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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목장교회 2026.09.13. 주일오전예배 설교 전문: 답답할 때(창32:7-12)
요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조금 답답해 보여요. 사람들의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나라도 좀 답답해 보이고 가정이나 또 제 자신을 봐도 조금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그렇듯이 제가 성경에도 나처럼 답답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이렇게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답답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어떻든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야곱이었어요. 아마 답답하게 답답함을 여기는 사람들 중에 가장 심각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이 야곱의 답답함도 살펴보고 그 야곱의 답답함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있는 이 답답하여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한번 살펴보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야곱이 답답했던 것은 형 에서가 사병 명의 사람들 아마 군대라고 해도 되겠죠. 어떻든 4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왜 자기를 만나려고 오는 형이 답답했을까요?
보통의 만남은 기뻐요 기뻐야 정상인데 이 형과의 만남이 답답했어요. 왜냐하면 형 에서는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일까요?
당연히 어렵죠. 아마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이 야곱에게 있었을 거예요. 창세기 27장 41절을 우리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시작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세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 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동생이지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야곱의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답답했던 거예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미칠 것 같이 답답했어요.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다고 하는데 이 미워하다는 말은 조금 살펴보면 혐오의 의미가 많이 포함돼 있어요. 그러니까 조금 미워한 게 아니라 형이 동생을 조금 미워한 게 아니라 혐오하듯이 미워했다는 의미예요.
여러분 우리가 혐오 범죄가 요즘 많이 일어나죠. 이 혐오 범죄는 대부분 다 끔찍해요. 끔찍해. 그래서 여기서 미워하다는 의미는 원한을 품다. 적개심을 품다는 의미죠.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를 향해서 적개심을 원한을 품고 있는 형을 만나는 것이 이 야곱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을까요?
여러분 여러분에 대해서 원한을 가진 사람을 한번 만나본 적이 있나요?
여러분을 정말 미워하고 죽일 듯이 미워하는 사람을 여러분 만나려고 한번 해본 적이 있나요?
그 상황이 얼마나 괴로울지,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들지 한번 경험해 보셨나요?
여러분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은 사람을 그리고 여러분을 혐오하는 사람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래서 야곱은 미칠 듯이 답답하고 괴로웠던 것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형 에서가 신경 쓰였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형 이 에서의 이름이 무려 9번이나 등장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보다 더 많이 등장할 만큼 이 야곱의 모든 신경이 형 에서에게 다 꽂혀 있었던 거예요.
32절을 보면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군대를 두 진영이나 되는 하나님의 군대를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는 형밖에 보이지 않은 거예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만 보였을까요?
그래서 형의 이름이 무려 9번이나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경이 형에게 다 이렇게 쏠려 있었던 거예요. 이제 그러면 야곱이 왜 답답해했는지를 몇 가지를 함께 살피면서 또 도전을 인도받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야곱이 답답했던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어요. 그러니까 에스라는 자기의 쌍둥이 형 때문에 답답했던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답답한 근원을 찾아보면 대부분 그 답답함의 앞에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답답한 거예요. 형의 장자권과 축복을 이 동생 야곱이 훔쳤고, 그로 인해서 원수지간, 그리고 죽여도 시원치 않은 관계가 된 거예요.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는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어요. 그렇다면 왜 야곱은 형과의 관계가 깨어졌을까요?
이것은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 장작 건의 거래를 먼저 제한한 것은 형 에서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어야 했고, 떡과 팥죽을 그냥 형에게 공짜로 제공했어야 됐어요. 그런데 형이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형에게 떡과 팥죽을 제공하고 난 이후에 장자권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별미를 먼저 제공하고 형이 받아야 될 축복도 가로챘어요. 그러니까 이것으로서 형은 동생을 동생이 아니라 원수 적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근데 이 형을 만나지 않고서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 형과 만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약속했던 베들레헴도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제는 외삼촌 집에서는 쫓겨났어요. 그가 머무를 곳이 더 이상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갔어야 되는데, 그 앞에는 자기의 원수인 형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것은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 때문이에요. 친척끼리 모여도 답답할 때가 있죠. 친구가 모여도 답답함이 있고, 교회도 가보면 답답할 때가 많아요. 근데 그 중심에는 깨어진 관계가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관계를 해치는 가장 주된 원인은 뭘까요?
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어지고 성도 간의 관계가 깨어질까요?
