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로 다가간 이준석이 커튼을 걷자 환한 햇살이 방 안을 가
득 채웠다.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도시는 온통 희었다.
이준석이 벽에 붙여놓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대로 누워 있어, 아직 아침 일곱시야.'
그는 팬티 차림이었으므로 상반신의 상처 자국이 다 드러났다.
김혜인이 시트로 몸을 가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베개를 등
에 붙이고 앉았다.
테헤란로의 호텔방 안이었다. 차량의 소음이 진동으로 변하여
희미하게 유리창만 떨게 할 뿐 방음장치가 잘된 방 안이어서 숨
소리도 들렸다. 김혜인이 말했다.
"하마터면 커피 끓여 드릴까요, 하고 물을 뻔했어요"
"어젯밤에 과로한 때문인가?"
하고는 이준석이 웃었지만 김혜 인은 정색했다.
"어젯밤도 일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그렇게 들렸나?"
이준석의 시선을 받은 김혜인이 드러난 어깨를 시트로 덮었다.
"불안해 보여요, 당신 자세가.'
"거긴 추워 보이는데?"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게 정상인데 당신은 벽에 몸을 붙
이고는 옆으로 보는군_架'
"관찰력이 예민하네."
쓴웃음을 지은 이준석이 커튼의 끈을 당겼으므로 창문이 가려
졌고 방 안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래서 이준석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 있으면 아주 좋은 표적이 되지.아마 나는 앞으로도
창가에 똑바로 서 있지 못할 거야.'
"끝나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어."
자리에서 일어선 이준석이 의자에 걸린 바지를 집자 김혜인이
시트를 젖히고는 일어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
으나 다가온 그녀는 이준석의 팔을 잡았다.
"한시간만 더 있어요.이곳에서 나하고."
"침대에서 말이지?"
그러자 주먹을 쥔 김혜인이 그의 가슴을 쳤다.
"장난같이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허망한 속을 다 알아요."
이준석이 다시 의자에 앉았고 김혜인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두 손으로 목을 감았다. 그래서 김혜인의 젖가슴이 바로 그의 얼
굴 앞에 펼쳐졌다.
"일 마치면 무얼할지 생각해 보았어요?"
"당신 젖가슴 때문에 생각이 헷갈려."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이준석이 말했다.
'그냥 이렇게 벗고 살까? 당신하고'
"일은 언제 끝나죠?"
"앞으로 길어야 이틀."
마침내 이준석도 정색하고는 손놀림을 멈췄다.
"하심 하마니가 만든 그 길고 더럽고 피비린내 났던 일이 곧
서울에서 끝나게 될 거야."
김혜인이 이준석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당신이 그 일의 주역인가요?"
"천만에."
머리를 저은 이준석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이쑤시개 같은 존재였어. 잇사이의 더러운 찌꺼기를 제
거하고 나서는 버려지는 존재."
"하지만 당신은 대가를 받았어요. 그것도 굉장히."
"돈 말인가?"
다시 웃은 그가 김혜인의 허리를 안았다. 강한 완력이었다.
'내가 얻은 것 중에서 당신만큼 값진 물건은 없어."
'~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녹음 테이프는 즉시 방송국과
신문사,그리고 백악관과 공화,민주양당의 고위 인사들에게 전달
될 거야."
호크는 이제 신사복 차림이었는데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
어서 시선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차창 밖의 평야는 흰 눈
에 덮여 있었지만 도로는 눈속은 물로 질퍽였고 앞차에서 튕겨지
는 물보라로 가끔씩 와이퍼를 움직여 유리창을 닦아내야 했다.
벤츠 500은 진동도 소음도 없이 국도를 시속 백 킬로미터로 달
리고 있다. 호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꼭 적의 약점을 쥐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내 신조다. "
옆자리의 클라우드는 잠자코 앞만 보았는데 긴장한 듯 자꾸 손
끝을 꿈틀거렸다. 차는 지금 오산의 공군비행장으로 가는 중이다.
오후 세시가 되어가고 있었고 오전에는 맑았던 하늘이 흐려져 있
었다
속도를 줄인 차가 우회전을 하자 곧 비행장의 정문이 보였다.
