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원문보기 글쓴이: 장군죽비
유석질의론초(儒釋質疑論抄)
함허 述
천단 抄譯
* 도(道)에 '까깝고 먼 것이 있다'고 하는 말은 구릉과 태산이 서로 다름과 같이 차이가 있다는 말이요,
교(敎)에 '얕고 깊음이 있다'고 하는 말은 말굽자국에 고인 물과 강이나 바다는 서로 다름이 있듯이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굽자국에 고인 물 속에 갇힌 자와는 서로 곤붕(鯤鵬)의 조화를 말하기 어렵고,
구릉에 빠져 있는 자와는 함께 건곤(乾坤; 우주)의 장대한 경관을 말하기가 어려운 것인 바,
그 두 집착을 버린 연후에야 비로소 성스러운 도(道)를 함께 말할 수가 있다 할 것이다.
주) 곤붕(鯤鵬);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가 변하여 그 크기가 수 천리에 달하며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가는 큰 붕새로 되는 이치. 즉 대우주의 섭리를 뜻함.
* 저 대각(大覺; 법왕)이 세상에 응하심을 살펴보면 본체(本體)는 진공(眞空)이요, 작용(作用)은 건곤(乾坤)이라,
은미롭게 작용하고 변화하며 천지(天地; 우주)로 더불어 함께 흐른다.
* 우주의 본체(本體)로는 하나의 도(道)라 부르고, 변화의 오묘함으로는 하나의 기(氣)라고 부르며,
만물의 이뤄짐으로는 하나의 이(理)라고 부르는데, 다만 얕고 깊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셋으로 나뉘었을 뿐인 것이다.
불교(佛敎)에서는 진공(眞空; 우주의 본체)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근본 성품을 들어서 말함이요,
노교(老敎; 도교)에서는 곡신(谷神; 현묘함을 낳는 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변화작용을 들어서 말함이며,
유교(儒敎)에서는 대본(大本; 사물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물에 붙여서 말함인 것이다.
지극히 커서 나(我)가 없고, 지극히 깊어 어지러움이 없고, 지극히 비어 비롯됨이 없고, 지극히 신령하여 마침이 없으며,
온갖 신묘함을 머금고 있으되 고요히 흔들림이 없어 삼재(三才; 하늘.땅.사람)의 비조(鼻祖)로써
만법(萬法;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므로 진공(眞空)이라고 말하는 것이요,
원대한 하나의 기(氣)가 영묘하게 발하여 조화(造化)를 타고 만물에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곡신(谷神)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만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만사에는 종시(終始)가 있어 사물을 궁구하여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현상(現象)은 천만가지로 다르되 그 근본 성품은 하나의 이(理)이므로 대본(大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교(三敎)가 비록 다르나 그 도(道)는 하나인 것이니, 비유하면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아 저 땅이 품어 기르는 것(性德)을
진공(眞空), 종자에서 움이 트는 것(作用)을 곡신(谷神), 줄기와 잎이 한 뿌리인 것(道理)을 대본(大本)이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은 진실로 건곤조화(乾坤造化)의 오묘함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니,
부처님의 삼신(三身; 법신.보신.화신)이 저 역도(易道)와 부합된다 함이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만일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밝음이 합하며,
사시(四時)와 더불어 그 질서가 합하고 귀신(鬼神)과 더불어 그 길흉이 합하여
천하에 지극히 정미롭고 싱그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가르침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룰 수가 있겠는가?
이른바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이란 정식(情識)을 돌이켜 법성(法性)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인데,
법성(法性)은 근본이고 정식(情識)은 지말(枝末)인 것이다.
법성(法性)이 근본이 됨은 지극히 비고 다함이 없어 그 근본 성품이 상주(常住)하고, 지극히 신령하고 줄어듦이 없어
그 신묘한 작용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근본 성품이 상주하여 진겁(塵劫)에 뻗치도록 변치 않고,
그 신묘한 작용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조화를 운행하여 다 함이 없으니, 이것이 곧 그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정식(情識)이 지말이 됨은 참을 등지고 제 멋대로 흘러 어지럽고 시끄러움이 쉬지 않고,
티끌을 받아들여 그 몸을 삼음으로 혼탁하여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지럽고 시끄러워 쉬지 못함으로 생멸(生滅)이 서로 이어지고, 혼탁하여 청정치 못함으로 물욕(物慾)이 수시로 바뀌어 들게 된다.
