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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의 기원
출 12: 21-27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던 날의 상황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정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고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후에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월절이라는 절기로 삼아 명절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가지셨는데, 그 만찬이 오늘의 성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유월절에 죽으셨으며, 당신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왜 대대로 행하라 하셨을까요? 이 성찬의 기원은 어디에 두고 있을까요?
첫째, 유월절의 어린양 고기와 누룩 없는 떡
바울은 고전 5장 7절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유월절의 양이라는 말입니다.
유월절에는 한 가정에 양 한 마리씩이 죽었고, 그 피를 문에 발랐습니다. 그 집을 위해서 양이 대신 죽었다는 표시로 피를 바른 것입니다. 죄인에게 심판을 집행하러 왔던 천사는 죄 없는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은 건너서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 집 식구들은 재앙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을 잡지도 않고 양의 피를 바르지도 않은 애굽 사람들은 장자가 모두 죽었습니다. 그것을 본 애굽 왕이 겁이 나서 유대인들에게 해방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죽은 어린 양은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유월절 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은 양고기를 구워서 먹었는데,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단지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신 그 음식을 먹다가 해방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오셔서, 유월절 날에, 유월절 양처럼 죽어주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겠다고 생명의 약속을 맺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먹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음식을 먹듯이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이고 믿는 다는 고백입니다. 누룩 없는 떡은 죄 없는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순결하신 그리스도를 누룩 없는 떡이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찬을 거듭하라고 하신 이유는, 내가 너를 위하여 대신 죽고 너를 살렸다. 그러니 너는 은혜로 사는 내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준 언약을 기억하고 너희도 그 약속을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중에는 전셋집에 사는 분들이 많은데, 전세는 2년 단위로 계약합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서 전세금을 올리지 않게 되었을지라도 계약서는 다시 갱신해서 써야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오실 때까지 자주 성찬식을 하라고 하신 이유는 주님이 주신 약속을 언제나 현재적 효력을 가진 상태로 기억하라고 그 약속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면서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성만찬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담은 음식이었고 구약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둘째, 광야에서 먹은 만나 (출16:)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메마른 광야를 여행 중이어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자 그들은 대끔 하나님을 원망하였는데, 하나님은 원망하는 그들을 위해서 만나라는 신비한 음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출16: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출16: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그날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은 그들이 원망하기 때문에, 원망하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만나를 주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실 분입니까? 그들이 원망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먹을 것을 다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이 떨어져가는 것을 이미 아시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원망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길보다 빨랐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전에 그들은 원망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의 눈에 밉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먹이셨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불평할지라도 참고 또 참으시면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며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공급해 주셨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불평대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꺼이 그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셨을까요? 인도자인 모세는 얼마나 즐겁게 그들을 인도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불평했고, 불평을 위해서 사람을 모아 당을 만들었고 그들은 광야에서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라와 아비람의 당이 그랬습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무슨 법입니까? 공짜로 주시는 신비한 음식을 갖다 먹는 규칙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기한 음식을 먹으려면 규칙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 규칙의 제1조는, 날마다 하루의 분량만 거두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내일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많이 거둔 만나는 모두가 썩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욕심껏 거둔 사람도 되어보면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규칙을 어기고 많이 거둔 수고가 헛되는 벌을 주신 것입니다. 명령을 지키면 복이요 어기면 고생이요 형벌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절대로 거두러 가지 말라는 것이 제2조입니다. 안식일에는 절대로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안식일을 위해서는 금요일에 이틀분량을 거두어도 썩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거두러 갔다가 허탕치고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만나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까지 지속적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을까요? 만나를 주신 이유는 우선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너희를 진짜로 살게 하는 음식은 땅에서 너희가 수고해서 거두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음식이다.”이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은 음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었고, 가공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음식이었습니다. 그 음식은 장차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9-51)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에 참석하는 이유는 주님께서만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되기 때문이고,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결코 보람도 행복도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는 표식입니다.