그 주된 그리고 대표적인 원인은 욕심입니다. 욕심이 관계를 깬 거죠. 만약에 욕심의 크기가 크다면 클수록 관계는 심각하게 깨어져요. 야곱의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에 형과의 관계는 심각하게 깨어졌어요. 그래서 형은 자기의 동생을 원수처럼 대적처럼 생각했고 혐오했다 그랬어요.
혐오 그러니까 아마 그 당시에 만났으면 혐오 범죄의 현장처럼 동생을 그렇게 죽였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형이 그런 상태로 된 거예요. 근데 이렇게 형을 형과의 관계를 깨뜨린 인간관계의 답답함을 만든 주된 원인은 동생 야곱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서 답답해지는 것은 깨어진 관계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사람과의 답답함을 해결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은 사람과의 사람을 용서하고 또 이해하고 감사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관계 회복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이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계속 답답함이 그의 영혼과 육체를 이렇게 누르게 돼요.
여러분 우리가 이 답답함으로 예배하면 예배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기도 어렵고요. 답답함으로 사람과 교제를 하면 사람과 재미있고 온전한 교제도 하기 어려워요. 답답함으로 사역을 하면 사역도 괴롭고 힘든 것이 돼요. 근데 우리의 답답함을 주된 답답함은 깨어진 관계인 거죠.
여러분 지금 깨어진 관계가 있으시죠?
그 깨어진 관계로 예배하니까 우리 예배가 온전하기가 어려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아무리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를 준비해도 깨어진 관계를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들이 저도 있어요. 근데 이것이 끊임없이 저를 짓눌리고 괴롭히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야곱의 답답함이 어떻게 풀렸을까요? 성경은 참 독특하게 야곱의 답답함이 어떻게 풀렸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요. 야곱은 형과의 화해를 통해서도 이 형과의 답답함이 풀렸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렸어요.
먼저 여러분 실제로 사람의 관계가 많이 맺어졌다는 것은 그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도 맺어졌다는 의미인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가 많이 맺어진 사람들 얽히고설킨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이 야곱의 문제가 형과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의 문제였던 거예요. 그래서 얍복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 놀랍게도 형 에사와의 관계도 회복이 됩니다.
여러분 사람 사이의 문제가 사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형 에서와의 문제인데 하나님과 씨름한 이후에 하나님께 기도한 이후에 하나님과 밤을 샌 이후에 그 문제가 풀렸어요. 러니까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사람과의 관계 문제의 근원에는 깨어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 이전에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가 있지 않은지를 살피고 그 잘못된 관계를 먼저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람과의 관계도 온전히 회복될 수 있어요.
두 번째로 야곱이 답답했던 이유는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 때문이에요. 첫 번째 야곱이 답답했던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다면 잘못된 관계 때문이었다면, 두 번째, 야곱이 답답했던 이유는 인간적인 판단과 인간적인 생각 때문이에요.
7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대를 두 대로 나누고
형 에서가 4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그러니까 척후교병으로부터 사자들로부터 듣고 난 이후에 보고를 받고 난 이후에 이 야곱이 행한 행동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그룹을 떼들을 양떼나 소떼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거였어요. 그러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 구하기 시작해요. 먼저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치를 취하고 난 이후에 이후에 하나님께 구하기 시작해요.
11절 말씀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를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라
야곱은 4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를 만나러 오고 오는 형 에서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게 아니야 하나님을 찾았어요. 그것도 간절하게 찾았어요. 그런데 순서를 보면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먼저였어요. 그러니까 자신과 함께하는 것들을 두 떼로 나누고 난 이후에 왜 두 대로 나누면 형 에서가 이쪽을 치면 이쪽이 도망가고 이쪽이 치면 이쪽이 도망가게 하기 위해서 두 대로 나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위기 앞에서 먼저 인간적인 방편을 너무 먼저 구하고 난 이후에 이 야곱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도 너무 흔해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긴 해요. 여러분 한국 교회만큼 간절히 기도하는 데가 어디 있어요? 간절히 기도해요. 그런데 순서를 가만히 보면 인간적인 수단을 먼저 다 강구해 놓고 믿음의 수단이 아닌 것들을 다 취해 놓고 난 이후에 기도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정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인간적인 수단을 먼저 취해 놓고 그러고 난 이후에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기도가 기도가 아닌 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별명을 붙일까라고 고민해 봤어요. 그리고 인간적인 기도자라고 한번 별명을 붙여봤어요. 기도자는 기도자인데 인간적인 기도자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편을 다 취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자인 거죠.