물욕에 끌리면 고뇌가 계속되고, 생멸을 느끼면 이에 생사가 따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그 지말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식(情識)으로써 가르침을 삼는 것은 윤회(輪廻)의 도(道)인 것이며, 법성(法性)으로써
가르침을 삼는 것은 출사(出死)의 도(道)인 것이다.
심(心)과 성(性)은 유교와 도교에서도 역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말한 바가 지극하지 못하며,
그 밝힘이 지극한 것은 오직 불교뿐이다.
지극하지 못하면 이미 간격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멀고 가까움이 있게 되는 바,
가까운 것은 눈이나 귀로 듣는데 한정된 도(道)이니 세상의 도일뿐이며,
먼 것은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고 시방(十方)을 다한 도(道)인 것이다.
노자(老子)가 말한 '곡신(谷神; 현묘한 도)은 죽지 않는 것이며
현빈(玄牝; 신묘한 어버이)으로써 천지의 뿌리가 된다.'한 것은 그 성(性)을 말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도(道)가 만물이 됨은 복잡 미묘하여 능히 헤아려 알기 어려운 것이며 그 심원하고 오묘한 가운데에 정신이 있다.
'한 것은 그 심(心)을 말한 것이고, 또 말한 '하나(一)를 품어 기(氣)를 전일하게 하여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스러움도 끊고 지혜도 버리라.'한 것은 그 도(道)를 말한 것이다.
유교(儒敎)에서 말한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나니, 그 형상은 만 가지로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한 것은
그 성(性)을 말한 것이고, 또 말한 '허허롭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고 뭇 이치를 갈무려 모든 일에 감응한다.
'한 것은 그 심(心)을 말한 것이며, 또 말한 '사람의 마음은 다만 위태롭고 도(道)의 마음은 은미로운 것이니
오로지 그 중(中)을 잡으라.'한 것은 그 도(道)를 말한 것이다.
양쪽의 기(氣)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다만 기(氣)일 뿐인데, 그 기(氣)를 사납고 거칠게 해서야 되겠으며,
만물의 영장이 됨은 오직 마음일 따름인데,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나의 기(氣)를 전일하게 해야만 온갖 삿됨이 능히 죽일 수 없을 것이며, 한 마음(心)을 닦아야만 온갖 욕망이 능히 공격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저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는 몸과 마음을 엄하게 경계함으로써 천하만세의 도(道)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말한 성(性)은 '하늘이 부여한 성(性)'일 뿐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만대각성(圓滿大覺性)은 아닌 것이요,
저들이 말한 마음은 육단생멸심(肉團生滅心)일 따름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여청정심(眞如淸淨心)은 아닌 것이며,
저들이 말한 도(道)는 성(性)을 따르는 도(道)일 따름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고 죽는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도(道)는 아닌 것이다.