차단봉이 내려진 정문초소에는 M-16을 멘 미군 세 명이 서 있었
는데 한 명이 손바닥을 보이며 정지 신호를 했다.
호크가 상체를 등받이에서 떼었고 차 안은 갑자기 긴장감에 덮
여졌다 차가 멈추고 운전사 옆쪽 창문이 내려지자 몸을 굽힌 헌
병이 차 안을 둘러보았다. 콧날이 납작한 흑인이었는데 눈의 흰
창에 붉은 실핏줄이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통행증."
굵은 목소리만큼 두툼한 손바닥이 차 안으로 디밀어졌는데 손
바닥은 껍질이 벗겨진 것처럼 황갈색이었다.
운전사는 CIA요원이었으므로 잠자코 통행증을 내밀자 헌병은
잡아채듯 가져갔다. 그의 시선이 안쪽의 호크에게로 꽃혀졌다가
비껴났다.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시오"
헌병이 초소로 몸을 돌라자 호크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부하
세 명이 탄 됫차도 마악 통행증 검사를 하는 중이었다. 쌍발 엔진
의 F-18호네트가 귀청을 울리며 바로 앞쪽 상공을 날아갔다.
"이봐요, 국장 전용기는 몇 인승이오?"
불쑥 호크가 묻자 운전석의 사내가 뒤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삼십 명까지 탄 적이 있었습니다. 본래 오십인승이었는데 개
조했지_인'
"목욕탕도 있나?"
'나는 타보지 않았소"
사내가 차갑게 대답했을 때 흑인 상사가 돌아왔다. 그가 운전
사에게 통행증을 건네주며 앞쪽을 가리켰다.
"곧장 가다가 우회전하면 제3활주로가 보일 거요 그곳에 국장
전용기가 있소'
"고맙소, 상사."
운전사도 긴장이 풀린 듯 목소리가 가벼워져 있었다. 차단봉이
올려지고 벤츠가 비행장 안으로 진입했을 때 호크가 목구멍을 을
리며 낮게 웃었다
"우리 같은 해결사들에게 제일 골치 아픈 상대는 저런 순진한
군인들이지."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저고리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도 한낮에 정면에서 마주치면 최악이란 말이야."
직진도로를 달리던 벤츠가 우회 전했을 때 그들은 흰색 동체의
쌍발 제트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수직 미익 좌우에 엔진
이 붙어 있었는데 이미 열려진 문에는 트랩이 붙여졌다.
"그놈 왜 멋지군."
호크가 감탄한 듯 말했다.
승용차 두 대에서 내린 일행 여섯 명을 맞은 것은 조종사 복장
의 중년 사내였다. 트랩 밑에 서 있던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뒤쪽
의 비행기를 가리켰다.
"급유도 끝났으니 이십분 후에 출발이오. 올라가 계시오.국장
도 이미 오셨소"
"스튜어디스도 안에 있소?"
호크가 묻자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화장실이 넓습니다. 그 안에서 혼자 해결하시지요."
그러자 클라우드가 풀썩 웃었고 분위기가 밝아졌다. 트랠은 십
여 계단으로 높지 않았다.
앞장서서 기체 안으로 들어선 부하 하나가 탄성을 뱉었다.
"야, 굉장하군."
안은 창가에 의자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탁자가 놓
여져서 마치 응접실 같았다. 호크가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
"국장 방은 뒤쪽인 모양이다. 네가 가봐."
머리를 끄덕인 클라우드가 뒤쪽으로 통하는 나무문을 열었다.
그곳은 통로 양쪽에 각각 한 개씩의 방으로 나뉘어졌는데 오른쪽
문이 열리더니 부국장보 밋첨이 나왔다.
"누굴 찾는 거야?"
클라우드는 전에 호크와 함께 그를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눈인
사를 했다.
"보스가 국장을 찾습니다. "
'국장은 지금 통화중이야. 응접실에서 기다려. 곧 나오실 테니까.'
"알겠소 그런데 화장실이 어딥니까?"
'저 뒤쪽이야."
그리고는 밋첨이 통로 끝쪽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열렸다가
닫힌 순간에 안이 보였다. 그곳에는 기계장치가 가득차 있었다.
