었다. 당시 망명 과정에서 그는 혹독한 고난과 동포들의 죽음, 두려움에 맞서야 했다.
초걈 트룽파는 이 망명을 위한 대여정에서 강함과 용기에 기반을 둔 명상적 통찰에 의지했다고 알려져있다. 그 후 인도의 영 라마 스쿨(Young Lamas School)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7년을 보내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비교종교학과 철학을 수학하게 된다. 197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몬트(Vermont)주에 카메 쵤링 선원을 창립한 이후 명상수행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고 불교의 진리인 ‘다르마(Dharma)’를 서구 사회에 전하는데 힘썼다. 북미 최초의 불교대학인 나로파 대학(Naropa University)을 콜로라도(Colorado)주 볼더(Boulder)에 설립했으며, 이후 전 세계에 100곳이 넘는 수행센터 즉, 샴발라 센터(Shambahla Center)를 창립했다. 1977년 초걈 트룽파는 처음으로 캐나다의 노바스코샤주를 방문한다. 이후 1983년에 노바스코샤 주 케이프 브레튼(Cape Breton)에 감포 애비(Gampo Abbey)라는 사원을 건립하고, 1986년에는 그를 따르던 백인 신자들을 데리고 콜로라도 주 볼더에서 캐나다의 구석진 곳인 노바스코샤 주의 핼리팩스로 이주를 감행하게 된다. 이때 대다수의 백인 신자들이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초걈 트룽파 린포체를 따라 핼리팩스로 이주를 한다. 함께 이주를 한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들을 합쳐 600여 명에 달한다. 어떤 연유로 이 이 수많은 사람들이 초걈 트롱파를 따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캐나다의 구석진 곳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떤 영험한 힘이 있는 성지(聖地)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5월 23일 새벽 6시, 뉴저지 주의 자택에서 출발해 미주현대불교가 위치한 플러싱으로 향했다. 지난 2010년 김형근 편집인을 처음 만났던 당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플러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메인 스트리트에는 이전보다 많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출근을 하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모습에서 플러싱이 더욱 복잡다단한 풍광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플러싱하면 떠오르는 한인 타운 인근에는 지난 10년간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메인 스트리트에서 발행인을 만나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북미대륙의 북동쪽을 향해 장도(長途)에 나섰다. 이번에 연수를 와서 이 정도의 장거리 여정을 떠난 적이 없기에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하였다.
아카디아 국립공원
출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코네티컷(Conneticut) 주 쪽으로 향하는 길이 다소 복잡했다. 러시아워가 지나고 뉴욕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자 도로가 한산해 지기 시작했다. 5월 초 코네티컷 주의 뉴 하트포드(New Hartford)에 위치한 대연불보정사를 찾았을 때는 막 봄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곳도 어느새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 있었다. 코네티컷 주를 지나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을 에둘러 95번 고속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북동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중간 기착지로 삼고 있는 메인 주 뱅고어(Bangor)시 근처의 윈터포트(Winterport)까지만 해도 뉴욕에서 차로 7~8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우선은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가야 하기에 그곳을 목적지로 해서 부지런히 달려갔다. 운전을 한 사람이 2~3시간 이상 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에 상대방이 피곤해지기 전에 서로 교대하며 중간에 급유도 하고 휴식도 취해가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필자가 미국 북동부에서 가장 멀리 가본 곳이 보스턴이었는데 어느덧 그곳은 스치고 지나 메인 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미국 동부의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던킨 도너츠가 유달리 눈에 많이 띈다. 바로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인근의 퀸시(Quincy)가 던킨 도너츠의 발상지라고 한다. 장시간 운전에서 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던킨 도너츠에 간간히 들려 커피를 마셨다. 김형근 편집인은 다른 커피숍의 커피보다 이곳 던킨 도너츠의 커피가 자신의 졸음을 쫓는데 특효약이라 했다. 커피 한 잔으로 운전의 피로를 물리치며 달리기를 5시간 여. 드디어 매사추세츠 주 경계선을 지나 메인주로 들어섰다. 