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단하고 멋지네요..
살도 살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는데 갈채를 보냅니다~^^
우리모두 화이팅~!!
헤비급 레슬러에서 모델로 변신,
세계 최고 권위 파리 오뜨꾸뛰르 무대 선
김민철
“모델 되기 위해 125kg 체중을 70kg으로 줄이고,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전세계 톱디자이너들의 옷을 톱모델들이 입고 나오는 세계 최고의 패션쇼 파리 오뜨꾸뛰르는 모델이라면 누구나 한번 꼭 서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다. 여성복 패션쇼인 이곳에 남자 모델이 서기란 더더욱 하늘의 별따기. 그런데 지난 가을 우리나라 무명 남자모델이 이 무대에 오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그는 과거 체중이 125kg이나 나가던 헤비급 레슬러 출신. 레슬러에서 세계적인 패션모델로 거듭난 그의 인생역전 드라마.
모델이라면 누구나 꼭 한번 서보기를 꿈꾼다는 세계 최고의 패션쇼 파리 오뜨꾸뛰르.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톱모델들만 참여할 수 있는 이 무대에 우리나라의 한 남자 무명 모델이 올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더구나 오뜨꾸뛰르는 여성복 패션쇼여서 남자 모델이 무대에 서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내로라하는 세계 최고의 남자모델을 제치고 무대에 올라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주인공 김민철씨(27)를 만나보았다. 특히 그는 과거 체중이 125kg이나 나가던 헤비급 레슬러 출신. 그의 파격적인 변신이 궁금했다.
압구정동의 한 미용실에서 만난 그는 키 184cm, 몸무게 70kg의 잘빠진 몸매에 서글서글한 얼굴이 우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인상이다. 또한 세계적인 무대에서 세계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을 숨기거나 치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풋풋하게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좋았어요. 솔직히 씨름을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어요.”
태어날 때 몸무게가 5kg의 우량아였다는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몸집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자연스럽게 몸으로 하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당시 이준희, 이만기, 이봉걸로 인해 한창 인기가 높던 씨름에 흠뻑 빠져 학교 씨름부에 들어갈 정도였다.
전관왕을 차지한 전도유망한 레슬링 선수 출신
하지만 그의 목표는 금세 바뀌었다. 84년 LA올림픽에서 김원기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을 보고 레슬링으로 진로를 바꾼 것. 씨름과는 비교도 안되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슬링은 위험한 고난도 기술과 체력을 요하는 운동이어서 초등학교에는 레슬링부가 없었다. 결국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레슬링을 시작했다.
“6학년 때 키가 170cm, 몸무게가 80kg이었어요. 학교에서 제일 크고 덩치도 좋았죠. 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헤비급으로 뛰었는데, 레슬링을 시작한지 두달 만에 3위에 입상하고, 2학년 때부터는 학교 에이스로 뛰었어요. 3학년 때는 전국대회 5관왕을 하기도 했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학년 때 다리를 크게 다쳐 혈관과 근육파열로 3차례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년 쉬고 2학년 때 다시 출전한 첫 대회에서부터 우승을 하기 시작, 그해 전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실업·국가대표 선수들까지 모두 출전하는 최고 대회인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 레슬링계의 기대주로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체중은 110kg.
주니어 대표, 88꿈나무, 국가대표 상비군, 국가대표까지 레슬링 분야에서는 엘리트 코스를 걷던 그였지만 마음속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통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몰라준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국가대표 상비군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같은 방을 사용하던 다른 종목 선수에게 매일같이 팬레터와 선물이 쇄도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더욱 초라해보였다.
“레슬링을 잘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칭찬 한번 더 받으려고, 주목 한번 더 받으려고 남들 쉴 때 업어치기 연습이라도 한번 더 하는 등 피나는 연습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레슬링이 정말 비인기종목이라는 걸 절감했어요. 그게 너무 힘들었죠. 운동선수는 누구나 관객들에게 박수갈채 받으며 경기하는 게 바람인데 레슬링은 입장료가 없어도 찾는 사람이 없어요. 텅 빈 관중석에서 우리끼리 시합을 하는 거예요. 그런 비인기의 설움이 싫었어요.”
그에게 인생의 변화가 온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이은 다리부상으로 운동을 쉬면서 숙소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레슬링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종목을 바꾸기엔 이미 늦었잖아요. 그래서 우울해하던 참이었는데, 텔레비전에서 패션쇼 하는 것이 나오더군요. 그 사람들이 마냥 부러웠어요. 그때 문득 ‘나도 살 빼고 멋있어지자. 그러면 나도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살을 빼게 된 계기였어요.”
