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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방학을 끝냈습니다. 석 달 가까이 됩니다. 모처럼의 산행이 기쁘고 반갑고 새롭습니다. 아직 끝자락이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산행을 막을 정도는 안 되겠지요. 나무 가지마다 조금씩 움이 돋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죽은듯하던 마른 가지였는데 생명이 움 트고 있습니다. 이제 하루하루가 다르게 진전되리라 생각합니다. 생명, 참 신기하지요. 움직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납니다.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만듭니다. 어제의 태양 같아도 따사로움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사실 그렇게 우리 자신도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늙어가지 말고 익어가라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끝은 거기가 거기입니다. 안 그런가요?
삼일절 기념사 가지고도 말들이 많습니다. 과거냐, 미래냐 싸움 같기도 한데, 사실 과거가 없는 미래도 없지요. 전진은 해야 하겠지만 잊지는 말아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다시금 학폭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누구는 거리낌 없이 전진하고 있어도 누구는 어디선가 막혀 있습니다. 머물러 선 자만 탓하고 있는듯하여 안타깝습니다. 반세기 만의 무시무시한 벌전 뒤에 숨어있는 어마어마한 눈물을 쉽게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앞서 달리기에만 여념이 없어서 모두 묻어두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새삼 뭔 일이냐 하겠지만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이제는 치유하며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봄날이 익어 가는데, 자꾸 눈물만 흘릴 수는 없는데, 피어나는 꽃잎들이 피로 멍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좋은 날에 희망을 한 그루 심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복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3월 4일 김종우 목사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 :4)
<다음 소희>
‘적당히 좀 합시다.’ 그렇기는 합니다. 과유불급이라고 하던가요? 아무리 좋아도 너무 지나치면 그것도 해가 됩니다. 그래서 까짓 학생 하나 죽은 것 가지고 뭔 야단이냐고요? 하기는 일이백 명 죽어도 그런가보다 하는 때에 한 사람이 뭐 큰 대수냐, 하겠지요. 그런데 그 학생의 가정에는 그야말로 지옥 맛을 보게 하는 고통을 붓는 것입니다. 또 그러겠지요. 그깟 한 가정 가지고 뭔 야단이냐? 이제 우리는 그런 숫자놀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저기 수백 아니 수천, 나아가 수만의 죽음을 당하고 있는 이 땅에서 뭐 그리 호들갑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 단위의 죽음 앞에서는 초연해졌습니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는 듯합니다.
사업장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다음에는 교육부로 가실 건가요? 그럴 수 있을까요? 교육부로 간다고 해서 무슨 답이 나올까요? 그것은 개별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그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발뺌하지 않을까요? 아이들 전공을 생각해야 한다면 이 많은 학생을 다 어디로 보냅니까? 현실이 그렇습니다. 원하는 기업체가 그렇게 많답니까? 어차피 아주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는 전공하고는 딴판의 일터라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사실 무엇을 전공하든 자기 전공을 살려서 일터를 찾아가는 경우는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전공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일이 년 익숙해지면 대부분 적응하며 살게 됩니다. 사람은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니까요.
담임선생님은 맡고 있는 학급 학생의 취업률로 근무 평가를 받습니다. 학교는 전체 학생 수에 비례해서 다른 학교들과 경쟁합니다. 그리고 그 취업률에 따라 교육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학생이 어느 직종으로 가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취업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교운영을 위한 지원금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글쎄, 학생들의 납부금만으로는 충당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과외 돈으로 소위 영업 외 이익일 필요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야 운영진의 야망과 연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와 목적이든 실적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학생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일단 어디에고 취업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길을 뚫었다고 합니다. 일단 겉으로는 이름 있는 대기업이니까요. 그러니 잘 참고 견디며 일해라, 그겁니다. 너 하나 잘못하면 너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야. 학교 이미지라는 것이 있잖아. 다시는 우리 학교 학생을 부르지도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러니 후배들의 길까지 막으면 안 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현재 그곳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기야 그만한 시간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취업자 수와 취업률을 산정하는 것에 비하면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그냥 있어주면 됩니다. 개인이 당하는 착취나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견습생’이라는 라벨이 이러저러한 제약을 만듭니다. 글쎄 근로기준법에 규정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현장에서 왜곡하여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고용자가 계약서를 일일이 검토하고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계약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외부 검열에는 이것을 내놓고 내부 관리하기 위해서는 저것을 디밀며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앞서 말한 것처럼 취업률이라는 목표의 굴레에 빠져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받아준 것만도 감지덕지 하니까요. 그러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라도 견습생의 노동을 착취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학교 체면을 위해서라도 참고 버텨야 합니다.