물론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의 수고와 땀도 함께 다 쏟아부어야 돼요. 기도하면서 노력해야죠. 기도하면서 수고해야 되죠. 그런데 인간적인 방편을 먼저 다 취해놓고 기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신앙은 있는데 막상 결정하거나 걷는 길을 보면 너무 인간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있는데 막상 행동하는 것을 보면 너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랬어요.
여러분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은 어떻게 보면 지혜로운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말씀을 하나 영적으로 보면 사람과 상황을 답답하게 만들어요. 야곱의 삶을 끊임없이 답답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생각이에요.야곱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어요.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도 풀리기 힘든 인생에 고난이 많은 야곱이었는데 그는 항상 말씀과 함께 자기 판단과 생각과 함께 걸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야곱이 이 답답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판단은 신속하고 현실적이고 그리고 지혜롭게 보여요. 그러나 답답하게 만들어 교회 안에 사람의 판단과 생각이 많으면 교회는 점점 답답해요. 가정도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많으면 자꾸 답답해져요. 보세요. 기도는 하는데 답답해요. 열심히 봉사하는 데는 답답해요.
왜 답답할까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을 먼저 앞세우기 때문인 거예요. 그리고 기도해요. 여러분 얼마나 억울한가요? 기도하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점점 답답하게 하셔요. 기도하는데 그래서 어쩌면 이런 인간적인 기도자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많은 원망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먼저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정이 답답함이 있습니까?
아마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금 여러분의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데 우리 교회 안에 답답함이 있나요?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과 함께하는 그 사람과 그 주변에는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일 거예요. 관계가 답답한 것도 사람을 만나도 늘 답답해 편함이 없어요. 근데 그 중심에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있었어요.
야곱은 기도자인 건 맞아요.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도 맞아요. 그런데 항상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것을 먼저 중요시 여겼고 그렇게 한 후에 기도를 했어요. 물론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건 아니지만 만약에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세 번째로 야곱이 답답한 이유는 상황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 그러니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야곱을 계속 따라다닌 거예요. 야곱 앞에서 계속해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집에서는 장자권과 축복권을 차지했지만 자기를 죽이려는 형이 있었고요. 아버지와 형을 피해 외갓집 보러 갔더니 외삼촌 라반과 사촌들의 아들들의 방해가 있었어요. 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 앞에는 형 에서와 400명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야곱의 앞에는 항상 불편한 상황이 계속됐던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답답한 거예요. 어디를 따라가던 야곱의 삶에 이 불편한 상황이 늘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이 많은 어려운 상황 때문에 답답한 거예요. 결혼 전에 있던 문제가 결혼 후에도 있고 교회를 옮기기 전에 있던 문제가 교회를 옮겨도 있고, 예수를 믿기 전에 문제가 예수를 믿어도 있고, 이사를 하기 전에 문제가 이사를 해도 있고 그대로 계속된 문제가 우리의 삶에 있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답답함도 상황의 답답함도 어떻게 풀리나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이후에 해결돼요. 이 상황의 답답함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거죠. 여러분의 삶에 있는 인생의 그 답답함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듯한 그 답답한 상황은 장소의 문제도 아니고 사람의 문제도 아니고 결국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문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답답한 상황이 계속 나를 쫓아다녀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리지 않으면 어디를 가도 이 답답한 문제는 이 어려운 상황은 늘 나를 쫓아다녀요. 내가 여기서 다른 나라를 가도 쫓아오고요. 젊었을 때의 문제가 나이가 들어서도 그대로 있어요. 이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조금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한 번 이렇게 눈물 좀 흘리고 한 번쯤 예배 열심히 드려서 좀 은혜를 받고 한 번쯤 헌금을 좀 크게 하고 그러면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고 이렇게 생각해요.