부상으로 쉬는 동안 125kg까지 불어났던 몸무게를 그해 겨울 넉달 만에 90kg으로 감량했다. 그리고 무작정 서울의 모델학원을 찾아갔다. 제 딴에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어 찾아간 학원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모델들보다 실물로 본 모델들은 훨씬 더 날씬하고 세련되었다. 그들에 비하면 90kg의 그의 몸매는 모델로 나서기에는 여전히 뚱뚱한 슈퍼헤비급이었다.
“모델을 하겠다니까 관계자들이 절 심란하다는 듯 바라보더군요. 저에게 열심히 하라는 격려보다는 모델 일은 힘들다는 말을 더 많이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모델보다는 성격파 배우나 코미디언이 되는 길을 알아보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가족과 친구, 주위 사람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네가 무슨 모델이냐”는 핀잔만 돌아왔고, 새로 진학한 영남대 레슬링부 감독은 “정신 차리고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충고했다. 그나마 그를 이해해준 사람은 단 한사람, 동네 형으로 평소 알고지내던 남자 모델 구필우씨뿐이었다. 구씨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모델의 기본인 워킹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레슬링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대학 2학년 때 미들급으로 출전, 또다시 전관왕을 차지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방학 때나 부상으로 운동을 쉴 때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모델학원이나 연기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학교에서 알면 큰일날 일이었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모델로 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계속 체중을 줄여나갔어요. 밥굶기를 밥먹듯이 했죠. 그러면서 격한 운동을 한다는 게 무척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미 운동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라 목숨을 걸고 감량을 한 거죠. 나중엔 75kg까지 줄었어요.”
말이 쉽지 비만인 사람이 10kg 정도를 줄이는 데에도 피나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더구나 운동선수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기에 쉽게 빠질 군살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체중을 줄이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역시 체중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특히 부상으로 운동을 조금만 쉬면 금세 살이 다시 찌곤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었어요. 아무리 좋은 의사에게 진료받고, 운동교습을 받고, 시설 좋은 곳에 다녀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마음자세가 없으면 실패하더라고요.”
사진 몇장과 출연한 뮤직비디오 한 개 들고 떠난 프랑스
처음엔 그도 급하게 살을 빼고 싶은 마음에 무조건 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뺀 살은 금방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결국 살을 빼는 방법은 운동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운동도 살이 찌는 운동이 있고, 살이 빠지는 운동이 있다고 한다. 살을 빼기 위해서는 역기 등 무거운 기구를 들면 안되고 유산소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그는 자전거를 사서 가까운 거리는 타고 다니고, 멀리 갈 일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절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물론 가까운 층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오르내렸다. 또한 앉아 있을 때에도 배에 힘을 줘 칼로리를 소비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다시 살이 찌는 최대의 요인은 음식. 그 역시 술자리가 다이어트의 가장 큰 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편하게 쉬고 있어도 살이 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말이면 산에 올랐다. 술자리도 피하고 긴장이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살을 빼기 위해 사우나를 많이 이용하면서 그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고 한다.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10분 정도 있으면 몸에 열이 나면서 땀이 나기 시작해요. 모공이 많이 열리는 거죠. 그렇게 하고 나서 사우나실로 들어가야지, 그러지 않고 처음부터 곧장 들어가면 힘만 들고 살이 잘 안 빠져요. 사우나실에서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30분 정도 계속 스트레칭이나 체조를 해요. 그럼 더 효과가 있어요. 나와서는 다시 뜨거운 물에서 반신욕을 합니다. 그러면 땀이 쫙 흘러요. 그리고 욕탕을 나와서 천천히 걸으면서 땀을 말려요. 흔히 사우나실에서 나오자마자 찬물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모공이 수축돼 나오던 땀도 안나오고, 더구나 모공이 수축되면서 물이 흡수돼 체중감량에 손해예요.”
이제 그에게 살을 빼는 것은 전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도 75kg 정도를 유지하다가 방송출연을 할 때나 무대에 설 때면 5kg 정도는 쉽게 감량한다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레슬링을 완전히 그만둔 그는 스포츠센터에서 코치로 일하면서 계속 모델학원이나 연기학원에 다니면서 모델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런다고 쉽게 모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력서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단 한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그쪽으로 완전히 발을 내디딜 자신이 없었어요.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은 거죠. 부모님도 반대가 심했고요. 그렇게 하다 또 몇년의 시간이 흐른 거죠. 그러다 지난해 3월 회사에 사표를 냈어요. 나중에 후회하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지금 도전해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6개월 동안 준비한 끝에 3월에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죠.”