대각(大覺)의 성(性)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거니와, 이른바 진여청정심(眞如淸淨心)이란
대각성(大覺性)의 위에 신묘하게 밝은 참 지혜가 전 우주에 두루 뻗쳐 각성(覺性)과 더불어
평등하고 지극히 담담하여 항상 고요하며 그 큰 작용은 어느 한 방향에 국한됨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여(眞如)란 허망하지 않고 변치 않는다는 뜻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청정(淸淨)이란 6진(六塵; 눈.귀.코.혀.몸.뜻의 욕망)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니,
영가(永嘉) 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거울은 밝아 비춤에 걸림이 없어 뚜렷하게 사계(沙界; 황하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수 많은 세계)를 두루 밝게 사무치나니, 만상삼라(萬象森羅; 온갖 만물이 어우러져 펼쳐짐)는 거울 속에 나타난 그림자요,
한 덩이 원광(圓光)은 안팎이 없도다."한 것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부처님이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 과거.현재.미래)에 미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 전 우주)에 두루하며,
그 맑음은 해와 달을 꿰뚫고 그 덕(德)은 건곤을 능가하며, 그 공능(功能)은 조화를 초월하고 그 도량(度量)은 태허(太虛)를 넘어 서나니,
삼계사생(三界四生; 삼계에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하는 모든 생명)의 어버이가 되심은 이와 같은 까닭이 있기 때문이거니와,
이른바 저 세간의 성현이라 하는 사람 가운데서 어느 누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상서령(尙書令) 감택이 오(吳) 나라의 임금인 손권(孫權)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공자와 노자의 두 가르침은 하늘을 법 받아 만들어 쓰는 것이라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하오나,
모든 부처님이 베푼 가르침은 일체의 하늘이 받들어 행하며 감히 부처님을 어기지 못하는 것이오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실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옵니다."하였는데, 이는 바로 말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벗어남'이란 그 껍대기인 육신을 벗어버리고
혼망(混茫;천지 개벽초에 원기(元氣)가 아직 갈라지지 않은 상태)에 들어감을 말함이 아닌 것이니,
만일 지혜와 덕량이 탁월한 사람이 있어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잠을 자다가 꿈을 깬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하며, 구름이 흩어져 해와 달을 보는 듯 할 것이요,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옛 것도 아니며, 우뚝이 드러남이 당당하여 형상과 기운과 몸과 마음에 기댐도 없고,
또한 나고 죽는 윤회도 구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그 '세간을 벗어나는 도(道)'가 되는 까닭이다.
애닯고나. 일체의 생령이 한 근원에서 같이 나와서 이와 같은 지혜와 덕성을 모두가 갖추고 있는 것이건만,
나뉘어 형질(形質)을 갖게 되어서는 서로 등져 돌아올 줄 모르고 온갖 주의.주장(主義.主張)과 번다한 알음알이에 빠짐이여!
나무가 제사 그릇으로 쓰이는 술잔으로 다듬어져 푸른 색과 누런 색으로 그 형태가 변함과 같고,
흙이 질그릇을 만드는 기계에 실려 크고 작은 모양으로 그 형체를 바꿈과 같으며,
또한 바다 물을 떠다가 갖가지 그릇에 담아 뚜껑을 닫고 뒤집어 흔들어대서 그 혼탁함이 극도에 이르러 바다의 본성을 심하게 잃음과 같구나.
그 본성을 잃고 혼탁에 빠짐을 쫓는 까닭에 업해(業海)의 파도가 솟아오르고,
삼도(三途)가 길이 끌어올라 윤회가 쉬지를 못하고 생사(生死)가 다함이 없으니, 어찌 상심치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우리 각황(覺皇;부처님)께서 차마 그러함을 앉아서 보지 못하시고
대자대비한 서원력으로 스스로 저 왕궁(王宮)의 의복을 벗어 던지고 석가의 헤어지고 더러운 옷을 입으시고 청함이 없었건만
스스로 벗이 되어 저 모든 세간에 들어가시어 선각자(先覺者)로써 널리 미혹한 무리를 인도하시되,
온갖 신통과 지혜와 위광과 방편과 언사와 법문을 열어, 인연을 설하시고 과보를 설하시고, 죄를 설하시고 복을 설하시고,
선과 악을 설하시고 보응을 설하시고, 천당을 설하시고 지옥을 설하시고, 부처님의 나라를 설하시고 세속을 설하시고,
권교(權敎)를 설하시고 실교(實敎)를 설하시고, 점교(漸敎)를 설하시고 돈교(頓敎)를 설하시어,
바로도 보이시고 교묘히도 보이시고, 간단하게도 보이시고 복합적으로도 보이셨나니,
이 모두가 중생들이 망령된 집착을 돌이켜 참된 곳으로 돌아가서 참 지혜로 신묘하게 장엄된 나라에 오르게 하시고자 바라신 때문인 것이다.
그 가르침은 모두가 심원하고 신묘함에 막힘 없이 통하여 천지를 꿰뚫어 널리 전 우주에 미치나니,
사람마다 교화됨이 마치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쓰러지는 풀잎과 같고,
온갖 마구니가 비난을 해봐도 막히거나 가리워 지지 않는 것은 그 진실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에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하지 않다면 하늘도 싫어함이 오래일 것인데,
어찌 그 가르침과 도(道)로 하여금 면면이 이어 천고(千古)에 뻗치고 시방(十方)에 골고루 전파되도록 할 것이며,
천룡(天龍)과 신령과 귀신들이 공경하고 숭배하지 않음이 없고, 보살과 현성(賢聖)들이 서로 번갈아 이어서 크게 교화하도록 하겠는가?