'CIA는 세금을 왕창 쓰는군"
투덜거린 클라우드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등뒤의 문을 닫은 순간 바로 옆쪽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동양
인이었다.
눈을 치켜들 그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혀 거리를 두었을
때였다. 복부에 격심한 충격을 받은 그가 허리를 구부렸고 이어
서 턱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몸이 젖혀졌다. 뒷머리를
화장실의 벽에 부딪친 그는 의식을 잃었다.
이준석은 클라우드의 몸을 끌어 변기 위에 앉히고는 허리춤에
꽃은 베레타를 뽑아 들었다. 소음기도 끼우지 않아서 손에 꽉 맞
았으므로 반쯤 치켜든 그는 화장실 문을 반쯤 열었다. 통로는 비
어 있었다.
그때였다. 통로 끝쪽의 문이 열리더니 밋첨이 나왔다. 그리고는
그의 앞을 지나면서 힐끗 안쪽을 보았다. 클라우드의 두 다리만
보였을 것이다.
밋첨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호크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힛첨씨, 몇년 후에 당신이 이 비행기의 주인이 되나?"
"국장이 저쪽 방에서 기다리고 계셔."
호크의 말을 무시한 채 밋첨이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통로 끝쪽 방이야."
"클라우드는?"
자리에서 일어선 호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셔졌다.
'그놈은 어디 갔어?"
"화장실에, 통로 바로 오른쪽이야."
머리를 끄덕인 호크가 밋첨의 옆을 지나면서 한쪽 눈을 감았다
가 떴다
"긴장하고 있군, 당신은."
"싫은 놈들하고 같이 있으면 그래."
"운명으로 생각해, 친구."
응접실을 나온 호크는 통로에 들어섰다.
통로는 너비가 일 미터가 조금 넘었고 길이는 오 미터 정도였
는데 바닥에는 붉은 색 양탄자가 깔려졌다.
"클라우드, 안에 있는 거냐?"
오른쪽의 문을 지나면서 호크가 물었을 때였다. 변기의 물 내
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렸으므로 그는 머리만을 돌렸다.
그리고는 번쩍 눈을 치켜뜨더니 와락 몸을 비틀어 숙이면서 손을
허리춤에 넣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방어자세가 반 넘어 갖춰진 것인데
이미 이준석의 발길은 그의 턱 앞까지 뻗쳐졌다.
이를 악문 호크가 팔을 들어 그의 발을 막았지만 잇달아서 후
려쳐온 주먹이 오른쪽 어깨를 쳤으므로 마악 손에 쥐었던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호크가 두 주먹을 쥐고는 웃었다.
"잘 만났다. 노랭이놈"
잇사이로 말을 뱉은 그가 와락 덮쳐온 순간이었다. 응접실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OIAf Vl."
호크는 응접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챘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준석이 팔을 들어 막았지만 호크의 주먹이 옆구리를 찔어 올
렸고 무릎에 배를 채였다. 옆쪽의 벽에 등을 부딪치며 물러난 이
준석은 날아온 호크의 주먹을 겨우 머리를 돌려 피했다. 화장실
문짝에 구멍이 생기면서 문이 반쯤 열렸다.
응접실에서 다시 총성이 두 발 울렸다.
'죽어라!"
뱉듯이 말한 호크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와자 다가선
그가 다시 주먹으로 이준석의 턱과 배를 연타했는데 좁은 공간이
어서 이준석이 몸을 틀었으나 다시 볼과 옆구리를 맞았고 호크의
무릎에 사타구니를 찍혔다. 이준석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뱉
어졌다.
그는 호크의 두 어깨를 움켜쥐고는 몸을 바짝 밀착시켰으나 힘
에 밀렸다. 화장실의 문짝이 부서지면서 그들은 안으로 엉켜 들
어갔다.
"이새끼!"
호크가 두 손으로 이준석의 목을 쥐었다. 그는 안쪽에 비스듬
히 누워 있는 클라우드를 본 것이다. 호크의 완력은 엄청났으므
로 이준석의 얼굴은 금방 시뻘겋게 피가 몰렸다. 저절로 벌려진
입안에서 혀가 반쯤 나왔다.
