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2
5월11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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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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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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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빛에서 빛으로 나아갑시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장 46절)
복음 구절 안에 빛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 항상 똑같은 강론을 반복하는 동료 수도자 덕분에 이제는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곰곰이 반추해 보니 나름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줄창 어둠에서 어둠으로 직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저 잘 먹고 즐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영혼이나 구원, 진리나 사랑 같은 개념과는 완전 등을 돌리고 살아갑니다. 애완견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에 못지않게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애초에는 흘러넘치는 축복과 은총 속에 빛의 삶을 살았지만, 충실성과 항구성의 부족으로 인해 자꾸만 어둠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자주 체험하는 유형입니다.
거룩한 아침 미사와 기도를 통해 하루 온 종일 주님 은총의 빛 속에 살았습니다. 순간순간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기도와 일을 삶 속에 조화시켰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동으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주변 사람들이 눈부셔할 정도로 찬란한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것, 마치 부서지기 쉬운 흙덩이와 같이 나약하고 변화무쌍합니다. 빛의 상태에서 하루를 잘 마감하면 좋으련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술잔을 기울입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잔이 되고...엉뚱한 말을 해대고, 이런저런 실수를 연발하고, 빛으로 충만했던 하루가 어둠으로 마무리됩니다.
어떻게든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비록 어제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할지라도 아침이면 아침마다 훌훌 털고, 다시금 빛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부족함을 딛고 찬란한 광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유달리 더 크게 다가오는 이 큰 좌절감과 우울감을 딛고 어떻게든 빛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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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9MDIm2Us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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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 않으면 꼭 만나야 할 사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이 곧 심판의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말은 곧 빛입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빛을 보고 오징어만 그 배로 접근하여 올라오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말씀을 찾아 올라오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둠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께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빨리 탈출하라고 소리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 소리를 거부하고 귀를 막습니다. 구원의 길은 좁고 그 길로 들어서는 이들은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줄 이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는 이 역할을 세례자 요한이 하였고 지금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과 타협한다면 세상에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며칠 전 검찰이 결국엔 이은해와 내연남 조현수 씨를 살인·살인미수·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위반 미수 혐의로 구속기소를 했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수영할 줄 모르는 윤 씨에게 4m 높이의 바위에서 3m 깊이의 계곡물로 구조장비 없이 뛰어들게 해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윤 씨가 여러 차례 거절하자 “그럼 차라리 내가 뛰겠다”라며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하지 않아 살해했을 때 적용하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 아닌 직접 살해한 상황에 해당하는 ‘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한 것입니다.
검찰은 또 공소장에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윤 씨를 상대로 이른바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적시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앞서 2019년 2월과 5월에도 복어 피 등을 섞은 음식을 먹이거나 낚시터 물에 빠뜨려 윤 씨를 살해하려 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여러 차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자기를 피폐하게 만드는데도 윤 씨는 이 씨와 그의 친구들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사건 발생 8년 전인 2011년쯤부터 남편 윤 씨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당시부터 윤 씨의 돈을 받아냈습니다. 그녀는 2017년 3월 윤 씨와 결혼하여 다른 남성들과 사귀면서 윤 씨를 착취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윤 씨는 6천만 원 상당 연봉을 받던 대기업 직원이었으나 이 씨와 결혼한 뒤로 개인회생을 신청했습니다.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불법 장기매매를 하겠다’라는 글까지 올릴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끼니를 해결하려 직장 동료에게 3천 원을 빌려달라는 요청도 했습니다. 사망 당시 윤 씨 자취방에 있던 서류들을 보면 빚만 1억5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윤 씨는 결혼 2년 차인 2018년 12월에 이 씨와 통화하면서 “빚이 너무 많아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그만할까. 지친다”라며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에 이 씨가 “정말 그만 만나고 싶냐?”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씨는 윤 씨에게 “이해한다”라며 공감한다는 식으로 답하면서 심리적 지배를 이어갔습니다. 윤 씨는 숨지기 5개월 전인 2019년 1월에 조 씨에게 문자를 보내 “은해에게 쓰레기란 말 안 듣고 싶다. 은해가 짜증 내고 욕할까 봐 무섭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윤 씨는 결국 2019년 6월 30일 오후 8시 24분 경기 가평군 용소계곡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해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이 세상에 이런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짓은 더하면 더했지 이은해 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 물로 빠뜨립니다.
