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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그(Hamburg) - (1)
함부르크 행 열차를 타려고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내가 타야할 열차 객실의 번호를 찾아 기웃거리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열차표를 보자고 하였다. 이 녀석이 내 표를 보더니 열차의 계단에 올라서면서 내 가방을 당겨주었다. 또 뒤에 있던 녀석이 나에게 밀착하는 것 같았다. 순간 어깨에 엇갈려 맨 작은 가방이 뒤로 당기는 느낌이 들어 가방을 앞으로 확 잡아당겼다. 뒤에 붙었던 놈의 손이 가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실 어깨에 걸쳐 옆으로 맨 작은 가방에는 소설책 한권과 휴지 그리고 코펜하겐 씨티 맵밖에 없었지만 기분이 나빴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순간적으로 "You! picking pocket?"라면서 크게 소리쳤다. 앞에 있던 놈이 나를 확 밀치면서 뛰어내리더니 세 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금방 경찰이 왔었다.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까 자기들끼리만 뭐라고 얘기하였다. 그리고 내 차표를 보더니 타야 할 객실을 가리켜주면서 차를 타라고 손짓하였다. 유럽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북유럽에서 그런 소매치기들을 만났다.
문제의 그 작은 가방은 프라하의 어느 매장에서 체코 화페 가격을 잘 뗘져보지 않고 카드로 샀다. 나중에 귀국해서 통장에서 빠져나간 가방의 가격을 보았더니 30만원이 넘었다. 소매치기들이 내 비싼 가방을 보고 그 안에 귀중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열차로 두세(?) 시간 달려서 남쪽 해안의 로드비하븐(Rodbyhavn) 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배로 갈아타야 하는데 열차에서 사람들이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어서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잠시후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열차가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배 안으로 들어간 열차가 정차하자 사람들이 모두 내려서 배의 객실(선실)로 올라갔다. 선실에는 면세점도 운영하고 음식점도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심을 선실에서 해결하는 것 같았다. 나도 주머니에 남은 덴마크 돈을 털어 빵과 밀크를 사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바다를 보려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러나 발틱해(Baltic Sea)의 푸른 물결과 파란 하늘 그리고 파란 하늘에 하얀 솜털같은 구름조각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지난 번 베를린에서 코펜하겐으로 갈 때는 베를린에서 함부르크까지 열차를 타고 가서, 함부르크에서는 버스를 타고 발틱 해 연안까지 갔다. 거기서 배로 발틱해를 건너서 덴마크 남쪽 연안의 로드비하븐(Rodbyhavn) 역에서 코펜하겐까지 가는 열차로 갈아탔었다.
함부르크 중앙역에 내려서 S3를 타고 여관 (From Main StationMain Railway Station S1, S3 OR S31 [Direction Wedel/Pinneberg] to Bahnhof Altona� Exit Max-Brauer-Allee Left, across Parking Lot along Toom to Goetheallee 9-11)을 찾았다. 그런데 함부르크에서는 음식값도 비싸고 하루 여관비가 42유로로 체류비용이 만만치 않다.
함부르그는 유럽에서 가장 큰 항구로 조선과 무역이 수세기 동안 경제의 원천이 되어왔다. 독일 16개주의 하나인 함부르크는, 함부르크라는 하나의 도시가 하나의 주가 되었다. 함부르크는 아직도 중세의 자치독립의 오랜 전통을 반영한다. 함부르크는 운하망, 호수, 공원, 교외의 우아한 주택들, 격조높은 쇼핑아케이트, 소장품이 풍부한 박물관, 활기찬 문화생활 등의 특성을 지닌 도시이다. 또 비교적 외국인이 적게 살고 있지만 통과객은 많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어 세계에서 뉴욕 다음으로 많은 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는데도 번성하는 상업과 더불어 계속 우아한 예전의 모습을 간직해오고 있다. <출처 : 백과사전 브리테니커>
함부르크 시내를 관광하기 위하여 이튿날 늦은 아침에 여관이 있는 Altona에서 전철을 타고 함부르크 중심지인 Jungfern stieg에서 내렸다. 지하철 밖으로 나오니 바로 앞에 넓은 호수(빈넨알터 )가 있고 호수 중앙에는 공중으로 높이 뿜어 올리는 분수가 눈길을 끌었다. 빈넨알터의 삼면은 도시의 중후한 건물돌로 둘러싸였고 맞은편의 한 면은 기차와 자동차길과 교량이 수목과 어울렸다. 빈넨알터 호수에서 엘베강으로 연결된 아름다운 수로(운하)가 시내중심부의 우아한 건물들 사이를 흐른다.