*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법 받을만하다고 말들 하지만 하나님이 오히려 부처님의 법을 받들어 행하는 제자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신령(神靈)을 섬길만하다고 말들 하지만 신령(神靈)이 도리어 부처님의 시종(侍從)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일컬어 '하늘 가운데의 하늘(天中天)'이라고 하느니,
뉘라서 그 위에 자리하여 임금이 되고 어버이가 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이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사이에 태어남을 보이심은,
이른바 미진(微塵) 속에 계시면서 대법륜(大法輪)을 굴리시어 그 진리(眞理)를 세상에 밝히고자 하심이었을 따름인 것이니,
어찌 저 인도에 태어난 몸만을 참 부처님의 법신(法身)이라고 하겠는가?
법신(法身)이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어느 하나도 그 품에 안기어 섭리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맑디 맑고 구름같은 몸이 우주 전체에 두루하고 있음을 말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참 부처가 아니며, 또한 법을 설하는 자도 아니다."함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응하심은 마치 봄이 온 누리에 퍼짐과 같고, 달이 천강(千江; 모든 물)에 달 그림자를 드리움과 같은데,
풀 한 포기와 물 한 방울을 가지고 '다만 여기에 봄이 있고 달이 있다'고 한다면, 그 어찌 저 봄을 알고 달을 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문)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본체(本體)는 태극(太極)이고,
그 작용(作用)은 건곤(乾坤)이므로 그 운동변화가 천지와 더불어 함께 흐른다는 점은 믿을 수가 있거니와,
불교의 경전에는 천지조화의 오묘한 내용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만큼 자세함이 없는데,
부처님이 그 내용을 미처 논술치 않으신 까닭은 무엇인가?
주)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하도(河圖)는 옛날 중국의 복희시대에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그림이고,
낙서(洛書)는 중국의 하(夏)나라 시대에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쓰여 있던 글을 말하는데,
복희가 하도를 보고 팔괘(八卦)를 지었고, 우왕이 낙서를 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었으며,
우왕으로 부터 약 천년 뒤에 문왕(文王)이 낙서를 근간으로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을 완성하여 오늘날의 주역(周易)이 이루어 졌다고 전하여 오는 도서(圖書)로써
우주의 순환원리와 인생의 길흉화복을 추론하는 근원이 된 것임.
이 도서(圖書)를 우리나라의 김일부(金一夫) 선생이 연찬하여 정역(正易)을 완성한 바 있다.
답) 부처님께서 하도와 낙서의 내용을 사람에게 보여 줌이 심히 지극하시나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했을 따름이다.
마치 눈먼 사람이 태양의 밝음을 알아보지 못함과 같다 할 것이다.
부처님의 시현(示現)은 반드시 3신(三身)을 갖추시는데, 그 3신(三身)은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말하거니와,
법신(法身)의 수인(手印)을 맺음은 좌.우의 손을 합하여 한 주먹으로 하였는데, 이는 그 본체(本體)를 보이심이다.
주역(周易)의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 함이 바로 이것이다.
무극(無極)은 지극히 고요하고 허명(虛明)하여 시방(十方)의 허공 전체를 머금고 있음을 이르는 것이요,
그 무극이 통채로 영묘하게 발하려 함이 태극(太極)이거니와, 이 태극은 신묘한 덕성을 품어 갈무리고 우주에 가득히 충만함을 말한다.
보신(報身)의 수인을 맺음은 손을 벌려 좌.우로 폈는데, 이는 그 상(象)을 보이심이다.
역(易)에 말한 태초(太初)로부터 태시(太始)가 되고, 태시로부터 태소(太素)가 되어 음양(陰陽)이 이미 나뉘고 사상(四象)이 이미 분리된 상태이다.
좌측은 양(陽), 우측은 음(陰)인 것이며, 사상(四象)은 즉 팔꿈치의 두 마디로 좌.우를 합하여 넷이 됨이거니와,
세상에서 사시(四時)로 사절(四節)을 삼는 것은 진실로 그 까닭이 있다 할 것이다.