성찬의 유래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셨던 광야의 만나입니다. 만나는 육신의 음식이 없어도 살게 하는 영원한 음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셋째, 광야에서 생수를 낸 반석
이스라엘이 여행하는 광야는 물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목이 말랐고, 물이 없으면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물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그들은 광야에서 저주의 지팡이를 맞아서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그들을 네 지팡이로 치라고 하시지 않고, 산으로 가서 반석을 치라고 엉뚱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으로 가라. 내가 거기 호렙산 반석위에서 너를 대하여 서리라.” “내가 그 반석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출17:6)
모세가 호렙산에 가서 반석을 칠 때 하나님은 어디 서시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반석위에 서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를 향하여 반석위에 서 있는 나를 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너를 향하여 내가 서 있는 반석을 치라는 말씀이 왜 주님을 치라는 말이 되지요?
고전 10:4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목말라할 때,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 마셨다고 하면서, 그 사건을 이렇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모세가 쳤던 반석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지요? 목말라하면서도 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원망만 하는 못된 백성들, 심판받아야만 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자신이 맞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매를 맞음으로 백성들이 살아갈 생수를 제공하신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입니다. 사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매를 맞고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죄인들을 살려내신 일이, “내가 서 있는 반석을 치라.”고 하신 말씀 속에 암시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라고 다음에 선지자들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가를 잘 말씀해주는 설명서입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을 치지 않고 대신 친 반석이 물을 내어 원망하는 그들을 마시고 살게 하였고, 죄지은 우리대신 매 맞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영생하는 구원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대신 죽으실 때 하신 말씀이 “내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내가 구약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했던 사건들을 다 이루었다, 하나님이 오래 전에 계획하시고 예언하시며 나에게 맡기신 일들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만찬은 예수님이 처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 부분적으로 암시되어 있던 구약의 성만찬을 완성하신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구약의 예언들을 종합하고, 주님의 공로를 우리 자신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고 하시고 모형을 보여주시며, 이것이 너희를 살리는 참 양식이라고 하셨던 그 성찬을 오늘 내가 먹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나도 주님을 따라 살아갈 것을 새롭게 각오하면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주님이 주신 거룩한 음식을 함께 받아먹읍시다. 그리고 그 음식의 힘으로 새롭게 살아갑시다. 이제 성만찬을 시작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묻은 집
출 12: 21-30
어느 잡지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억만장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보물 창고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전문 털이범 조직이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의 재산 규모로 볼 때 보물창고에는 엄청난 액수의 현찰이나 귀금속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엿보다 그 집을 털기로 작정합니다. 그들은 첨단 기술로 삼엄한 경비와 보안 장치를 뚫고 마침내 보물창고의 문을 엽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 큰 창고에는 낡은 자전거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습니다.
허탕을 친 털이범 두목이 화가 나서 억만장자에게 전화를 겁니다.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소, 없소? 보물창고에 숨겨 놓은 게 고작 고물 자전거란 말이요?” 억만장자는 허허 웃으며 털이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창고를 지어놓고 거기다 집어넣을 가장 소중한 보물이 과연 무엇인지 의논해 봤소.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한 게 바로 그거요.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업에 크게 성공했을 때도 아니고, 대저택을 구입한 때도 아니고, 호화롭게 세계 일주를 한 때도 아니고, 최고급 식당에서 외식을 했을 때도 아니고, 가난했던 시절 온 가족이 동네 공원에 함께 모여 그 낡은 자전거를 타며 즐기던 어느 날 오후 한 때였소. 그래서 그 고물 자전거를 우리 가정의 보물로 정한 거요.
어쨌든 우리 가정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아서 정말 고맙소이다.” 아마 지어낸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제공해 줍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오히려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인생의 보물(寶物), 가정의 가보(家寶)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정말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과연 무엇이 보물입니까? 우리 가정의 가보는 과연 무엇입니까? 5월 가정의 달에 행복한 가정을 위해 이런 저런 것들을 챙겨보는데, 과연 우리의 가보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인생의 보물, 그리고 가보가 무엇인지 소개해 줍니다. 그것은 ‘어린 양 예수의 피’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통해 어린 양의 피를 우리 인생의 보물, 우리 가정의 가보로 정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B.C. 15세기 애굽(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출애굽 사건(Exodus)의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건을 기념해서 ‘유월절’이란 명절을 지킵니다.
