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루카 1,39-56
사람은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다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 주고는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횟수가 열다섯 번이나 됩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그렇게 자만하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거기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1610년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기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그 완성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오릅니다.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도둑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가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왜 그 그림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그림이 아니면 교황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자기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넣기 위해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점점 커감에 따라 부모의 뜻이 아기 안에 더 들어갑니다.
아이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부모의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시는 부모에게 감사해서 그분들 뜻을 따라줍니다.
그렇게 두 발로 걷고 말도하고 공부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안에서 자기 살과 피로 넣어준 그 뜻, 그 보석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피 흘리고 고생한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가리옷 유다도 지옥으로 보내면 안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넣어주시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내가 들고나오는 것이 내 피가 가장 많이 섞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해도 그분 뜻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귀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시몬과 페로’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나이 든 시몬은 감옥에 갇혀 젊은 여인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음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젊은 여인은 시몬의 딸 페로입니다.
페로는 아사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아기에게 주어야 하는 젖을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성모님을 육체적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칭송받으셔야 할 더
큰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서약한 것입니다.
그렇게 페로처럼 비난받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커다란 귀걸이를 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 영화에서는 이 소녀가 가정부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가난한 화가뿐입니다.
그 화가도 능력이 부족하여 아내 집에 얹혀삽니다.
아내와 딸, 장모님은 화가가 그 여자와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감시합니다.
소녀는 그들에게 지쳐갑니다.
그 소녀를 노리는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화가에게 돈을 대는 부자입니다.
그는 그 소녀를 그리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녀를 그리는데 화가는 아내의 진주 목걸이를 귀에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연인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임신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는 행동으로 그 화가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화가는 그 그림으로 매우 유명해집니다.
덕분에 소녀는 쫓겨나고 연인과도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몇 년 뒤 화가의 하녀가 그 소녀에게 선물을 전해옵니다.
그 진주 목걸이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영광을 그 소녀에게 돌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시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주 목걸이의 영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갑시다.
그 피 흘림이 영원한 승천과 영광의 유일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루카 1,39-56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요즘은 성모승천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했습니다.
입을 몽자에 부를 소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았기에 비로소 승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의 지향점은 하느님의 총애를 입으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불러올림을 받으셨다,
즉 구원되셨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성모 승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대사건입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가능한 일이 승천이고 구원이요, 천상 영광에의 참여입니다.”
성모 승천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신앙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과 승천이라는 풍성할 결실을 맺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면 성모님처럼 구원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 승천은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아울러 성모님이 도달한 목표는 개인만의 목표가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교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후에도 이 목표에서 빗나갈 수 없다. 마리아의 현양은 세상 종말에서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다.”
이토록 영예롭고 영광된 성모님이시지만, 그분의 삶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의 삶은 때로 기구하고 때로 혹독했습니다.
때로 삶 전체가 슬픔 덩어리요 고통 덩어리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때 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건네신 언약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은 그분의 부족하고 나약한 여종일 뿐이라는 겸손한 신원의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혼란과 무지의 상태이지만, 언젠가 그분께서 내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 오랜 인내와 기도, 의탁과 희망의 결과가 영광스러운 승천인 것입니다.
성모 승천과 관련된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의 찬미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가까이서 보며, 아들을 낳으실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칼날 같은 슬픔을 느낀 이가 자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품>
2022. 08. 15 성모 승천 대축일
루카 1,39-5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의 노래)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의 품>
늘 그 안에 있건만
쉬 느끼지 못하는
하느님의 품
무뎌진 몸과 마음을
다시 곱게 감싸는
하느님의 품
모든 사슬을 끊어내고
새로이 일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품
그 안에서 희망으로
그 안에서 앞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