화신(化身)의 수인을 맺음은 좌측 손은 펴고 우측 손은 오무렸는데,
이는 그 용(用)을 보이심이다. 편 것은 양(陽), 오므린 것은 음(陰)이거니와,
좌측 손은 세 손가락은 펴고 두 손가락은 굽혔고 우측 손은 셋은 굽히고 둘은 폈는데,
편 것은 모두 천수(天數)이고 굽힌 것은 모두 지수(地數)인 바,
양쪽 손의 손가락을 굽히고 펴서 (만물이)서로 뒤섞여 어우러짐을 보이신 것이다.
오행(五行)의 생성(生成)으로써 배대(配對)를 한다면, 좌측 손의 새끼손가락은 천일(天一)이 되어 수(水)를 내고,
넷째 손가락은 지이(地二)가 되어 화(火)를 내고, 가운데 손가락은 천삼(天三)이 되어 목(木)을 내고,
둘째손가락은 지사(地四)가 되어 금(金)을 내고, 엄지손가락은 천오(天五)가 되어 토(土)를 내는데, 아래로부터 쌓아 위로 이르는 것이다.
우측 손의 새끼손가락은 지육(地六)이 되어 수(水)를 이루고, 넷째 손가락은 천칠(天七)이 되어 화(火)를 이루고,
가운데 손가락은 지팔(地八)이 되어 목(木)을 이루고, 둘째손가락은 천구(天九)가 되어 금(金)을 이루고, 엄지손가락은 지십(地十)이 되어 토(土)를 이루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각각 그 동기(同氣)로써 서로 구하는 오행생성(五行生成)의 근본을 보이시고자 함인 것이다.
8괘(八卦)의 성상(成象)으로써 배대를 한다면, 좌측 손의 굽힌 세 손가락을 합하여 건괘(乾卦)를 이루고,
편 두 손가락과 아래의 굽힌 것을 합하여 진괘(震卦)가 되며, 두 손가락과 중간에 굽힌 손가락이 감괘(坎卦)를 이루고,
두 손가락과 위에 굽힌 손가락이 합하여 간괘(艮卦)가 되는데,
이는 건.진.감.간(乾.震.坎.艮)의 4괘가 양(陽)이 되는 바를 왼쪽 손에 형상하신 것이다.
오른 손의 펴진 세 손가락이 합하여 곤괘(坤卦)가 되고, 굽힌 두 손가락이 아래쪽 손가락과 더불어 손괘(巽卦)가 되고,
굽힌 두 손가락과 중간에 편 손가락이 더불어 이괘(離卦)가 되고,
굽힌 두 손가락과 위에 편 손가락이 더불어 태괘(兌卦)가 되므로, 이는 부처님께서 건곤괘상(乾坤卦象)의 근본을 보이심인 것이다.
일기(一氣)의 유행(流行)으로써 배대를 한다면, 한 손의 네 손가락은 각각 3 마디가 있어 전부 합하면 12 마디가 되고,
두 손을 합하면 24기(氣)가 되는데, 이 기(氣)가 섞이고 어울려 오행(五行)의 생성이 갖추어지므로,
이것이 부처님께서 건곤조화(乾坤造化)를 보이심인 것이다.
그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것은 그 중앙을 비움이니, 4 손가락이 이미 수.목.화.금(水.木.火.金)이 되어
4 방위에 위치하면 엄지손가락은 토(土)가 되어 4 손가락에 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토(土)가 정위(正位; 중앙)를 얻은 까닭으로써 두루 응함이 방소(方所)가 없고 중궁(中宮)에 위치하여 조화를 총괄하는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심이 지극히 깊고 그 도리를 밝힘이 극진하시거니와,
조화(造化)의 오묘함이 부처님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니, 이는 곧 부처님이 건곤조화(乾坤造化)의 으뜸이신 까닭이다.