큰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주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 메인 주의 풍광이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메인 주의 첫인상은 정말 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북동부에 위치한 추운 지방이어서 그런지 침엽수가 유달리 많이 늘어서 있었다. 사실 필자에게 메인 주의 인상은 소설 속에 그려진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의 대중 소설가로서 크게 성공했으며 한국에도 많은팬을 거느리고 있는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고향이 바로 메인(Maine)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의 배경도 바로 이곳 메인이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인 ‘쇼생크 탈출’, ‘돌로레스 클레이븐’, ‘It’을 보면 메인 주는 초능력자, 흡혈귀가 등장하고 죄수와 정신이상자가 활개치고 다니는 곳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정작 메인 주에 와보니 이곳은 푸르른 숲하고 호수, 강, 바다가 충만한 자연의 혜택을 가득받고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그동안 소설의 설정에 상상력을 지배 당했던 것이다. 저녁이 다 되어 뱅고어 시 근처의 마을 윈터포트(Winterport)에 당도했다. 한 거사 부부의 댁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서이다. 뉴욕에서 800km를 북으로 거슬러 올라오니 계절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뭇잎들이 신록처럼 싱그럽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5월 중순이 되어서야 이곳에 신록이 시작된 것이다. 페놉스코트 만(Penobscot Bay)으로 흘러가는 강가에 자리 잡은 시골집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밤에 정말 아무 소리가 없는 고요한 시골 마을에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강가에 깃드는 햇살을 벗 삼아 다시 여정을 이어갔다. 캐나다로 넘어 가기 전에 메인 주에서 가장 유명한 아카디아 국립공원(Acadia National Park)에 들리기로 했다. 이곳은 메인 주의 남동부에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20여 개가 넘는 호수와 해안가의 아름다운 숲이 유명한 곳이다.
이 공원을 일주하는 해안도로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시간이 많지 않기에 우리는 곧장 캐딜락 마운틴 주위를 드라이브하며 바닷가를 둘러보고 곧장 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캐딜락 마운틴 정상에 도달하자 메인만 해안의 여러 섬들이 풍경화처럼 드넓게 펼쳐진다. 우리나라 남해의 한려수도에서 보는 풍광처럼 바다 위로 수많은 섬들이 아름다운 수를 놓고 있었다. 공원이 위치한 마운튼 디저트 섬(Mountain Desert Island) 곳곳에는 푸른빛의 아름다운 호수들이 자리 잡고 있어 바다에는 푸른 섬들이, 섬 위에는 푸른 호수들이 5월의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아카디아 국립공원을 둘러본 후 이곳에서 가까운 바 하버(Bar Harbor)란 곳에 들려 점심을 먹고 다시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메인 주에서 랍스터 요리는 빼놓을 수 없는 진미다. 메인 주는 북미에서 주요한 랍스터 산지로 유명하기도 하다. 차갑고 거친 대서양의 바다가 키운 메인 주의 랍스터는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살이 단단하고 바다의 풍미가 가득했다. 메인 주에서 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북으로 향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국경선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 캐나다 국경 검문소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캐나다 할리팩스 시내 모습
미국과 캐나다 국경은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었다. 다리를 건너 캐나다 국경 검문소에서 입국 허가를 받고 캐나다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 오면서 가장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도로의 한적함이다. 인구 밀도가 높지 않은 메인 주에서도 도로 위에서 많은 차들을 볼 수 있는데 캐나다로 들어서자 어느덧 차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마치 전용차선을 이용하는 것처럼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들어선 뉴 브런즈윅(New Brunswick) 주의 풍광도 메인 주의 풍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침엽수림이 드넓게 펼쳐진 숲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습원(濕原)이 펼쳐져 있었다. 