여러분 회복된 관계는 오래 가요. 회복되지 않은 관계는 금방 끝이 나요. 한두 번에 끝이 나지만 회복된 관계는 오래 가요. 부부가 사이가 안 좋다가 회복이 돼요. 그럼 그 관계가 잠시만 좋은 게 아니죠 오래 가는 거예요. 그 이후로 20년 30년을 평안하게 살아요. 이게 회복된 관계의 특징이에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면 그 회복된 관계가 오래 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잠깐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잠깐 열심히 예배하고 잠깐 열심히 봉사한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어려운 상황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나이도 가리지 않고 어려운 상황은 신앙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어려운 상황은 모습도 아주 다양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려운 상황인지 모를 게 우리에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실상을 잘 살피면 이 상황은 이 상황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문제가 답답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답답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답답함을 덜 느끼고 살려면 참 평온과 자유를 느끼며 살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없도록 해야 돼요.
여러분 문제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부부 관계에 문제가 없어요. 여보 빨래 좀 걷어줘. 문제없는 남편은 어떨까요? 알았어 여보 문제 있는 남편 어때요? 왜 맨날 나만 시켜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왔는데 집에서 놀면서 뭐 해? 이게 문제 있는 남편의 반응이에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다면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우리는 불평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으니까 하나님의 사소한 명령도 불평처럼 받아져요. 하나님이 왜 내가 이렇게 힘든 걸 모르시고 왜 저렇게 말씀하신 명령을 하시지,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괴로운지를 모르시고 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시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이 답답한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어서 얍복강 사건 이후 형 에서와의 화해 이후 야곱의 삶에는 다시 답답함이 찾아와요. 이게 놀랍죠. 분명 하나님과 정말 진득하게 기도하고 관계가 다 회복된 듯했어요. 그런데 다시 야곱의 삶에 이 이후에 그 딸의 삶에 큰 어려움이 찾아오잖아요. 다시 답답함이 찾아와요.
왜 그랬을까요?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잘 사는 비결, 성도가 답답하지 않을 비결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노력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늘 정상이 아니에요. 한 번 기도했다고 해서 항상 정상인 상태로 있는 게 아니에요. 항상 이렇게 오르락 내려요. 성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되도록 매일매일 노력하는 것이 그게 신앙인의 삶인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 잘못되면 다시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으로 올려놓고 뭔가 잘못됐는지 잘 살펴서 잘못된 관계들을 또 하나님과의 관계로 올려놓는 것이 이게 신앙생활인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잘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았을까요?
이것을 늘 살피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답답해지면 모든 것이 답답해져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혹 나의 오늘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지는 않았을까라고 살피고 돌아보는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답답함은 무언가를 개선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답답한 우리의 삶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사인인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든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든 하라는 거예요. 잘못된 것을 바꾸라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이 답답함의 사인을 잘 못 알아차려요. 그래서 개선하지 않는 거죠. 그냥 그대로 방치하는 거예요. 그래서 답답함이 하나 쌓이고 또 하나 쌓이고 또 하나 쌓이면 미칠 지경이 되는 거죠.
여러분 교회를 다녀도 미칠 것 같은 사람이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답답함은 하나님의 개선의 사인인데 이 개선하지 않은 거죠. 바꾸라는 명령인데 바꾸지 않은 거예요. 고치라는 명령인데 고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답답함이 쌓여서 있는 거죠. 답답함은 또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인이에요. 니가 지금 잘못된 길에 서 있다는 거예요. 니가 지금은 잘못된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거예요. 다시 올바른 길을 가라는 사인이에요. 그래서 올바른 길에 들어서면 즉시 평안해지는 거예요.
답답함은 지금 우리가 잘못된 것을 계획하고 잘못된 것을 꿈꾸고 있다는 뜻이에요. 참된 것을 사모하고 진리를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답답함이 해결이 돼요.
답답함은 죄의 길에 서 있다는 사인이에요. 회개하라는 사인이에요. 니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범죄의 자리다. 회개해라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입술의 범죄, 생각의 범죄 행위의 범죄 이 많은 범죄가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여러분 참 사람이 이상한 게 이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또 죄를 지어요. 세상에서 답답함을 푸는 방법은 하나님께 죄 짓는 방법 드리더라고요. 성도들이 이 답답함을 풀려고 뭔가 행동을 해요. 그 행동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범죄의 결과가 우리를 또 더 답답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인생의 길목에는 항상 답답함이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영혼들은 다 답답해요. 이 답답함도 따져보면 재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으로 하나님의 뜻 안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답답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에만 온전한 평안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답답함이 아니라 평안이 여러분의 친구이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괴로움이 아니라 평안이 여러분의 친구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