윤 씨가 살아날 수 있었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연히 이 씨와 조 씨로부터 탈출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이 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누군가를 만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교회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삼구, 그리고 그 욕망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 세상이 사탄 무리의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탈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이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2013년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오블리비언’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블리비언은 ‘(기억의) 망각’이란 뜻입니다. 잭 하퍼란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지구에 남아 있는 외계인들을 없애는 일입니다. 외계인들에게 잡혀 정보를 빼앗기면 안 되기에 그 사람의 기억을 일부러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 아내를 만나게 되어 기억을 되찾습니다. 아내는 잭 하퍼가 외계인들에게 잡혀가서 기억이 지워져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결국 그가 죽이고 있었던 것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잭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외계인들을 물리칩니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성경과 같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아내를 만납니다. 교회는 세상이 적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아 세상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승리한 자만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말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뱀으로 보이고 세상이 사탄의 집으로 보이게 해 주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할 때 자신에게 절하면 자신이 가진 세상의 영화를 예수님께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상은 자신의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빛을 보려면 자신이 어둠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바라볼 수 있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어둠에 속해있음을 보게 하는 이를 먼저 꼭 파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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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은 샘물의 본질과 같다.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 하신다. 바로 당신이 바로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 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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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이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과 ‘본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 ‘같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3) 이 말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같은 신앙’이고, ‘하나의 신앙’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서로 상관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 보기 때문이고, 중요한 것은 안 보고 하찮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은 볼 수 있게 하고, 안 보는 사람은 회개시켜서 보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를 믿는 것,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믿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이 말씀은, 앞의 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이 말씀들에서 ‘빛’은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죽음’을 뜻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은, 멸망하지 않는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7-50)
이 말씀의 뜻은, “구원과 멸망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라.”입니다. 혹시라도 “나는 그런 선택 자체를 안 하겠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원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다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포함됩니다. 구원 문제에서는 중간지대도 없고, 중립도 없습니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때’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구세주가 아니라 ‘심판관’으로 오실 것이고,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기 전에 그 사람 자신이 이미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선택한 채로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멸망을 선고받은 뒤에 심판관이신 예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말한다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니, 당연히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이고, 강력한 의지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또 예수님도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데,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가? 그냥 하루하루 세속 일에 묻혀서,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과연 나의 구원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 일인가? 또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과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은, 과연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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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한국인 독자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던 교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동네 진흙탕에서 놀고, 불량식품을 먹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요즘 아이들이 고생하는 ‘아토피’는 별로 없었습니다. 냉장고도 없었고, 깔끔한 마트도 없었습니다. 구충제를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 마트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식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냉장고에도 신선한 재료들이 있지만 요즘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과학 분야에서 완벽함은 긍정적인 면이 분명 있습니다. 유전적인 질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함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성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성형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근육 강화제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건강에 해롭습니다. 유전적인 방법으로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자칫 건강하지 못하고, 부족한 아이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들이 추구하는 완벽함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완벽함은 늘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오히려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너무 완벽한 사람 곁에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직업도 ‘금수저’는 아니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고,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흙수저’가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상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주님을 따르라 하시나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부족함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완벽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여전히 나약함 때문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나약함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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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 김교산 알체리노 신부님]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유교가 학문과 생활을 지배해왔습니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의 삶은 절대적으로 유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임금님께 대한 신하들의 충성은 공자님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죽기까지 했습니다. 고려가 망할 무렵 임금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왕은 허수아비와 같았습니다.
해안 지방에는 왜구들이 쳐들어오고 북쪽에는 홍건적이 쳐들어와 사는 게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적군들을 물리쳐 공을 세운 이 성계가 점차 세력을 키워 왕을 몰아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분명히 고려의 왕이 있는데 이 성계가 왕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이 된 것입니다.
나라 전체로 보면 허수아비 왕 대신에 강력한 왕이 생겨나서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통일시킨 것은 나라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의 신하들이 유교의 가르침 아래 살았기에 두 임금을 섬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에 인재들을 모으려고 과거시험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인재들과 옛 신하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자기가 왜구들을 물리치고 홍건적을 물리칠 때 영웅이라며 열광하고 환호하던 백성들이 자기가 왕이 되니까 모두 돌아선 것입니다. 화가 난 이 성계가 어떻게 인재를 모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날 고려의 신하들과 장군들이 조선과 인연을 끊고 살겠다고 떼를 지어 깊은 산으로 떠났습니다.