해안을 따라 고속도로는 북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노라니 샴발라 센터 본부가 이동한 곳이 무척이나 한갓진 곳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국경을 지나서도 6~7시간을 더 올라가야 했기에 날이 저물어 오자 우리는 인근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노바스코샤 주의 트루로(Truro)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핼리팩스는 1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어 다음날 아침 미팅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캐나다 동부의 끝자락, 신비의 땅으로 불리는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샴발라 센터 본부가 위치한 노바스코샤 주의 핼리팩스(Halifax)라는 곳은 사실 타이타닉호의 슬픈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사우스햄프턴(Southampton)을 출항하여 첫 항해를 시작한다. 건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던 타이타닉호에는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 2,223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배는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다가 4월 14일 밤 11시 40분, 바로 핼리팩스에서 멀지 않은 뉴펀들랜드랜에서 남서쪽으로 640km 떨어진 바다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다. 약 1,514명의 사상자를 내며 구조 인원이 706명에 불과할 정도로 당시로는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였다. 그 당시 사고 처리를 한 항구도시가 바로 핼리팩스였다. 타이타닉호의 선주회사 화이트스타 라인에서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핼리팩스의 항구에서 인양선을 출항시켰고 발견된 시신들도 항구로 운구해왔다. 수습된 209구의 시신 중 150구가 핼리팩스 시립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한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곳을 찾아 간다고 생각하니 어느새 마음이 숙연해 졌다. 다음날 아침 약속 시간에 맞춰 숙소를 빠져나와 핼리팩스로 출발했다. 아침 길에 을씨년스러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항구쪽으로 다가서자 대서양의 거칠고 차가운 바다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샴발라 센터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본부 사무실은 바다와 가까운 핼리팩스의 다운타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본부(Headquarters) 사무실에는 10명에서 12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근무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서쪽으로 네 블록을 더 올라가면 샴발라 센터(Shambhala Center)의 본부격인 샴발라 인스티튜트(Shambhala Institute)를 만나게 된다. 건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박하고 아담한 규모였다. 건물 안에는 짜임새 있게 법당과 명상 수련 장소, 회의실과 사무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홍보와 커뮤니케이션 담당인 마크웰리(Mark Whaley) 그리고 디렉터인 미셸 먼로(Michelle Munro)였다.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한 것은 ‘왜 이곳으로 이주를 했는가?’였다.
샴발라 스쿨
삼발라 센터 안내자와 김형근 발행인
티베트가 중국에 침공을 당하자 초걈 트룽파(Chogyam Trungpa)는 인도로 300여명을 이끌고 이주를 했다. 이후 다시 한 번 미국에서 600명에 달하는 신도들을 데리고 대서양의 거친 바다가 부딪히고 거친 해풍이 휘몰아치는 캐나다 북동부의 오지로 이주를 한 것이다. “아, 어떤 이유로 미국 콜로라도 볼더에서 이곳 핼리팩스로 이주를 했는지 궁금하시다고요? 그건 정확한 답이 없는 열려있는 질문일겁니다(That is an open question),” 미셸이 대답했다. 옆에 앉은 마크는 자기 생각을 더했다. “초걈 트룽파 린포체는 이곳을 특별한 힘을 지닌 성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고 물질주의가 만연한 곳이 아닌 좀 더 여유롭고 정신이 충만한 장소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정신 수양을 깊이 할 수 있고 좀 더 공동체 사회가 열려있는 곳에서 포교 활동을 하려고 하셨어요. 특히 이곳 노바스코샤 주에는 명상이나 수양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아요. 캐나다에서도 오지로 불릴 정도로 동부의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수련( retreat)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지닌 곳입니다.” 미셸은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80년대 당시 이곳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마크는 5년 전에 콜로라도 볼더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했고 샴발라 인스티튜트에서 초걈 트룽파 린포체(Chogyam Trungpa Rinpoche)의 아들인 사춍 미팜 린포체(Sakyong Mipham Rinpoche)의 업무를 돕고 있다. 미디어와 기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전문 스태프이다. 그는 핼리팩스에서의 삶에 큰 만족을 느끼고 있어 캐나다 시민권을 신청하려고 준비 중이라 했다. “이곳 샴발라 인스티튜트에는 모두 41명의 스태프가 상주하고 있습니다. 현재 465명의 정식으로 등록된 회원들이 우리 센터에서 개최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어요. 