소희가 춤을 춰요? 금시초문. 부모도 몰랐습니다. 외동딸임에도 소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를 다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그동안 탈 없이 잘 지냈으니 별 일도 없으리라 믿고 사는 겁니다. 우리 대부분 그렇게 지냅니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 하루하루 살기에 급급하면 더욱 그렇게 됩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나야 비로소 돌아봅니다. 이미 때는 지나간 일이지요. 그러고 나서 평생을 그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평소에 잘할 걸, 미리 챙겨둘 걸, 가족만의 시간도 가질 걸 등등 우리는 많은 후회를 쌓아둡니다. 부질없는 일이지요. 인생이 그렇고 세상살이가 다 그런가요? 여러 사람들의 경험들을 알고 있다면 보다 더 주의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냥 자살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상부에서도 그렇게 빨리 종결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나타나는 과정을 보니 단순 자살이 아니라는 냄새가 납니다. 이미 그 사무실에서 팀장이 먼저 자살했습니다. 왜? 1년 사이 690명 입사에 620명 가량이 퇴사를 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직은 이상한 것을 뭉개려 하고 개인은 조직을 상대할 힘이 없습니다. 톱니바퀴에서 톱니 하나 빠지면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조직은 쉼 없이 움직여야 하고 이익을 창출해 내야 합니다. 개인은 단순 소모품으로 전락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감합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겁니다. 재수 없이 당하지 않기만을 기원하며. ‘오유진’ 형사의 눈물이 우리 개개인의 눈물입니다. 영화 ‘다음 소희’(Next Sohee)를 보았습니다.
너희와 저희의 전쟁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매년 12월이면 해마다 대림절을 지킵니다. 주님 오신 날 즉 성탄 대축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정하고는 대림절을 만들고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천년이 넘는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그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녀가신 주님이 아니라 마땅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이미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디에 비중을 두고 기다려야 하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루 한 달 한 해가 간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좀 더 달리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어느 쪽을 원하시겠습니까? 율법에 매여 은혜를 놓치는 일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림 구원에 매여 재림 때의 완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가나안에 입성한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이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후의 과정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세대를 기다려야 했고 정작 애굽에서 구원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우리는 지금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에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마 24 :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끝까지 인내하여 주님을 맞아야 합니다.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룰 때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고 나서 2천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 왔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엄청난 시간입니다. 그러니 혹 우습게 여길 수 있습니다. 벧후 3 : 3 - 4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렇지요. 그 때도 그랬다면 2천년을 지나온 지금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재림한다고? 심판이 있다고? 그렇게 떠들고도 벌써 2천년이 지났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나기나 했냐? 신화와 공상에서 깨어나라. 그렇습니까? 8 - 9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누구를 위해 참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더욱 근신하여 정신을 차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 반드시 오십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를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마 24 : 7 -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기근, 지진 그리고 전쟁을 당하면 그 날을 생각합니다. 더구나 계 16 :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하신 말씀과 연관시켜 마지막 때의 아마겟돈 대전쟁을 말합니다. 그것을 지구 최후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계 9 : 14 - 16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더구나 바로 이 말씀과 연관시켜서 그곳에 ‘이만만’ 곧 2억의 군대가 모인다고 하고 인류의 3분의1 즉 20억의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18절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여기서 불은 미사일이고 연기는 생화학 무기요 유황은 핵무기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 무기들로 인하여 인구 3분의1인 20억 이상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이지요. 그대로 일어난다면 정말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겁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요?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해봐야 듣지도 않고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이 사용하실 목자를 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와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도 그렇게 명하셨습니다. 창 1 : 27 - 28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생육 번성’이 먼저입니다. 그 후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아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마귀 사단의 세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뭐라 하였습니까? 