산에 들어가 풀을 뜯어먹고 살겠다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성계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병사들을 시켜 고려의 신하와 장군들이 들어간 산을 에워싸고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였습니다. 불이 타올랐지만 고려의 신하들과 장군들은 살겠다고 아무도 도망쳐 나오지 않았고 다 타죽었습니다.
이 기막힌 사건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유교의 영향을 받은 고려의 신하들과 장군들은 忠臣은 不事二君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고려의 신하들은 자기들이 배우고 살아온 대로 신하는 한 임금만 모신다는 가르침에 따라 이 성계와 조선을 거부하고 산에 들어가 결국 불에 다 타죽었습니다.
이 성계가 그들의 마음을 먼저 빼앗아야 했는데 마음은 빼앗지 못하고 권력의 힘으로 강제로 굴복시키려 하니 고려의 신하들이 굴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빼앗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뺏을 수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와 옳은 것만을 가르치셨고 천국 가는 길을 가르치셨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모두 올바르고 善했기에 예수님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빼앗긴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예수님께 바친 사람들은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 하느님의 보호 아래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성계가 실패했던 일은 고려 신하들의 마음을 빼앗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사랑과 德으로 대하며 신하들에게 좋은 임금이라는 인상을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살던 우리들의 마음을 뺏으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을 받은 고려의 백성들이 고려왕만을 모시기 위해 죽었듯이 우리도 하느님만을 모시다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돌려 드리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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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편향된 마음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하느님을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시며,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불안하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기 힘들어하는 영적 소심함에 빠집니다.
반면에 어떤 신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확신만 갖고 삽니다.
그러다 보면, 내 죄와 악행, 태만과 교만으로부터 회개하는 일 없이 영적 이완에 빠져 자기 합리화와 변명으로 가득 찬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세상에 오셔서,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이라고 당신 구원에서 제외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그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말이기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신뢰를 느끼지 못해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누구나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바로 예수님의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 각자를 심판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에서 마지막 날에 직접 뵙게 될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금-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듣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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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 믿는 것이 하느님을 보고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까? 심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중재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심판은 피할 수가 없지요. 누구나 생전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받아 주시려 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결과는 영원한 어둠과 절망뿐이지요.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미지근하게 유지하다가 막상 하느님 앞에 나선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데도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하느님을 뵙는 순간이 참으로 은총의 순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실천한다는 긍정적인 신앙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때 심판이란 바로 하느님과 일치되는 자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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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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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리심은 제게 믿음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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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는 이여!>
요한 12,44-50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길을 걷는 이여!>
길을 걷는 이여!
길이 있어
그대 걷는 이여!
길이 하나면 좋으련만
길은 늘 둘이라네
빛의 길이 있다면
어둠의 길도 있다네
믿음의 길이 있다면
불신의 길도 있다네
따름의 길이 있다면
거역의 길도 있다네
생명의 길이 있다면
죽음의 길도 있다네
구원의 길이 있다면
심판의 길도 있다네
길을 걷는 이여!
길이 있으니
걸어야만 한다네
길을 걷다가
어딘가에 이를 거야
그 어딘가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그 어딘가에서
슬퍼하지 않기를
어찌 되었든
길을 걷는 이여!
걸어간 길 끝이 어디든
길을 탓하지는 말게나
길이 그대를
걸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길을
걸은 것이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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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 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서 나도 보내셨다는 것을 인식하며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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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제대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 혼동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만납니다. 교회가 성화 상 공경과 관련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 저 뒤편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성화 상 공경은 성모상이나 성인의 이콘을 공경하고 신성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형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 곧 성모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 다시 말해 그들의 신앙이 보여 준 모범적인 삶에 대한 공경의 행위입니다. 이는 교회가 거행하는 성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질료와 형상인 빵과 포도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선물을 안겨 주시는 분을 마음으로 보고 굳게 믿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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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2,46)
<빛이신 예수님!>
어둠은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는 참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어둠을 간직한 채 공동체에 함께하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것을 바쳐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자 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빛의 모습이셨기 때문이고, 나의 작은 행위가 공동체의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12,47)
성체나 말씀이나 기도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악마의 행위'는 우리를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늘 어둠으로 특히 과거의 어둠으로 이끕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혼탁함 속에서 정신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쉼의 시간'입니다.