공간이 좁아 몸이 꼼짝없이 박혀버린 최악의 상황이다. 이준석
이 변기 사이에 박혀 있던 왼손을 겨우 빼냈을 때는 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수도로 만들고는 호크의 두 팔 사이의 공간을 향하
여 아래에서 힘껏 쳐 올렸다.
"컥!"
손가락 네개가 호크의 턱밑을 칼날이 되어 찍었다. 두 마디 가
깝게 뚫고 들어간 손을 빼자 피가 뿜어졌다. 호크의 두 손이 풀린
순간 이준석은 거칠게 숨을 빨아들이면서 몸을 비틀었다.
호크는 아직 몸 위에 있었으나 이제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
싸고 있었다. 다시 이준석의 수도가 가슴의 명치 끝을 파고들었
을 때 호크는 통로쪽으로 반듯이 넘어졌다.
겨우 몸을 세운 이준석이 호크의 몸을 밟으며 통로로 나왔을
때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면서 밋첨이 들어섰다.
"죽었소?"
손에 베레타를 쥔 그가 호크와 이준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응접실의 조무래기들은 모두 처치했어."
그는 호크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지독하군. 턱을 뚫어 놓았군 그래. 칼로 찍었소?"
서을 호텔의 특실 안이다. 밋첨이 들어섰을 때 셔츠 차림의 코
넬은 룸서비스로 시킨 바닷가재의 껍질을 손으로 뜯어내는 중이
었다.
'밋첨, 어딜 다녀온 게야?"
게살을 한입 넣고 나서 코넬이 묻자 밋첨은 창틀에 엉덩이를
붙이고 섰다.
"코넬 씨, 호크가 죽었습니다. "
"뭐라고?"
눈을 크게 뜬 코넬이 입안에 들어 있던 음식을 삼켰다가 목이
막혔는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호크가 죽었어? 오늘 밤에 떠나기로 했지 않아? 그런데 어떻
게"
"오후 세시에 떠난다고 공군기지에 들어갔다가 비행기 안에서
부하들과 함께 몰사했습니다. '
"아니, 도대체."
얼굴이 하알게 질린 코넬이 밋첨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작전 계획을 만들었지_象"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서울지사장 바우만이 들어섰
다. 그는 코넬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밋첨에게 말했다.
'밋첨씨,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십분쯤 남았어, 시간이."
팔목시계를 내려다본 밋첨이 팔짱을 끼더니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완강한 자세였다.
"코넬 씨,이제 호크가 죽었으니 놈이 장치한 폭탄이 여러 곳에
서 터질 거요.그것에 대비하셔야 될 텐데요."
'네가 호크를 없애다니. 이 자식,너는 나하고 한배를 타고 있
단 말이다. "
코넬이 잇사이로 말하고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야 돼, 이 자식아."
"나는 이미 이 일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어, 코넬. 죽는 것은 너
뿐이야."
밋첨이 온 얼굴을 펴고 웃었다.
'네가 날 끌고 들어간 것도 대통령은 이해하시더구만. 아마 언
론들도 마찬가지겠지."
'네놈이 나를 배신하다니."
포크를 움켜쥔 코넬이 이를 갈았을 때 바우만이 한 걸음 다가
섰다.
'그리고 호크 일당을 제거한 공로도 평가받을 거야, 코넬."
"이 새카만 놈이 감히."
그러자 바우만이 식탁에 놓인 소스 그릇을 들어 코넬의 머리
위에 엎어놓았다.
'더러운 놈. 네가 택할 길은 이제 너 혼자서 찾아라. '네 동료들
은 모두 죽었단 말이다. "
코넬의 방을 나온 그들이 아래층의 로비로 내려왔을 때 기다리
고 있던 정보국 차장 최세영이 다가왔다.
"한바탕 시끄러워지겠군요."
부드럽게 말한 최세영이 밋첨에게 바짝 다가섰다.
'밋첨 씨, 이번 일에 우리 한국 정보국도 한몫 했다는 걸 인정
해 주셔야 합니다. "
"어떻게 말입니까?"