* 정신(精神)이 일생에 그치고 아주 없어지고 만다'고 하는 것은 단견(斷見)으로,
이는 생생(生生; 끊임없이 이어짐)의 이치에 어두워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헤매는 어리석음이며,
'사람은 항상 사람만 되고, 축생은 항상 축생만 된다'고 하는 것은 상견(常見)으로,
이는 음양(陰陽)이 서로 변역(變易)되는 이치에 어두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헤매는 어리석음이라,
이 단.상(斷.常)의 두 견해는 부처님께서 꾸짖은 것이다.
* 이른바 인과(因果)라고 하는 것은, 콩을 심으면 콩을 얻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얻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봄에 한 알의 씨를 심으면 가을에 만 알의 곡식을 거둔다"한 것이니,
사람이 선.악(善.惡)을 지으면 그 과보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이르기를, "전생(前生)의 지은 바를 알고자 하면 금생(今生)에 받는 것이 곧 그것이요,
내생(來生)에 받는 바를 알고자 하면 금생(今生)에 지은 것이 곧 그것이다."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설령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지은 바 업(業)은 없어지지 않고
인연(因緣)이 서로 돌아 닿을 때에 그 과보를 스스로 받게 된다."하였거니와,
이는 부처님께서 보이신 가르침이 인과(因果)를 우선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학덕이 높은 사람, 고귀한 사람, 영화로운 사람, 부유한 사람은 스스로 그 전생의 선업(善業)을 다행으로 여기고
더욱 공덕을 쌓기에 힘 쓸 것이며,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다병한 사람, 고독한 사람은 스스로 그 전생의 잘못을 뉘우치고
매일 착함으로 옮겨서 허물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쉬고 방종과 악한 생각을 없애야 할 것이다.
* 무릇 과보(果報)가 응하여 몸에 돌아옴이 일정치 않아, 가까이는 시일(時日)의 사이에 있고,
멀리는 진겁(塵劫) 밖으로 더딘 것은 곧 업(業)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인(因)에는 느리고 빠른 차이가 있으므로 응보가 각각 그 종류를 따르기 때문인 것이다.
* 문) 그대가 증거를 보여 가르침이 매우 소상하니 진실로 숭상할 만하다 하겠다. 그것을 배워 이를 수가 있겠는가?
답) 도(道)는 땅과 같아 멀리 갈수록 더욱 멀며, 도는 바다와 같아 깊이 들어 갈수록 더욱 깊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문(門)을 구하고자 한다면 계.정.혜(戒.定.慧)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이 계(戒)인가 하면 도적을 잡는 것과 같다 할 것이요, 무엇이 정(定)인가 하면 도적을 포박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며,
무엇이 혜(慧)인가 하면 도적을 죽여 없애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잡기만 하고 포박하지 않으면 달아나므로 잃게 되고, 포박하기만 하고 죽이지 않으면 의심하고 미워하여 피곤하게 되므로
이 세 가지를 다한 연후에야 대장부의 일을 능히 마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나 의.식(意.識)이 법신을 해치고 지혜의 뿌리를 죽임은
저 도적보다 심하여 진실로 다겁(多劫)의 고통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거늘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이 세 가지 징계와 제어와 단절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법신(法身)과 혜명(慧命)이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기(戒器; 계의 그릇)가 원만하게 성취되고,
정수(定水; 선정의 물)가 응결하여 맑아져야 혜월(慧月; 지혜의 달)이 두둥실 떠서
수도(修道)의 공덕이 바야흐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부처를 배우는 순서가 진실로 이와 같을 뿐이다.
계를 그릇이라고 한 것은 삼업(三業)을 말함이다. 삼업이란 몸(身)과 입(口)과 뜻(意)인데, 몸이 하나의 그릇이 되고,
입이 하나의 그릇이 되고, 뜻이 하나의 그릇이 된다.