알스터 호수 - 빈넨알스터
알스터 호수는 지금으로부터 810년전인 1190년에 인공적으로 함부르크 중앙에 만들어진 호수로서, 원래의 목적은 함부르크에서 커다란 물레방앗간을 돌리기 위한 저수지용도에 있었다. 크기는 274만 평방피트 정도이고, 1620년에 함부르크시가 요새로 재건되면서 롬바르스브뤼케, 케네뒤브뤼케 두 다리에 의해 빈넨알스터와 아우쎈알스터로 나뉘어졌다.
함부르크 시청청사
지하철 역에서 밖으로 나오자 날씨가 쌀쌀하고 비가 내렸다. 그래서 비를 피하고 몸도 녹일 겸 해서 수로(운하) 건너 광장을 낀 함부르크 시청청사로 들어갔다. 시청사 건물은 아름답고 웅장하다. 특히 내부에는 으리으리한 회랑과 고급스런 장식품 미술품이 궁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사 1층 내부는 시민공간인지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가서 쉬기도 하고 장식품들을 감상하거나 각종 게시물들을 돌아볼수 있게 하였다. 시청 건물 안마당에 들어가보면 크고 아름다운 나체의 남녀동상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휘기아이아 분수대도 볼 수 있다.
시청 사무실로 오르는 계단
시청 청사 일층 홀 내부 - 시민들의 휴식공간??
시청청사 1층의 천정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원주(圓柱)들
시청 안뜰에 아름다운 나체의 남녀동상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휘기아이아 분수대
시청청사 안뜰에서 쳐다본 지붕의 첨탑들
비가 뜸하여 밖을 나와 St. Petri Church를 찾아갔다. 예배중이라 나는 일반 관광객을 위하여 마련된 통로를 다른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면서 둘러보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내부 장식을 돌아보았다.
St. Petri Church를 개축하기전의 옛모습의 모형을 만들어 교회 내부에 전시해 놓은 것
현제의 이 교회 모습은 이보다 더 웅장하게 화려하다.
교회를 나와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아트 홀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빗방을 떨어졌다. 아트홀 위쪽에 있는 낯익은 넓은 광장과 큰 건물이 궁금하여 다가갔더니 Main Railway Station이었다.
Art Hall or Gallery??
Art Hall 앞
Main Railway Station
기왕 기차역에 온 김에 암스테르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였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빈넨알스터와 아수쎈알스터로 나눠놓은 교량 롬바르스브뤼케와 케네뒤브뤼케를 건너려고 호수를 향하여 걸었다. 아우쎈알스터 주변의 풍경이 운치가 있어 볼만하다고 하여 기대하였으나 끊임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아우쎈알스터주변 관람은 포기하고, 롬바르스브뤼케 다리를 건너고 호수가를 따라서 시청 주변의 상가로 와서 상가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롬바르스브뤼케에서 바라본 빈넨알스터
롬바르스브뤼케
즐비한 아름다운 상가건물과 고급 상품 매장들이 들어 있는 건물들
거리를 거닐다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떠들썩하고 시끄러워 들어가보았더니 이런 젊은이들이 .....
깨끗한 수로(운하)와 즐비하게 늘어선 각양각색의 멋진 건물들이 운치가 돋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수로변의 건물들은 낭하처럼 수로를 따라 통로가 나 있는데 건물과 건물의통로가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통로에서 비도 맞지 않고 건물밖의 수로(운하)를 바라보면서 걸어갈 수가 있었다.
?
? 유명한 사람 같은데 뭐하던 사람인지?
함부르크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어 전통적인 건물이 몇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들 가운데 장크트미하엘리스 교회 부근에 있는 옛건축물 크라머암츠보눙겐이 유명하다고 하여 찾아갔다.
