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회 재향군인의 날"국익과 안보를 대변하는 안보지킴이"~
향군은 대한민국의 굳건한 안보지킴이로서 국익과 안보를 대변하는 안보 전문단체로 거듭나고 있다.
[이하 향군보에서 발췌]
1952년 6·25전쟁의 피란지 부산에서 친목·애국·명예의 기치 아래 30만 회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현재 850만 명 회원과 본부를 비롯해 13개 시·도회, 222개 시·군·구회, 3,290개 읍·면·동회, 20개 해외지회를 갖춘 세계에서도 그 규모를 찾아보기 힘든 영향력 있는 안보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향군 주요연혁
1952. 2. 1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립(부산)
1961. 5. 8
세계향군연맹(WVF) 가입
1961. 5. 10
재향군인회법 공포(법률 제617호)
1965. 6. 8
재향군인의 날 제정(5. 8)
1992. 12. 2
주무관청 이관(국방부 → 국가보훈처)
2002 6. 19
재향군인의 날 변경(10. 8)
2009. 9. 25
제33대 박세환 회장 취임
2012. 2. 1
향군장학재단 설립
2012. 4. 6
제34대 박세환 회장 취임
2012. 9. 14
재향군인회 향군청년단 출범
2013. 3. 28
잠실 향군타워 준공
2013. 4. 23
성수타워 준공
■ 보람과 영광의 향군 역사
◆ 향군의 창설과 발전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연일 계속됨에 따라 정부는 1951년 1월 12일 제1차 명예제대를 비롯해 매월 한차례씩 명예제대 조치를 시행했고, 30여만 명의 제대군인이 발생되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향군회원들이다. 출범 62년을 맞은 현재 850만 명의 회원과 13개 시·도회, 222개 시·군·구회, 3,290개의 읍·면·동회, 20개의 해외지회를 갖춘 국내 최대의 안보단체이자 명실상부한 국가안보 제2보루로 발전했다.
◆ 재향군인회의 주요 안보활동
• 재향군인의 날 제정
‘재향군인의 날’ 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본회는 세계재향군인연맹에 가입한 5월 8일을 기념일로 제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해 승인을 받았고, 1965년에는 이 날이 법정기념일로 공포되었다. 이 기념일은 30여년간 이어져 왔으나 2000년 12월에 개최된 이사회의에서 기존의 5월 8일이 가정의 달 및 어버이날, 그리고 농번기와 중복된다는 의견이 개진되어 심층검토 끝에 1953년 국방부로부터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던 10월 8일을 재향군인의 날로 변경해 줄 것을 정부에 재건의했고, 2002년 6월 19일 대통령령 17628호에 의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울릉군 향군 초대 회장이었던 홍순칠(당시 23세, 육군상사 전역) 독도수비대장은 1953년 4월 20일 지원자 10여 명과 함께 독도에 상륙, 독도를 지키면서 일본 어선들과 10여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 후 1년 뒤인 1954년 4월 27일 정식 발대식을 열었다. 조직과 장비 편성이 완료된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 경비는 역사적 관점이나 국제법상으로 실효적 지배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 향토예비군 창설의 모체
향토예비군의 모체는 향군이다.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되던 1960년대 후반 북한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무장공비 31명을 침투시켰다. 1·21사태로 불리는 이 도발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있는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켜 향토를 지키게 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향군의 조직을 주축으로 향토예비군을 조직하고 편성했다. 이렇게 창설된 향토예비군은 1968년 10월에 발생한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으로부터 강릉무장공비침투사건에 이르기까지 각종 대침투작전에 동원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 총력안보운동 전개
1971년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고, 주한미군 2만명이 철수하는 등 한반도 안보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향군은 그해 10월에 ‘자주국방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총력안보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2월에는 ‘자주국방운동본부’를 ‘총력안보운동본부’로 개칭하고, 시·도회별로 운동본부를 설치해 안보강연을 비롯한 총력안보계몽활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1975년에는 월남을 비롯해 크메르, 라오스 등이 잇따라 적화되었고, 이에 총력안보국민협의회를 결성해 강력한 안보활동을 전개했다. 향군의 총력안보운동은 국민안보의식 제고를 통한 국가안보 체제 확립은 물론 카터 대통령이 추진한 주한미군 철수 결정을 철회하는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호국종(護國鐘)과 호국영현판독기 헌납
향군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호국영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73년 5월 8일 창립21주년을 계기로 280만 회원들의 성금으로 무게2톤, 직경 122.1cm의 호국종과 종각을 제작해 국립묘지에 기증했다. 이듬해인 1974년 10월 22일에는 영현들의 명단을 신분별, 성씨별, 계급별로 수록한 호국용사명단 판독기를 국립묘지에 기증함으로써 국립묘지 참배객들이 분묘의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 최초 전시방공호 준공
