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집단과 그 조직을 뒤좆는 형사들의 이야기는 범죄 영화에 많이 등장한 소재다. 이상기 감독의 데뷔작 [무방비 도시]에는 소매치기 조직의 구체적 일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욕망에 사로 잡혀서 비극적 파국을 맞는 다른 느와르 영화가 그렇듯이 [무방비 도시]에도 주인공을 악의 유혹으로 빠지게 하는 팜므 파탈 즉 매력적인 악녀가 등장하고, 그 악녀에게 유혹당하는 주인공의 갈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범죄 영화들은 대부분 거대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다. 거대 도시의 뒷골목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욕망을 총족시키려는 등장 인물들은, 신분 상승이나 물질적 혹은 성적 유혹 등 세속적 욕망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의 망가진 삶을 통해 삶의 허무함과 비극성을 보여주는 느와르 영화의 공식을 [무방비 도시]는 충실하게 정공법으로 따라간다,
[무방비 도시]는 좆는 자와 좆기는 자의 강렬한 선형적 구성을 기본 축으로 전개되지만, 그 두 영역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비슷한 느와르 필름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일본 원정까지 나서는 소매치기 조직의 보스 백장미(손예진 분)와 그를 좆는 조형사(김명민 분)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전과 17범의 전설적 소매치기 강만옥(김해숙 분)이 위치한다. 강만옥은 조형사의 어머니이며 백장미의 선배다. 조형사는 자신의 어머니가 전설적인 소매치기라는 것에 대해 심각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감옥에서 출소한 강만옥은 면도칼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으며 다시는 소매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물론 그녀의 결심은 형사가 된 아들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게 하려는 모정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당뇨 합병증을 앓고 있는 강만옥은 영화 전체의 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무방비 도시]가 느와르 영화의 수작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문턱에서 머문 이유는, 느와르 영화의 상투적 공식을 따라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3명에서 5명 내외로 구성된 소매치기 조직은, 사장을 정점으로 소매치기 대상을 물색하는 안테나, 주위에서 바람을 잡으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1-2명의 바람, 면도칼이나 손을 이용해서 직접 가방이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터는 기계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파는 사장인 백장미와 바람인 이원종, 기계 손용수, 안테나 최성수로 구성된 4인 조직이다. 그러나 삼성파가 영역을 넓혀 명동에서 동대문까지 장악하자 상대 조직인 동대문 쌍둥이파의 복수로 삼성파의 기계인 손용수가 손에 부상을 입는다. 강만옥이 감옥에 있는동안 영치금을 넣어주고 뒤를 돌봐주었던 백장미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달라면서 손을 씻고 가계를 운영하는 강만옥에게 부탁한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은 강만옥은 마지막이라며 명동 거리로 나서지만, 비밀리에 제보를 받은 조형사는 소매치기 조직을 섬멸하기 위해 역시 명동으로 나선다.
[무방비 도시]가 우리에게 정서적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강만옥의 존재 때문이다. 소매치기 전과 17범의 강만옥 역을 맡은 김해숙은 숏커트를 하고 어깨에 문신을 새긴 거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한국 영화에서 중년 여배우들이 일반적으로 맡게 되는 한국형 어머니의 이미지, 가령 연기자로서 김해숙 자신의 존재를 뛰어나게 보여준 [우리형]이나, [열혈남아]에서의 나문희가 보여준 캐릭터와는 다르게,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모성애를 잃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내고 있다. [무방비 도시]가 팜므 파탈 백장미와 그녀에게 이끌리는 조형사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강만옥의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사적 내러티브 전개에서 강만옥의 존재는 상징적, 혹은 부수적 위치에 머물고 만다.
극적 구조는 일반적인 느와르 필름에서 볼 수 있는 형식과 비슷하게 전개되지만, [무방비 도시]에는 소매치기 조직의 일상이 섬세하게 표출되어 있다. 백장미를 필두로 한 삼성파, 그리고 동대문 일대를 장악한 쌍동이파, 명동파 등 소매치기 세계 내의 암투도 설득력 있게 다루어져 있고, 특히 지하철이나 버스, 길거리 등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모습의 생생한 현장 묘사는, 그 사실성 만으로도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무방비 도시]의 시각적 비주얼은 완성도가 높다. 셋트로 만들어진 광역수사대의 집무실은 조형사와 오연수 반장(손병호 분)이 일하는 공간답게 차가운 회색빛의 느낌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백장미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만든 타투샵은 레드와 퍼플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크리스탈 어항이나 벽에 걸린 천수관음상 등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팜므 파탈 백장미는 이 공간에서 조형사를 유혹한다. 그러나 단 한 번 등장하는 두 사람의 정사씬은 백장미의 캐릭터가 충분히 표현될만큼 농염하지 못하다. 손예진은 조금 더 과감하게 캐릭터를 소화해야만 했다.
범죄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호기심은, 그것이 갖고 있는 비밀스러움 때문이다. 음지에서만 움직이는 범죄 조직의 내부를 고발하고, 욕망에 사로 잡힌 비극적 삶의 허무함을 드러내는 [무방비 도시]는 그러나 상투적 내러티브를 극복하지 못하고 범죄가 비주얼을 돋보이는 장식적 요소에만 머물고 만다. 소매치기 조직의 전설적 조직원을 어머니로 둔 조형사의 내면적 갈등이나, 형사인 아들과 또 자신이 평생토록 같이 일해 온 범죄조직 사이에서 갈등하는 강만옥, 그리고 이들 모두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백장미의 삼각구도가 더 펭팽하게 다루어졌다면, 훨씬 더 울림 있는 결과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