이 쉼은 '단순한 육체적 쉼(휴식)'을 뛰어 넘어, 성체와 말씀과 기도 안에 머무는 '영적인 쉼'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쉼 안에서' 내 마음의 상태가 빛인지, 어둠인 지를 늘 들여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022.3.14부터 엄마의 노트에다 쓰기 시작한 성경 필사의 시간은 '빛의 시간'이며, '기쁨과 행복의 시간'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이어 마르코복음 14장까지 필사했는데, 처음에는 좀 버거웠지만 이제는 하루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힘이 있는 그 순간까지 매일 성경을 써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성경 필사'가,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빛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아주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에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성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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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병원 응급실에 한 여자가 실려 왔습니다. 아파트 8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얼굴을 심각하게 다쳤고 전신에 부서지지 않은 뼈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습니다. 그 병원의 모든 외과 의사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수술을 맡았지요. 자살한 사람을 살리겠다고 모든 의사가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의사 중 한 명은 이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겠다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막대한 시간 낭비와 자원 낭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지만, 이 여인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여인이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어떤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었을까요?
“남편이 발코니에서 저를 밀었어요.”
그녀의 말에 남편은 체포되었고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앞서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의사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에 앞서 자신이 할 일에 먼저 충실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은 한 생명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지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은 세속적인 통치자, 모든 나라를 다스릴 유다인의 왕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힘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조직하지도 않고,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는 약한 모습만 보이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특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느님 나라에 유다인 뿐 아니라 모든 나라 백성이 들어간다는 말씀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던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빛이신 주님을 믿고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며,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지레짐작과 같이 잘못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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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행복>
-하느님의 선물을 선택하십시오-
행복은 선택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지인들이 참 많이도 보내 주는 아름다운 5월의 사진들입니다. 한국의 5월은 어디나 천국처럼 아름답습니다. 어디를 찍어도 작품입니다. 어제 피정을 마치고 떠난 코이노니아 자매회 한 자매님이 공동카톡방에 올린 수도원 풍경들은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요! 저절로 나오는 많이도 인용했던 주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이런 선물을 선택하여 살 때 구원의 행복이요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참으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원 역사와 함께 하던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예수님 부활상 배경의 참 좋았던 단풍나무가 사라졌습니다. 거의 죽어가기에 베었다는 해명인데 참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시가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높고
멀리 넓게
예수님 부활상
배경
단풍나무 사라지니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넓어졌다, 밝아졌다
전체가
불암산이
바로 하느님이 배경이 되어 주셨다!”
단풍나무 큰 배경이 사라지니 주변 모두가, 불암산이 배경이 된 듯 합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10-12세기 약200년동안 계속 전성기를 누렸던 클뤼니 베네딕도 수도원 성인 아빠스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예수님 배경의 밤하늘의 별들처럼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들 같은 성인 아빠스들입니다.
유럽 수도원들 개혁의 중심지 역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 오도(927-944), 성 마욜로(954-994), 성 오딜로(994-1048), 성 후고(1049-1109), 복자 베드로 베네라빌리스 등 줄줄이 혜성처럼 나타난 성인 아빠스들입니다. 모두가 발광체發光體인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별들같은 성인들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참 좋은 선물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세상은 물론 우리의 내면은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빛중의 빛이, 선물중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보내신 분을 보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빛으로 오신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인 예수님을 선택해 믿는 것이 구원의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의 근원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처방도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의 선택적 결단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누구나에게 열린 구원의 문입니다. 새삼 구원도 심판도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자초한 심판입니다. 얼마나 엄중한 선택인지요! 참으로 빛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 별같은 존재로 살아감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사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빛으로 파견된 예수님에 이어 성령으로부터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포하라 선택, 파견되는 바르나바와 사울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하고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두 제자는 주님의 선교사로서 하느님 말씀의 선포에 돌입합니다. 두 분 다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 큰 별 같은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 서두 짧은 묘사도 아름답습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 지금도 이런 우리 주변의 장면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면서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것’, 바로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날마다 빛의 선물로 오시는 주님을 선택하여 빛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시편6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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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3Hh24X_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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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요한 12, 50)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를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묻는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시작하여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된다.
영원한 생명이란
생명을
실천으로
옮기는
생명의 가치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가장 존엄한
명령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다운 삶에
우리가
눈을 뜨는
기쁨이다.
생명의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믿음의
여정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
생명의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예수님께서는
일상생활과
신앙적 삶이
생명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혼돈과
모든 무질서는
생명의 무지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믿음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이다.
영원한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생명이다.
생명이
참빛임을
가르쳐주시는
생명의 명령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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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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