월남의 패망으로 안보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1975년, 정부는 민방위기본법을 제정하고 전국적으로 민방위대를 조직했다. 이에 향군은 1976년 6·25전쟁 발발 제26주년을 맞이해 45평 규모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전시방공호를 국내 최초로 준공했다. 이 방공호는 지근탄(至近彈) 방어는 물론 화생방 오염제독, 자가발전(自家發電)의 기능을 갖춘 것으로서 전국적으로 지하방공망을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 좌경세력 척결 안보활동
1987년을 전후한 민주화운동의 열풍은 좌경세력의 발호를 가져왔다. 이에 향군은 좌경의식의 차단과 용공세력 척결을 통해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국민 안보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좌경세력 척결 활동은 전국의 예비군, 민방위대원, 각급 단체원, 학생,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되었고, 장성회원 안보단합연수회, 좌담식 주민계도활동을 병행함으로써 좌경세력 척결의지를 드높였고, 이러한 전쟁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 해외 안보활동
향군의 최초 해외지회는 1962년 8월 7일 창설된 일본특별지회로서 올해로 창설 51주년을 맞이했다. 이 지회는 1966년 7월에 정식지회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69년에 미동부지회가 설치되었고, 1970년대에는 월남지회, 1980년대에는 중화민국지회(대만지회), 호주지회, 캐나다지회 등이 잇따라 창설되는 등 2008년까지 총 6개국 11개 지회를 창설했다. 2009년 9월 제33대 향군회장으로 취임한 박세환 회장은 ‘안보에는 국내와 해외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소신으로 해외지회 창설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2010년
6·25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2년 2월 1일, 전시(戰時)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동아극장에서 허정(許柾)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창설식을 가진 향군이 60년이 넘는 역사를 꾸려 온 것이다.
본래 향군의 설립목적은 국방부 병무행정의 집행을 보조하는 예하단체로서 예비역들이 지역 내 징병대상자와 기타 예비역 해당자를 관리해 동원체제에 만전을 기하는데 있었다.
30만 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향군은 초기의 국방부 보조역할에서 벗어나 국가안보의 제2보루라는 자부심으로 국방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국가보안법 개폐 반대활동
2000년 들어서 당시 정권은 국가보안법 개폐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향군은 국가보안법 개폐문제는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해를 초래하므로 절대로 좌시할 수 없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이와 함께 당시 집권여당인 새청년민주당의 ‘보안법개정기획단’ 의원들을 초청해 보안법개정 반대 입장을 전달하고 추진유보를 촉구했으며, 새천년민주당사를 방문해 항의했다. 2000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전국 3,477개의 읍·면·동회를 시작으로 224개 시·군·구회와 13개 시·도회, 본부 전국총회에 이르기까지 보안법 개폐 저지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 초청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가보안법 개폐 추진을 무력화시켰다.
•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기
지난 정권은 ‘민족 자존심의 문제’라며 2012년 4월 17일부로 전작권을 환수하고 한미연합사를 해체한다고 천명함으로써 애국단체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향군은 전작권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의 문제라며 전작권 전환 연기에 총력을 경주했다. 전작권 전환 연기 1천만명 서명 운동을 재추진하고 한미양국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전작권전환 연기 합의를 이끌어내는 주역이 되었다. 당시 북한이 2012년을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강성대국 완성의 해로 선포하고, 천안함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등 도발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는 점과,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 체제의 등장에 따른 극심한 혼란기에 처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전작권 전환 연기는 한반도 전쟁억제의 핵심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종북세력
척결활동
6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향군의 안보활동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에 향군은 종북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종북세력 척결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향군이 종북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종북’이라는 용어자체가 생소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향군은 성명서와 기고문을 비롯해 전국을 대상으로 향군 율곡포럼과 특별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종북세력 척결에 앞장 선 결과 지금은 국민 대부분이 종북세력 척결 대열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 희망의 새향군
이제 향군은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도록 ‘젊고 힘있는 향군 건설’을 슬로건으로 재정위기 극복을 위한 종합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향군 임직원 모두가 향군재정비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