전 세계적 규모로 이를 확대해서 보면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샴발라 센터에서 주최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샴발라 센터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활동하는 회원들의 수는 1만 4천 명에 달합니다. 지도자 자격을 지니고 포교와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3천 명 정도로 전 세계를 무대를 활약하고 있습니다. 초걈 트룽파 린포체(ChogyamTrungpa Rinpoche)의 뜻이 이렇게 전 세계로 확대가 되어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죠. 지금은 아들인 사춍 미팜 린포체(Sakyong Mipham Rinpoche)에게 계승되어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식적으로 설립된 센터의 수는 약 250여개에 달한다. 하지만 마크는 누구라도 자격을 갖추면 샴발라 센터(Shambhala Center)나 그룹(Group)을 구성해 신도들과 함께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명상을 해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 장소가 자신의 집이어도 말이다. 그만큼 샴발라 센터 본부에서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운용하여 누구나 쉽게 가르침을 접하고 불교의식을 체득할 수 있도록 기본 설계를 해놓았다. 샴발라의 가르침을 체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샴발라 본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과 교육, 그리고 체계적 매뉴얼을 통해 그룹이나 센터를 만들 수가 있기에 자기 집, 커뮤니티 센터 등에서 친구들이나 가족, 지인들과 함께 명상 수련, 법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규모의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기에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룹의 규모와 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한국 불교가 미국에 하나의 사찰을 세우고 주지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하나의 건실한 불교 공동체를 만들기까지 험난한 과정과 세월이 걸리는 것에 비하면 샴발라 센터의 설립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접근을 해 가족, 지인 중심으로 신도수를 늘리고 센터와 그룹의 규모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 핼리팩스에 자리 잡은 샴발라 인스티튜트는 3층 건물의 아담한 규모이지만 실제 지역사회의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샴발라 센터와 그룹의 수를 생각한다면 얼마나 큰 규모로 확장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제공하고 있는데 초보자 그룹을 위한 수련과 수업에서부터 중급의 신도들을 위한 프로그램, 그리고 샴발라의 가르침을 어느정도 터득한 이들을 위해 사춍 미팜 린포체(Sakyong Mipham Rinpoche)가 이끄는 고급 과정의 수련이 마련되어 있다. 샴발라 인스티튜트에서 샴발라의 가르침을 전하는 선생님들은 자원봉사자들인데 불교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넓히고 싶어하는 열정적인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사원을 건립하는데 예산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궁금했다. “저희 재정의 뿌리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핼리팩스의 샴발라 인스티튜트가 운영하는 ‘명상 교실’, ‘기초 불교 이론 교실’과 같은 각종 프로그램의 수익에서 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기 회원들의 월 가입비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회원 분들이 내는 기부금입니다. 그밖에 기금 마련 이벤트를 개회하기도 하고 미술 전시회를 통한 미술품 판매, 도서판매를 통해서 수익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마크는 특히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는 기부금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법당 전경
법당 제단
명상 교실
인터뷰 후 마크와 미셸은 샴발라 인스티튜트 내부의 시설들을 보여주었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 법당이 2층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붉은 색 기둥과 방석들, 그리고 금색으로 장식된 제단이 눈에 띄었다. 권위가 있으되 압도하지 않으며 단아함 속에 화려함을 품은 법당이 인상적이었다. 3층에는 명상 수업을 비롯해 샴발라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이 두 개 마련되어 있었다. 밖으로 난 커다란 창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방안에는 진청색의 방석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누구라도 이 방에 들어오면 조용히 명상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복도에는 초걈 트룽파 린포체(Chogyam Trungpa Rinpoche)의 아들 사춍 미팜 린포체(Sakyong Mipham Rinpoche)의 사진과 붓글씨 등이 장식되어있다. 건물 내부에는 경건함과 고요함, 그리고 신성함이 묻어났다.