430년 이상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해방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소리를 들으셨고, 모세를 지도자로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모세가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내보내라고 요구해도 듣질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애굽은 전국 각지에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노동력을 이스라엘 남자들이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왕에 이스라엘을 순순히 내보내줄 리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로의 고집을 꺾고자 재앙을 내립니다. 피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등 ... 이런 재앙이 임하면 바로는 금세 백성을 내보내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한숨을 돌리고 나면 또다시 변심합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카드를 뽑습니다. 그게 곧 10번째 죽음의 재앙입니다.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감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모든 짐승의 첫 것까지 다 죽게 되는 재앙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 집의 장자들은 멀쩡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어린 양의 피 때문입니다. 본문 21절~22절을 보시면, “ ...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 ” 그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어린 양’ 그리고 ‘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명령합니까?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내고, 그 피로 집 대문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라고 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참 이상한 짓입니다. 왜 한 밤중에 피를 내고, 게다가 페인트도 아니고, 색깔도 아름답지 않은데, 왜 대문에다 잔뜩 칠하라고 하나? 일반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짓 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시하고, 약속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 ” 하나님은 죽음의 천사를 통해 애굽 사람들을 죽음의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 바로 그 어린 양의 피가 대문에 묻어있는 집만 죽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넘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유월절이란 말이 유래했습니다. 유월절은 히브리어로 ‘페샤흐’인데 ‘넘어가다’ ‘뛰어가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유월절이 Passover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된, 구원받은 역사를 기념하며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유월절 양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유월절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요 예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어린 양의 피가 당시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은혜를 제공해 준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이 은혜인데, 은혜에는 크게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보통 은혜(일반 은총)와 특별 은혜(특별 은총)입니다. 보통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두루 주시는 은혜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내려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심지어는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려주십니다.(마5:45 참조) 특별 은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특별대우’인 셈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묻은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대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특별대우를 해주셨을까요?
[1] 하나님의 특별은혜 : 구원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10번째 재앙은 장자 죽음의 재앙입니다. 집집마다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합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
그런데 하나님이 샘플로 장자만 심판하신 겁니다. 그날 밤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감옥에 있는 사람의 장자까지 모든 집의 장자가 죽고 집집마다 초상집이 됩니다. 심지어 짐승의 첫 것까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린 양의 피가 묻은 집의 장자만큼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23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12:13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어린 양의 피가 ‘표적’이 된다는 겁니다. 표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오트’인데, ‘신호’ ‘표시’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 피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약속의 표시 혹은 싸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피라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섬뜩하고 두렵습니다. 잔인한 느낌도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런 피를 표시로 삼으셨을까요? 피는 생명의 본체입니다. 피가 있으면 육체의 생명이 있고 피가 없으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상징인 피로써 속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피를 흘려야 합니다. 자신이 흘리지 않으면 남이 대신이라도 흘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죄의 대가입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게 하느니라” 히9:22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가 대신 피를 흘려 줄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다 자기 죄 때문에 죽을 인생뿐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어린 양이 피를 흘려야 했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번번이 어린 양이 피를 흘려야 했으나, 이제 예수님은 단 한번 죽음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까?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피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즉 그 피의 대속의 효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데도 그 간단한 것을 회피해서 구원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구원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피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혹은 ‘열쇠’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일한 암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를 들어 집안에 들어갈 때 대문에 부착된 장치에 암호를 누르고 들어갑니다. 암호를 모르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혹은 열쇠를 갖고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십자가의 피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맞벌이 부부가 있었습니다. 퇴근길에 집 앞에서 만났습니다. 함께 집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필 정전이어서 둘이 계단으로 열심히 올라갑니다. 30층이라 너무 힘들어 중간에 쉬어가면서 겨우 올라갑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서로 문을 열기를 기다립니다. 