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은 내 가슴에 있다.
숨 이병창
나는 킬리만자로 산에서 주워 온 작은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킬리만자로는 과거의 산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산으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곤 한다. 하나의 사물은 그 사물과 연관된 사연들을 담고 있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등산을 간다고 하면 그에게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달라고 부탁하라는 말이 있다. 그는 무심히 지나갔을 등산로에서 만나는 수많은 돌멩이 중에 어떤 돌을 주워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부탁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이치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같은 차종의 자동차들이 가는 곳마다 눈에 띄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자동차의 절반은 그 차종 같은 착시에 빠진다고 한다. 하나의 관심은 세상을 보는 눈을 달라지게 한다.
데카그램은 무심히 살아왔던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매력을 가지고 있다. 데카그램을 공부한다는 것은 내가 나와 연애를 하는 것과 같고 내가 나를 탐사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이 어떤 하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의식의 확장이 일어나고 그 대상과 연관된 영역으로 전이해 간다. 또한 그 과정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지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밖의 현상세계에 대한 공부는 지식의 차원에 머무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지혜는 인간 안에 이미 주어진 힘과 기쁨과 사랑을 만나게 하고 자유를 누리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데카그램은 완전한 자유와 지혜와 하늘의 온전함을 찾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피아노에 여러 단계의 옥타브가 있듯이 인간의 의식에도 여러 차원의 의식단계가 있다. 차원상승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실은 나의 가슴 속에 영혼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육체로서의 몸 나만 나로 알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영적 자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힘을 부여한 권위들에 눌려 살게 되고 무수히 작동하는 세 개의 몸 나를 자신으로 알고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두려움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한정 짓는 속박에서 에고와 관념은 만들어지고 있으며 삶에서 경험하고 배우는 모든 것들이 자기 자신의 한정에 불과했음을 깨닫지 않는 한 인간에게 자유와 평화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자신 안의 얼 나와 얼 나 안의 성령을 알아야만 한다.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들이 파라오의 속박에서 탈출하듯이 스스로 만든 속박으로부터 탈출이 있어야 하고 내 안의 접혀진 날개를 펴서 영혼의 하늘로 상승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슴은 하나님의 불이 임재하는 성소이며 성령의 빛으로 충만해야할 공간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가? 가짜 나들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걱정인가, 아니면 충만한 사랑인가? 나의 현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지혜와 평화를 일깨워 주는 의식의 고양된 경지로 상승되고 있는가? 아니면 추락하고 있는가?
인간의식의 상승은 뫔의 가벼움과 부드러움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영적 상태로 가려면 진동과 파장이 높아지고 가속화 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다루는 데 있어 내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고 있으며 불필요한 힘을 주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정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가벼움이야말로 에고의 사슬이 끊어지지 시작한 증거이며 삶의 생동감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저질화 되고 냉냉하게 얼어붙은 에너지가 풀려지면서 내가 나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뒤로 향 한다’는 뜻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거꾸로 가는 길이며 근원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것은 또한 영혼으로의 귀향, 내가 온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그 집은 지금 내 가슴에 있다. 나에서 나에게로 가는 길, 그 길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 가짜 ‘나’들은 죽어야만 한다. 생각이 나이고 느낌이 나이고 어떤 행동 하나를 나로 아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이며 보호막이라고 믿어 왔던 껍질을 벗어 내버리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첫 번 아담이후부터 매 세대마다 입력되어 온 에고의 기억들은 우리의 체세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 신념의 무게와 압력은 성격이라는 이름의 집착으로 우리를 강력하게 붙잡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었듯이 우리 인류는 새로운 존재와 삶으로 거듭 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물질이 아니라 빛이다. 체세포의 구성 성분이 모두 빛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이 붙잡고 있는 신념들이 모두 환상이었음을 진리로 깨닫게 될 때 인간은 누구든지 영생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구원의 존재가 될 것이다.
첫댓글 데카그램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