마 4 : 8 - 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다시 말해서 천하만국이 자기 손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엡 2 :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도 전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그늘 아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편으로 옮겼지만 세상은 여전히 마귀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 세상에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날 우리 곧 영적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기근이나 지진 또는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말세는 세상의 말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말세입니다. 한 종교시대의 끝이라는 말이지요. 아담의 말세 그래서 노아의 시대가 열렸고, 노아의 말세 그래서 아브라함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대가 모세로 이어졌고 모세 시대의 말세 즉 구약의 말세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 신약의 말세 즉 주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에는 이 지나온 시대의 인물이나 지명이 하나의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물이 아니라 비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적 사실이 거울이 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봅니다. 계 2 : 20 “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기 이세벨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구약 이스라엘 시대 왕비였습니다. 우상숭배자로 악한 사람이었지요. 수천 년 전의 이세벨이 다시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지요. 그와 같은 자가 마지막 때에 또 나타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구약시대의 사건이나 인물 또는 지역 이름까지 빌려와서 장래 일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사는 하나님 백성에게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10 :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어서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오래 전의 그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경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장래의 일을 예언한 계시록에서의 아마겟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아마겟돈에서 전쟁이 일어나는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옛것을 빙자한 비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마겟돈을 옛날 히브리어로 므깃도라고 합니다. 지리상으로 교통의 요지이고 곡창지대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열국이 이곳을 차지하려 전쟁 마당이 되기 십상이지요. 성경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삿 5 : 19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유다 마지막 때 요시야 왕이 전사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왕하 23 :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 본 후에 죽인지라” 요시야 왕은 선정을 베풀며 그 치적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애도하였지요. 당시 므깃도에서의 전쟁 역시 대단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므깃도, 아마겟돈은 구약시대 전쟁터이고 그것을 빗대어 마지막 때 영적 전쟁터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치 진짜 거기서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해석한다면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이런 엉뚱한 해석이 비일비재합니다.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이니 아멘 아멘하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마 24 :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 재림 때에 휴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휴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전 4 : 16 -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으로 인하여 마치 공중부양이라도 될 듯이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앞에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도 들려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바로 뒤 살전 5 : 5 - 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하셨으니 잠도 자지 말고 말똥말똥 기다려야 하는가? 그게 아니겠지요. 마 24 :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하셨으니 아이도 갖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계 14 :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래서 장가도 가지 말고 숫총각으로 지내야 한답니다. 그렇습니까? 이게 모두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목자가 설교한다고 아멘 아멘하고 따라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특히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무엇을 합니까? 거짓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참과 거짓입니다. 진리와 비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십니다. 마귀는 거짓 즉 비진리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고 마귀가 주는 말은 사망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듣고 따르면 생명의 길로 나갑니다. 그러나 마귀가 전하는 말, 비진리를 듣고 따르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을 때는 ‘생령’이 되었지만 뱀의 말을 먹고 따라가자 ‘사망’이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장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귀다 하고 접근하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목사가 나는 사단의 종입니다, 하면서 강단에서 설교를 합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목사라고 하면 모두 하나님의 종이라 자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후 11 : 14 - 15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렇습니다. 사단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 그 일군들은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고 우리 앞에 섭니다. 