무릇 세속에서 이 그릇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뜻에 담는 것은 탐욕과 성냄, 미움과 시기, 어리석음과 게으름 등의 번뇌업이요,
몸에 담는 것은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淫行)의 업이며, 입의 업으로 내뱉는 것은 아첨하는 말과 이간질하는 말과 헐뜯는 말이요,
삼키는 것은 냄새나는 채소와 주정을 부리는 술과 중생의 고기이다. 바로 이것이 윤회의 뿌리가 되어 온갖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릇에 티끌과 때의 더러움이 찌들어 있는데도 만일 깨끗이 씻어 없애지 않고 음식물을 담는다면,
마치 물이 비록 얼음과 같이 아주 맑고 깨끗하다 할지라도 더러운 것과 뒤섞여 혼탁해지면 물로 씻는 공덕을 드러낼 수가 없는 것과 같고,
반찬이 비록 감미롭다 하더라도 더러운 냄새에 배이면 제사나 잔치에 올려 쓸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참회로써 제거케 하시고, 뉘우침으로 태워 없애게 하시어, 마음을 물로 씻은 듯 깨끗하게 하시고,
진실한 마음으로 덮게 하시며, 맹세로써 온전케 하시고, 원력으로써 견고케 하신 까닭인 것이니,
이를 따라 행한다면 그릇에 담긴 것은 물물(物物; 일체의 업)이 청정하고, 그 가운데 담기는 것 또한 법법(法法; 일체의 법)이 참되게 되는 것이다.
정(定)을 물이라고 한 것은 한 곳에 그침을 말함이다.
마음은 물과 같아 뛰고 춤추게 하면 풀어져서 그 작용이 곧 흩어지고, 안정시키어 그치게 하면 그 작용이 곧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온전하여 맑고 고요하면 천심(天心)에 합치(合致)되나 요동하여 파도가 일면 영상(影像)이 혼미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써 잡되게 쓰는 마음을 없애게 하신 까닭인 것이니,
이를 따르면 밖의 티끌이 아무리 요란해도 침범할 수가 없어 근본 자리의 풍광(風光)이 여기에서 발현(發現)하게 되는 것이다.
혜(慧)를 달이라고 한 것은 정각(正覺)을 말함인데, 달이 야반에 허공에 올라 편.정(偏.正)을 아울러 오묘하게 비침과 같은 것이다.
무릇 사람이 삼계(三界) 속에서 길이 잠들어 지혜의 눈이 없음을 일컬어 무명암흑(無明暗黑)의 큰 밤이라고 하거니와,
태어나도 오는 곳을 모르고 죽어서도 갈 곳을 모르며, 가시밭길을 가면서도 편안한 길을 모르는 것이 중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밝게 열리면 정도(正道)가 바로 눈앞에 있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흑암(黑暗)의 큰 밤이 도리어 바른 자리가 되어 어둠이 밝음을 여의지 않고,
밝음이 어둠을 여의지 않아 '가리고 비춤(遮照)'이 동시에 이뤄지는 바, 이것이 근본의 도(道)인 것이다.
임제가 말한 "보살의 청량월(淸凉月)이 항상 법성(法性)의 허공에서 노닌다.
중생의 마음이 물처럼 티없이 맑으면 지혜가 그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나리라."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상 말한 것이 삼학(三學)이 상수(相須)하여 도(道)를 배우는 사람의 종시(終始)가 되는 까닭인 것이니,
정(定)이 없는 혜(慧)는 미친 망령이며, 더욱이 혜(慧)가 없는 정(定)은 큰 어리석음인 것이다.
어리석은 정(定)은 근원이 없어 말라죽게 될 뿐이니 이른바 '그림자가 비치는 물'이 아니며,
미친 혜(慧)는 떨어지는 별통별일 따름이니 이른바 '법성(法性)의 창공에 뜬 달'이 아닌 것이니,
어리석음과 미친 망령의 병통이 이 보다 심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도인이 정(定)과 혜(慧)를 균평히 지니는 자리로 오묘함을 삼는다면 수레가 두 바퀴를 갖춤과 같고
새가 두 날개를 얻음과 같아 창공을 나르고 대지를 질주함이 자유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를 배우는 사람의 첩경인 것이다.
*문) 지금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화두(話頭)를 참구함으로서 도(道)에 들어가는 방편을 삼는데,
앞에서 정(定)과 혜(慧)를 논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과(果)를 들어서 말하자면 정.혜(定.慧)가 되는 것이요,
그 인(因)을 들어서 말하자면 지.관(止.觀)이라 하는데, 지관이란 곧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법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법은, 하나로 제접(提接)하는 것으로 첫 걸음을 삼고, 전체로 제접하는 것으로 자량(資糧)을 삼는다.