패션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는 그가 대학교 때부터 꿈꿔온 곳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파리의 무대에 선 것은 박둘선씨밖에 없고, 더더욱 남자 모델은 한명도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정말 파리의 무대에 서리라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번 도전해 보자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프랑스에 가기 위해 6개월 동안 개인교사를 두고 영어레슨을 받았어요. 학교 다닐 때 운동만 하느라 공부를 안했으니 더 힘들었죠. 화장실에서도 영어단어를 외울 정도로 피나게 했어요. 사람들이 파리에 가면서 왜 프랑스어를 안 배우고 영어를 배웠냐고 하는데, 패션분야는 다국적 사람들이 모이니까 영어가 공통어로 쓰여요. 물론 불어를 모르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만 저는 그곳에 살러간 것이 아니라 모델이 되려고 가는 것이니까 패션계의 언어를 배우는 게 당연한 것이죠.”
무작정 떠난 파리. 물론 처음부터 시련만 닥쳐왔다. 무작정 사진 몇장과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찍은 뮤직비디오 테이프 한개를 들고 에이전시를 돌아다녔다. 낯선 땅이라 혼자 에이전시 사무실을 찾기가 힘들어 파리 시내에 있는 20곳의 에이전시를 도는데 한달이 걸렸다. 다 돌고나면 다시 처음부터 또 돌았다. 한번이라도 더 얼굴을 비춰야 기억이라도 해줄 것 같아서였다.
“동양모델에 대한 편견이 많아요. 심지어 한국이란 나라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으니 더 힘들었죠. 무시하고, 거의 미개인 취급을 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도록 패션쇼 무대에 서보기는커녕 그에게 관심을 갖는 에이전시조차 없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외로움과 막막함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세계 톱모델들도 무료로 서고 싶어 할 만큼 꿈의 무대인 오뜨꾸뛰르
그러던중 한 디자이너로부터 연락이 왔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김지해씨(42)였다. 그녀는 김대중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양국대통령이 함께 하는 만찬에 초대된 재불 한인인사 10명에 들 정도로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디자이너다. 그녀는 자신이 오뜨꾸뛰르에서 여행을 주제로 한 패션을 선보일 예정인데, 여행에서 만난 남자로 출연해 달라고 제의했다. 그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는데, 이미지가 자신의 패션 컨셉트와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오뜨꾸뛰르 무대에 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고급 여성맞춤복만을 선보이는 곳이라 남자모델이 서는 경우는 없거든요. 당시 전체 모델을 통틀어서뿐 아니라 역사상 그 무대에 남자가 선 것은 제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남자가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기에 기획단계에서부터 주최측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김지해씨는 자신의 컨셉트에서 남자모델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주최측도 수긍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오뜨꾸뛰르에 남자모델이 선다는 소문이 나자 기라성 같은 남자 톱모델들이 자신이 서겠다며 달려들었다. 그만큼 오뜨꾸뛰르에 서는 것은 영광이었다.
톱모델은 자신들이 디자이너를 골라 무대에 설 정도로 콧대가 높다. 모델비도 만만찮다. 그런 톱모델들이 무료로 무대에 서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오뜨꾸뛰르 무대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다. 디자이너로서도 톱모델이 무대에 서면 자신의 옷이 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테니까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그래서 김씨는 톱모델에 밀려 자신이 무대에 서지 못하는 줄 알았다. 전에도 몇차례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런 식으로 밀려 무대에 오르지 못한 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잠을 못 잘 정도로 힘들었어요. 오뜨꾸뛰르에 선다는 생각에, 천국에 온것 같은 기분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1주일쯤 지나 지해씨가 부르더군요.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부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러더군요. ‘솔직히 나 갈등 많이 했다. 하지만 이건 너를 생각하고 만든 옷이다. 이 옷의 주인은 너다’라고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세계 최고의 여성복 패션쇼에 남자가, 그것도 미지의 동양남자가 무대에 선다는 것이 알려지자 프랑스의 언론을 비롯, 전 세계에서 주목을 했다. 자연히 대우도 달라졌다. 전에는 만나주지도 않던 에이전시들이 앞다퉈 전속계약을 하자고 달려들었다. 자신의 패션쇼에 모델로 출연해달라는 섭외도 들어왔다.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그의 체형을 파리의 디자이너들이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제이스 닐슨, 타이거 등 세계적인 톱모델들이 속해 있는 ‘베스트 원’이라는 에이전시와 계약,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모델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이제 3월이면 그는 유럽의 무대에 서기 위해 출국할 예정이다. 또한 한국에서도 그의 가치를 깨닫고 패션쇼 모델섭외가 들어오는 것은 물론, 영화와 드라마에서 출연제의가 쇄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야무진 각오를 밝힌다.
“반짝 스타가 아니라 오래 남을 수 있는 연예인으로 기록되고 싶어요. 세계무대에서도 한국의 긍지를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관심 있게 지켜봐 주세요.”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혼자의 노력만으로 세계적인 무대에 선 그의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도전정신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만남이었다.
첫댓글 정말 감동적이네요 덕분에 너무 잘읽었어요 감사해요 꾸뻑^^
소름이 돋을정도로 멋지네요 ,, 엄청난 의욕이 솓구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