알고 보니까 경비실에서 상대방이 경비실에 맡겼던 열쇠를 챙긴 줄로 서로 착각하고 그냥 온 겁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느라 파김치가 됐을 겁니다. 그래도 다시 갔다 올 수 있으니까 다행이죠. 우리 인생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마지막 순간 천국 열쇠를 챙기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은 단 한번이기에 돌아가서 챙겨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는 노릇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는 오직 어린 양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만 갖고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가정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을 위해 다른 것은 다 챙겨주면서 어린 양의 피를 믿는 믿음을 챙겨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후회막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보물도, 가정의 가보도 오직 어린 양 예수의 피인 줄로 믿습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어느 젊은이가 신실한 크리스천 의사의 자가용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너무 착실해서 그 의사는 항상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잘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그에게 전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영혼의 존재와 인간의 죄, 예수님의 구원, 지옥과 천국 등 기본적인 진리를 설명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빙글빙글 웃기만 하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내 앞길이 창창한데,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내세고 천국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안타까워 하던 의사는 어느 날 전도하는 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게. 예수님은 다시 이 세상에 오시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재림이라고 부르지. 그러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게 필요 없어. 그러면 이 자동차도 자네가 가져. 그리고 내 집도. 아니, 그 외에 모든 것도 다 가져도 돼.” 그 젊은이는 말이라도 너무 고마웠습니다. 의사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정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좋은 자동차와 저택, 모든 게 필요 없을 정도라면 천국은 얼마나 좋은 곳일까? 자기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 게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지옥에 가는 것이고 ... 생각이 이렇게 전개되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밤이지만 그 의사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립니다. 의사는 놀라서 묻습니다. “아니,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선생님, 그 자동차 싫습니다. 집도 싫습니다. 다 싫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에게도 선생님이 믿는 예수님을 가르쳐 주세요. 저도 구원받기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어린 양 예수의 피입니다. 우리 인생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어린 양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특별은혜 : 보호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기서 집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만일 그 밤에 집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겁니다. 책임 못 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집 안에 있기만 하면 안전하다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묻은 집만이 안전지대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이 많습니까? 마치 지뢰밭과 같습니다.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마치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것과 같이 우리 인생에 순간순간 어려운 일들이 닥쳐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피해가면서 살아서 그렇지 그 화살에 맞으면 금세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안전 보장이 필요합니다. 방패와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인생을 삽니다. 열심히 벌고, 모으고, 쌓습니다. 그런데 지키지 못합니다. 벌고, 모으고,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주를 막아내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어린 양 예수의 피 공로로만 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저주와 죽음, 아니 저 너머 최후의 심판까지 막아낼 주는 것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보호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은혜를 가리켜 ‘날개’로 비유해서 말씀합니다. 시57: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91:1,4~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옛날 텍사스의 한 호텔방에서 한 사업가가 절망 중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탁자에는 하얀 알약 수십 알을 놓여져 있었습니다. 사업에 크게 실패하고 이제는 도저히 살 소망이 없어서 마지막 순간을 맞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현듯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업 한다고 돌아다니느라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어머니 생각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 겁니다. “얘야, 어려운 일을 만나면 꼭 기억해라. 세상 사람들은 다 너를 배반하고 너를 잊어도, 하나님은 절대 너를 버리지 않고 잊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어려울 때는 얼른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거라.”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동안 오래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자기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실컷 울고 나자 오히려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투자자들을 만납니다.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 제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 보렵니다. 저를 믿지 마시고 제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면 원금에 이자까지 넉넉히 붙여서 반드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이 그 말은 듣고 입을 뗍니다. “그래, 언제까지 기다려주면 되겠소?” 결국 이렇게 해서 그는 보란 듯이 재기했고, 마침내 큰 사업가로 성공합니다. 그의 이름은 힐튼입니다. 세계적인 호텔 체인 힐튼의 창업자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갔을 때 그는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곤고한 일이나 기가 막힌 상황에 봉착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것이 주님의 날개에서 벗어나 자행자지하며 내 힘으로 내 재주로 살아보려다 그렇게 된 것은 혹시 아닙니까? 주님의 날개 아래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포기할 수 없는 보물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의 가장 소중한 가보가 무엇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것은 다 지나갑니다. 다 사라집니다. 오직 어린 양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보물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시고, 어린 예수의 피를 의지하며 승리하는 인생, 복된 가정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