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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놀이(자유게시판) 스크랩 마의 백광현_정내교의 <백태의전>
고리아이 추천 0 조회 49 12.12.19 07: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요즘 MBC에서 유일하게 보는 작품이 있다면, 월화 사극 마의인데영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지영

특히나 MBC-8뉴스는 듣보지도 않아영

그럼에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사극 마의는 즐겨 감상하고 있지영

그러다가 주인공 백광현에 관한 자료가 있을 듯하여 한국고전종합DB를 찾아보니 조선 후기 중인 출신 문인으로 빈궁한 삶을 지낸 정내교鄭來僑(1681:숙종71759:영조35)가 정리한 <백태의전白太醫傳>(완암집浣巖集4)과 소론少論 완론緩論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영조 전반기 탕평책의 주역으로서 활약한 조현명趙顯命(1691:숙종171752:영조28)이 정리한 <백지사묘표白知事墓表>(귀록집歸鹿集14)가 전하고 있네영

마침 정내교의 <백태의전>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4&cp_code=cp0440&index_id=cp04400245&content_id=cp044002450001&print=Y), 조현명의 <백지사묘표>는 이창수의 홈페이지(http://www.society.or.kr/lee/tag/309)에 한글로 옮겨져 있기에, 나름 손질을 하여 원문과 함께 소개합니다영^_^))

 

정내교의 <백태의전>

태의 백광현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인조 때 태어났다. 됨됨이가 돈후하고 신중하여 동네에서 신실하기가 바보 같았다. 몸집은 크고 수염과 구레나룻이 멋지며, 눈은 부리부리하여 빛이 났다.

太醫白光炫者, 小家子也, 生於仁祖世? 爲人醇謹, 在鄕里恂恂若愚人? 身長大, 好鬚?, 目炯炯有光?

 

집이 워낙 가난하여 언제나 거친 베로 짠 철릭을 입고 망가진 초립을 썼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빌어 사람들이 아주 싫어하였고, 어린이들과 마주치거나 하면 발로 차 업신여기거나 희롱하였지만, 광현은 웃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았다.

家素貧, 常衣大布貼裏, 戴破笠? 施施行市隧閒, 從人?貸, 人多厭之, 少年或??侮戱, 光炫笑而不怒?

 

처음에는 말을 고치는 의사로 이름이 났는데, 오로지 침으로만 고쳤고, 서적에 따르지 않고, 갈수록 침술이 손에 더욱 익어 사람의 부스럼을 시험 삼아 고쳤는데, 이따금 뛰어난 효과를 보아, 드디어 사람을 고치는 일만 전념하였다.

初善醫馬, 專用鍼療之? 不本方書, 久益手熟, 以試人腫瘡, 往往有奇效, 遂專以治人爲務?

 

이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부스럼이 아주 많음을 보게 되었고, 그 앎은 더욱 정밀하여 침술이 더욱 좋아졌다. 무릇 부스럼의 독성이 심해 뿌리가 있는 경우는 옛날부터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는데, 광현이 이를 만나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나누고 찢으며, 독을 없애고 뿌리를 뽑아 죽음도 돌려 살릴 수 있었다.

以是周行閭閻, 得視人腫瘡甚多, 其知益精而鍼益善? 凡?疽毒盛有根者, 古方無治法, 而光炫遇之, 必用大鍼?裂, 疏毒拔根, 能轉死爲生?

 

처음에 침을 지나치게 강하게 쓰면 사람을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그 효능으로 살아난 이 또한 많은 까닭에 아픈 이들이 날마다 그 집 문에 모였고, 광현 또한 스스로 그 의술을 즐겼으며, 의술을 위해 힘을 썼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 의술을 써서 이름과 소문이 크게 퍼져 신의라고 불리기도 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70(현종 11) 8월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가자 받은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에 내의원에 딸리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初則用鍼過猛, 或至殺人, 然其效而活者且衆, 故病者日集其門, 而光炫亦自喜其術, 爲之益力不懈, 用此, 名聲大振? 號曰神醫?

 

숙종 초 어의로 뽑혔고(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95(숙종21) 12임금이 명하여 어의(御醫) 백광현(白光炫)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있는 곳에 보냈다. 백광현은 종기(腫氣)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奇效)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지완이 각병(脚病)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백광현을 명하여 가보게 한 것이다.”는 기사가 보인다.), 공로가 있어서 문득 벼슬이 높은 지위까지 올랐고, 여러 직분을 거치면서 현감이 되어 마을의 광영이 되었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84(숙종 10) 5월 특별히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하였다가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픈 이를 만나면, 귀천과 친소를 따지지 않았고, 불러줄 경우에는 바로 왕진하였는데, 왕진에는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능히 아픔을 고쳐 그 좋아짐을 보고 나서야 고치는 일을 그쳤다. 늙고 또 귀하다고 하여 해이하지 않고(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96(숙종 22)에 노의(老醫)라는 별명을 얻었음을 볼 때, 아마도 이 때 백광현의 나이는 환갑을 넘었으리라 여겨진다.) 단지 의술로써 할 바를 함이 아니었으니, 대개 그의 천성이 그러함이다.

肅廟初選補御醫, 有功, 輒加秩至崇品, 而歷職爲縣監, 閭里榮之? 然其遇病者, 無貴賤疏親, 有請卽往, 往必盡心極能, 見其良已然後止? 不以老且貴爲解, 非惟爲技能所使, 盖其天性然也?

 

정내교의 <백태의전> 원문_한국고전종합DB에서 얻음

 

내 나이 열다섯에 외삼촌 강 군께서 놀랄 만한 부스럼으로 앓았는데, 백 태의를 불러 이를 보게 하였더니, 고치기 힘들다고 하면서 한숨을 쉬며 이틀을 넘어 볼 수 없을 것이라 하여 급하게 장례 치를 도구를 준비하면서 밤에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는데, 밤에 되자 과연 돌아갔다.

余年十五時, 內舅姜君病唇?, 邀白太醫視之, 曰不可爲矣, 恨不前二日見之, 急治喪具, 夜必死, 至夜果然?

 

이 때 백 태의는 이미 늙었지만 신기한 의술은 오히려 온전하여 병세를 보고 삶과 죽음을 알아 채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그가 한창 때에는 어떤 집의 어떤 병을 고치는데, 신기한 효능을 보여 죽은 이를 일으켰다고도 하는데,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時白太醫已篤老而神識尙全, 能知病死生不失毫髮? 其在盛時, 至某家治某病而得神效起死云者, 非妄語也?

 

백 태의가 돌아가고 그의 아들 흥령이 가업을 이었는데, 의술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소문은 얻었으며, 제자 박순이라는 이 또한 부스럼을 고치는데 이름이 났다. 오늘날 부스럼을 나누고 찢어 고치는 법은 백 태의에서 비롯하였고, 후학이 경험한 방안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손과 다른 이에게서 배운 이들은 모두 그의 의술에 이를 수 없었으니 사람이 부스럼을 앓아 고치기 어려우면 반드시 한탄하면서. “세상에 백광현이 없구나! ! 죽음만 있을 뿐이구나!”하였다.

白太醫卒, 其子興齡嗣爲業, 粗有能聲? 弟子有朴淳者亦以治腫名? 今世?疽?裂之法, 自白太醫始, 而後學者傳爲經驗之方? 然其子孫與他人學者皆莫能及焉? 人有病疽毒難治者? 必歎曰世無白光炫? ? 死而已矣?

 

MBC 월화사극 "마의" 홍보 그림_MBC누리집에서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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