"이준석이 당신과 접촉하도록 한 것도 우리가 한 일이고 여기
있는 바우만 씨하고 만나는 것도 우리는 보고만 있었습니다. 우
리는 일이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
"당신들은 끈질기군."
입맛을 다신 밋첨이 머리를 저었다.
"코넬 대신으로 이제 나한테 부담을 주려는 겁니까?"
'코넬의 약속은 다음번 국장이 될 당신이 당연히 이어받아야지
요. 그건 국가 정보기관 간의 약속이었t"
정색한 최세영의 말에 마침내 밋첨이 쓰게 웃었다.
"득을 본 것은 당신들뿐이구만."
CIA국장 제임스 코넬이 자살한 것은 다음날 아침 일곱시경이
었다. 그는 호텔방 안의 의자에 앉아 권총으로 옆머리를 쏘았던
것이다. 총성에 놀란 경호원들이 방으로 뛰어들었을 때 이미 코
넬은 숨이 끊어졌고 탁자 위에 유서가 놓여져 있었다.
연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밋첨이 유서를 읽고는 옆에 선 바
우만에게 건네주었다.
"국장답게 처리했군, 마지막은."
코넬은 자신의 행적을 숨김없이 밝힌 것이다.
하심 하마니 로부터 거금을 받았고 모간을 비롯한 군수산업체
의 거물들과 밀착되어 있었던 과거를 모두 고백했다. 그리고 호
크를 시켜 모간 일행을 살해했다는 것도 적어놓은 것이다.
바우만으로부터 유서를 받은 밋첨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으로 우리들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
그리고 세 시간 후인 오전 열시경에 밋첨은 코넬의 자살을 발
표했다. 유서도 공개되었으므로 생중계된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
은 경악했다.
발표를 마친 밋첨이 호텔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을 때 기다리고
있던 바우만이 말했다.
"호크의 테이프가 언론사에 전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선수를 친
셈입니다. "
"이미 그건 특종 가치가 없어졌거든."
뱉듯이 말한 밋첨이 핏발선 눈으로 스쳐가는 거리를 바라보았
다. 코넬은 호크보다 강수(强手)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으로
대신 사죄한 코넬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의식이 모두에게 작용되
고 있었다.
코넬이 시켜 모간 일행을 살해했다는 호크의 테이프 내용은 이
미 코넬의 자백으로 가치가 없어졌다. 또한 언론은 국익을 우선
으로 한다.
바우만이 힐끗 밋첨을 보았다.
"코넬은 이것까지 계산하고 있었을까요?"
"물론이지. 그는 언론 대책에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러나 밋첨은 그가 정치인 로비에도 뛰어났다는 말은 하지 않
았다. 아마 정치인들에게 전해질 호크의 테이프도 모두 버려질
것이었다. 결국 호크의 테이프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것으로 사건은 모두 끝난 셈인가?"
이윤수가 묻자 최세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분간 CIA는 내부 조정을 할 것입니다. 밋첨의 진퇴도 불분
명합니다. "
"코넬이 자살까지 할 줄은 예상 밖이었소."
혼잣소리처럼 말했던 이윤수가 머리를 들었다.
"이준석이는 어디에 있소?"
사건을 몰고 와 끝장까지 내었던 이준석이다. 코넬의 자살도
그가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세영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글쎄요.그는 이제 저희 요원들하고 같이 있지 않습니다. "
라디오를 끈 이준석은 가속기를 밟아 차에 속력을 냈다. 한낮
의 고속도로는 환한 햇살에 덮여 있었다.
"뭘 하실 거예요?"
옆자리의 김혜인이 불쑥 물었다가 곧 정정했다.
"오늘 말고 내일, 아니 그 다음에."
"꽤 길게 묻네."
앞쪽을 바라본 채 이준석이 웃었다.
"그저 이렇게 있는 것만 해도 나한테는 축복같이 느껴져."
그가 한 손을 뻗쳐 김혜인의 턱을 만졌다.
'그래, 같이 창가에 서서 창 밖을 볼 수도 있을 거야. 그렇군.
아이를 낳아서 셋이 나란히 서 있을 수도. 지금은 그것밖에 생각
이 안 나는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