초걈 트룽파(Chogyam Trungpa)는 티베트 불교를 바탕으로 서양인들이 물질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정신적으로 풍부한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 과정에서 명상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지금도 샴발라 센터에서는 명상이 강조되고 있다.
이곳에서도 매주 수요일마다 저녁에 30분간 명상 수련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여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초걈 트룽파 린포체는 명상의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다. 방식은 일반적인 명상의 자세와 같은데 등을 펴고 바닥에 앉아 두 무릎이 바닥에 닿지 않은 상태에서 손바닥은 아래로 향하게 해서 허벅지 위에 가볍게 놓는다.
눈을 뜨고 시선은 정면의 15cm 지점을 바라본다. 그리고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인간은 용감하면서도 자비로울 수 있다. 수행의 궁극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하면서 두려움을 살펴보라’고 했다. ‘자신을 다루는데 있어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내 자신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선(善)의 힘을 인식하고, 이런 마음의 경지를 대담하게 남들에게 전하는 것이다’라고 불교의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핼리팩스에 샴발라 스쿨(Shambhala School)이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해 취학 전 아동부터 12학년까지의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학교는 1993년에 설립되었는데 노바스코샤 주의 공립 교육에 위기의식을 느낀 부모들이 학생들에게 배움을 위한 좋은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학교를 모색하였고 샴발라 센터 본부가 주축이 되어 설립하였다. 재학생이 150여명인 이 학교는 특정한 종교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는 아니지만 샴발라의 불교 가르침과 명상을 기반으로 하여 창의적인 커리큘럼을 운용하고 있으며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에 관해서도 심도 있게 학생들을 지도하여 마음의 지평을 넓히는 노력을 하고 있는 학교이다. 학교는 샴발라 인스티튜트에서 10분 거리의 조용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은 오래되 보였지만 불교정신이 충만한 장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를 보면서 이곳 핼리팩스에 샴발라의 정신이 지역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샴발라(Shambhala)는 티베트의 전설에 전해 내려오는 이상향(理想鄕)을 뜻한다. 전설에 의하면 샴발라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왕이 통치하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왕국으로 백성들이 왕 못지않게 자애롭고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모든 백성들이 명상 수행을 했고 중생을 향한 자비심을 가르치는 불도를 따랐다고 한다. 결국 모든 이들이 깨달음을 얻었고 왕국은 더 높은 차원의 천상계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샴발라를 찾아 1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나흘에 걸쳐 왕복을 했다. 긴 여정 속에서 느낀 것은 그 이상향이라는 것, 천상계라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불도수행과 명상을 통해 천상계의 생명을 느낀다면 나는 이미 샴발라에 들어선 것이다. 그곳이 나의 집이건 푸른 하늘을 헤치고 날아가는 비행기 안이건 검푸른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배 위에서건 말이다. 초걈 트룽파 린포체(Chogyam Trungpa Rinpoche)를 따라 콜로라도 볼더를 떠나 이역만리의 캐나다 오지로 이주한 신도들은 이곳 핼리팩스에서 여전히 샴발라를 찾아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명상하고 불도수행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들이 깨달음을 찾아 이곳에 온 이유는 억겁의 인연과 운명이리라. 저마다의 목표와 결의로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긴 여정을 떠나와 이곳 핼리팩스의 샴발라 인스티튜트를 방문하고 난 후 나 역시 장소에 상관없이 늘 나의 내면과 마주하고 나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불성(佛性)을 깨워나가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이 소박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순간 차 안에 샴발라(Shambhala)가 펼쳐졌다. 우리는 다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Halifax Shambhala Centre
1084 Tower Road Halifax B3H 2Y5, NS
phone: 902 420-1118 x110
contact: halifax@shambhala.org
halifax.shambhala.org
Shambhala International
Sovereign Place, 5121 Sackville Street Suite 601
Halifax B3J 1K1, NS
phone: 902 425 4275
contact: shambint@shambhala.org
shambhala.org
*이 글은 2018년에 작성된 글로, 사정에 의해 이달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