자량은 걸음을 걷는 밑천이 되고, 걸음을 걷는 것은 자량의 효과인 것이니,
이 두 가지가 갖춰진 연후에야 그 이를 곳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로 제접한다'는 뜻은 하나로 만 가지를 제압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지(止)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전체로 제접한다'는 뜻은 의심을 일으켜 참구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관(觀)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하나로 제접함을 따라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 흔들리지 않는 것이 곧 정(定)이요,
전체로 제접함을 따라 활연히 깨달은 것이 곧 혜(慧)인 것이니, 비록 이름은 다르나 그 뜻은 곧 하나라, 도대체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 선법(禪法)이라는 것은 일반 교리(敎理) 밖에 따로 전한 최상의 종지(宗旨)이다.
부처님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 계실 때에 대범천왕(大梵天王; 하나님)이 황금 빛 극락화(極樂花)를 바치고
스스로 법을 받들어 행사를 주관하는 제자가 되어 부처님께 중생을 위한 법문을 청하시매,
부처님께서 법상에 오르시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拈華示衆),
사람도 천인(天人)도 백만의 군중이 모두 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홀로 크게 미소를 지으므로,
세존(世尊;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과 실상무상(實相無相)을 대가섭에게 부촉하노라."하시었다.
이로부터 서로 번갈아 전해 받아서 28대 달마대사(達磨大師)에 이르러 반야다라 조사(祖師; 27대)의 유촉(遺囑)에 따라 동쪽으로 건너와서
경전을 앞세우지 않고(不立文字) 각자의 마음에 파고들어(直指人心) 불성(佛性)을 찾아 부처를 이루게 하였다(見性成佛).
* 부처님의 법이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로부터 동쪽으로 전파된 이래
제왕(帝王).공경(公卿).제후(諸侯).명유(名儒).거가(巨家)가 부처님을 받듦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거니와,
저 이백.두보.노공.이고.유자후.소동파.백락천.배휴.장천각 등도 또한 부처님을 존숭하고 그로 인하여 고매한 명예를 잃지 않았고,
세상에서 부처님을 배척한 인물로 한퇴지와 구양수만한 무리가 없었으나, 한퇴지는 조주(趙州)에 좌천을 당해서는
항상 태전선사(太顚禪師)에게 법을 묻더니 마지막에는 선사를 시종하는 자의 옆에서 도(道)에 들어가는 한 길을 얻게 되었으며,
구양수는 관직에서 퇴임하고부터는 스스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 칭했는데, 거사(居士)란 부처를 배우는 자를 이름함이니
그렇게 호칭했음은 곧 부처님이 계심을 믿음이라, 이는 낙엽이 지면 뿌리로 돌아가고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감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그러함에 이르러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어찌 후회하지 않았으리오만,
그러나 화살이 활줄을 이미 떠났다면 돌아올 힘이 없듯이 미친 말이 입 밖으로 벗어났다면 그 어디로부터 거두어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은 분쟁을 일으킨다'는 경계를 소홀히 여겨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무간지옥의 업을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如來; 부처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말라"하셨나니,
미친 사람이 도의를 무시하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듯 한 때의 계교를 멋대로 부려
성인(聖人)을 헐뜯고 배척한다면 그 후환을 어찌 하겠는가?
애닯다. 육신의 보잘 것 없음은 단지 큰 창고 속의 작은 돌피(wild millet)에 지나지 않고, 세월의 빠름은 다만 여인숙을 스쳐 가는 나그네와 같을 따름이라, 백년을 뜬구름처럼 사는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가 꿈이요 허깨비임을 아는 일이 아니던가?
가난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이 모두 다 과거의 업인(業因)에 매여 있고,
현명하고 우매하고 고귀하고 비천함이 모두 다 일정한 분수가 있는 것이거늘,
그것을 얻은들 무엇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은들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황금으로 만든 탄환은 볼품없는 새를 잡고자 함이 아니며, 상투에 꽂는 옥구슬은 하찮은 공(功)으로 주는 것이 아니니,
지각이 있는 군자(君子)라면 구차스런 명예 때문에
그 본성의 선함을 허물어 뒷날의 어렵고 괴로운 신세에 떨어지는 잘못을 스스로 짓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