이것은 좁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건축된 반목조벽돌 건물로 상점주인들 중 과부들의 주거지로 지어졌으며, 현재 이 도시에서 이런 종류의 17세기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1971~74년 말끔히 복원된 이 거리는 현제 레스토랑, 소규모 상점, 함부르크 역사박물관의 분관 등이 있는 격조 높은 뒷골목을 이루고 있다. 비는 추적거리고 저 멀리 옆으로 넘어질듯한 이상한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먼곳에 있는 그 기우뚱한 건축물에 시선이 끌려 정작 목적지로 찾아온 크라머암츠눙겐은 사진에 담지 않고 장크트미하엘리스 교회으로 갔다.
장크트미하엘리스 교회
함부르크의 5대 교회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크트미하엘리스 교회는 화려한 내부장식을 자랑하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1906년 화재로 파괴되었다가 재건축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 다시 폐허가 된 뒤 전후에 복원되었다.
장크트미하엘리스 교회의 화려한 내부
이 건물이 내 시선을 붇잡았다..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한참 바라보기만 하였다.
장크트미하엘리스 교회의 맞은 편에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는 교회 건물이 나를 오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급히 찾아갔다. St. Nikolai Memorial이었다. 아직도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터가 가동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우뚝 선 건물은 St. Nikolai Memorial
이 건물은 2차대전 때 파괴되어 첨탑이 있는 부분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교회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되어 전체적으로 폐허가 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높이 솟은 첨탑부분에 전망대를 설치고 전망대를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Nikolai Memorial은 전쟁이란 괴물이 할퀴고 간 참화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6.25사변 직후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종로거리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폭격을 받아 그야말로 잿더미였다. 그런 상태가 차츰 복구되어가긴 했지만 4.19의거가 일어날 때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잿더미로 버려진 채 전쟁이 남긴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내 보인 곳이 많았었다. 어린 시절 6.25를 겪었던 세대로서 Nikolai Memorial가 시사하는 바가 가슴을 울렸다.
엘리베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첨탑건물에 사방 지주를 세워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 전망대에 오르니 흔들림이 심하였다. 몸이 이리저리 쏠릴 정도로 흔들렸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몸을 지탱하기 조차 어려웠고 어지럽기도 하였다. 겁이 났다. 이 건물이 바람에 어떻게 되기 전에 빨리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 극히 제한되었다. 전망대의 좁은 공간을 사방으로 돌면서 시내를 조망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은 심하게 흔들려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과 시내의 모습을 좀더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엇갈렸다. 나 이외의 몇 사람들도 올라와 있었다. 그 사람들은 겁이 나지 않는지 태연히 전망대 한쪽에 앉아서 시내를 내려다보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저렇게도 태평할 수 있을까? 그들을 보니 나는 너무 소심하였다.
한편 세계에서 과학이 최고로 발달한 독일인데 이 건물의 안전를 헤아리지도 않고 이런 전망대를 운영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심되었다. 그래도 바람이 계속 흔들어서 불안한 마음이 쉬 가지 않았다. 좀 억울하지만 나보다 미리 올라온 사람들보다 일찍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St. Nikolai Mimorial
St. Nikolai Mimorial
St. Nikolai Mimorial 의 전망대 올라가는 엘리베터 안에서
St. Nikolai Mimorial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함부르크 시내모습
St. Nikolai Mimorial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함부르크 시내모습
St. Nikolai Mimorial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함부르크 시내모습
St. Nikolai Mimorial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함부르크 시내모습
St. Nikolai Mimorial
전망대를 내려와서 전철역(Saadt-Haus-Brucke)으로 가는 길에 휘황찬란한 상점들이 즐비하였다. 그중에 주방기구상이 많이 보였다. 특히 주방에서 쓰는 식칼들이 눈길을 끌었다. 하나 살까하고 들어가서 값을 물었더니 엄청 비싸다. 그냥 구경만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Alrona 역에 내려서 한 식당에 들어갔다. 종업원 가운데 한국 여인이 있었다. 음악대학에 다니는데 이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전문적 소양을 기르고 쌓기 위해 외국에 나와서 힘들고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애쓰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늙은 동포를 만났다고 나에게 특별히 신경 써 주었던 그 학생에게 고마웠던 마음 무어라 표현할 길 없다. 열심히 노력하여 목적한 바를 꼭 성취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