똑같이 성경을 들고 서는 것이지요. 그리고 설교합니다. 더구나 표적과 기사를 행합니다.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니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고 따라갑니다. 교인이 불어나고 교회는 날로 부흥합니다. 그 크기가 왕국과도 같습니다. 당회장 목사님 한번 행차하는 것을 보십시오. 임금 행차하듯 합니다.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요1서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가 영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누구 소속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영을 시험하라 하시면서 무엇을 경계하십니까? 거짓 선지자입니다. 왜 그럽니까? 영이 그 선지자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은 반드시 사람 즉 육을 사용해서 활동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귀신이 활동합니다. 혼자 도를 닦아 깨끗하다고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마 12 : 44 - 45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혼자서 도 닦으면 더 악한 귀신이 더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노라 하는 사람이 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생각해봐야 합니다. 마귀는 맹하거나 어설픈 사람은 크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유명인사를 잘 사용하지요. 가능하면 똑똑한 사람, 이왕이면 권세를 가진 사람, 평범한 사람보다는 박사 학위도 가진 사람, 말주변도 좋고 사람들이 잘 따르는 성품의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잘 따를 테니까요. 소위 세상에서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주로 택합니다. 우리 주님은요? 열두 제자를 택하신 것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명인사는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순종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면 하나님 나라 역사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나라를 세우려 할 것입니다. 그런 목자는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 건설에 방해만 됩니다. 하나님은 단호히 물리치십니다. 옛날 사울 왕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영은 육을 들어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려면 그가 하는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그가 전하는 말이 진리인가 비진리인가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마귀도 어디에 있다고요? 하나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아멘 아멘하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은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사망의 말입니다.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둔갑하였으니 축복의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저주가 됩니다. 복 받으세요, 복 받으세요. 물질의 복, 가정의 복, 명예의 복, 자식의 복, 사업의 복 등 온갖 복을 남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마 6 : 33) 썩을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양식입니다.(요 6 : 27) 육의 욕심이 아니라 영적 욕심입니다.(롬 8 : 13) 세상 근심이 아니라 거룩한 근심입니다.(고후 7 : 10) 형식보다는 마음이고 예배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아는 것입니다.(호 6 : 6)
그럼에도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만 찾게 만듭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자랄 때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때인데 아직도 초보에 머물러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에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먼저 받은 자에게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에게 받아야 하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의 비밀이 비유로 말씀되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를 깨닫는 것이지요. 앞에서 보았듯이 비유를 깨닫는 것이 바로 천국비밀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됩니다. 여기 ‘너희’와 ‘저희’로 나뉘는데 너희에게는 허락되었고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너희는 천국이고 저희는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의 비밀 곧 비유를 깨달아 알아야 하는 일은 우리 신앙인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필수과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로 지목된 우리가 이 비유를 알기 위해 배우러 다닌다고 하면 ‘저희’들이 난리를 피며 막고 훼방한다는 말입니다. 진작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날 똑같지 않습니까? 엉뚱하게 엉터리로 가르치는 자신들을 깨닫지 못하고 신자들이 제대로 배우려고 다른 곳으로 가면 야단법석을 떱니다.
지금 교회마다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슨 기근입니까? 암 8 :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멘! 바로 말씀 즉 진리가 고갈된 기갈이고 기근입니다. 또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전쟁입니다. 핵폭탄이 터지고 미사일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바로 말 전쟁입니다.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전쟁이지요. 하나님의 진리인가 마귀의 비진리인가 하는 전쟁입니다. 마땅히 참 하나님만 계셔야 할 성전(교회)에 마귀가 들어와 앉아 하나님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과 자칭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누구를 들어 싸우겠습니까? 영은 육을 사용해서 말합니다. 목사는 목사인데 어떻게 구분합니까? 참 목자인가 거짓 목자인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하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인 우리 또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너희’ 속에 들어가려면 ‘저희’와 싸워야 합니다. 이기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의 복을 누린다고 계시록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 싸워서 이기기를 빕니다. 저희에게서 나와 너희에게 속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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