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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조선왕조 27대 519년 개괄
이장희 추천 0 조회 81 14.10.30 15: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대 태조 1392-1398(1335-1408)



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해서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으며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부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으며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

1388년 2월,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이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5월, 장마로 인해 물이 급격히 불어난 상황이 발생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고려의 몰락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

이후 이성계일파는 조민수가 세운 아홉살의 창을 폐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세웠으며 또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라로 방출되었으며 이로써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성계는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실로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성계의 조선개국, 그 시작과 끝

처음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 째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 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 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제2대 정종 1398-1400(1357-1419)

태조의 8남5녀 중 신의왕후 한씨의(6남2녀)의 2남



이성계의 세자책봉과 화근의 시작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 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 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 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 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종의 등극 그리고 퇴위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 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제3대 태종 1400-1418(1367-1422)

태조의 8남5녀 중 신의왕후 한씨의(6남2녀)의 5남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 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제의 자리를 확보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태종의 등극

세제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 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종의 업적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의 정비로 고려잔재 완전청산.

2. 군사 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의 안정.

3.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

4.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김.

5.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둠.

6. 과거 제도에서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

7.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체,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킴.

8. 문묘 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함.

9.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켜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임

10.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킴.

11.왜인범죄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

12.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김.

13.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킴.

14.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


민무구형제의 옥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 사건이다.


옥발생 후의 진행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 - 공신녹권을 빼앗음 - 직첩을 수취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에 유배시킴 - 1413년 자진 -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 - 옥사 종결


육조직계제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 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 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거북선 개발에 대한 추측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 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전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 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 따 설치되었다.


한양으로의 천도내력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 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 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4대 세종 1418-1450(1397-1450)

태종의 12남17녀 중 원경왕후 민씨(4남4녀)의 3남



세종이 등극한 배경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녕을 세자로서 신뢰하지 않았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 때 황희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태종이 일방적으로 세자를 폐한 것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때문일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4대왕 세종이다.


폐세자 사건과 관련한 야사에의 실록 기록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 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굴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의 업적

집현전을 설치해 그곳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 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 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 을 이루어냈다. 이와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흘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 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정인지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제5대 문종 1450-1452(1414-1452)

세종의 18남4녀 중 소헌왕후 심씨(8남2녀)의 1남



문종의 등극 배경

왕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1421년으로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그리고 즉위 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생을 한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18년)으로 향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드디어 왕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줄 것을 결심했다. 말하자면 왕세자의 섭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종은 실질적으로 상왕으로 물러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우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고,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첨사원은 고려 때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던 첨사부 제도를 본딴 것으로 이는 충렬왕 이후(1276년)에 폐지된 제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이 제도를 임시로 도입한 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자 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 편, 모든 관원을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문종의 성품및 업적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문종은 언관의 언론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 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 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 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단종과 경혜공주를, 사측 양씨에게서 경숙옹주를 얻었다. 그의 능은 현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으며, 현덕왕후도 이 곳에 함께 묻혀 있다.




제6대 단종 1452-1455(1441-1457)

문종의 1남2녀 중 현덕왕후 김씨(1남1녀)의 1남



단종의 탄생과 세손으로의 책봉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 왕자를 분만하게 되었는데, 난산이라 간신히 아이를 낳긴 했 지만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다. 태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윈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 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 된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왕위찬탈의 조짐과 왕의 죽음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 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렀고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 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 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계유정난으로 고명 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 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 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난다.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 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가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계유정난의 배경과 후세의 평가

백관이 말하기를, 의정부가 있는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 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대군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수양은 자청해서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만약 의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 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 허를 찌르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 고는 거사를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단종 복위 운동

세조 즉위 4개월 만에 발생한 단종복위운동은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

계획: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

결과와 그 이유: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 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두 번째 단종 복위 운동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일으킨다.

동기와 결말: 그는 종친 자격으로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양 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형제들 중 세조의 등극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정조 때 사육신을 비롯해서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의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에 올랐다.



제7대 세조 1455-1468(1417-1468)

세종의 18남4녀 중 소헌왕후 심씨(8남2녀)의 2남



왕위찬탈의 조짐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 구도는 왕족의 대표격인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 대신파로 나뉘었다. 당시 왕위를 노릴 만한 힘을 가졌던 인물은 수양과 안평 두 사람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세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길러오다가 문종 때에 와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 없는 단종이 들어서자 이를 노골화한 것이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는 대단해서 고명대신들이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해서 고명대신들은 수양을 견제하고자 비교적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안평과 손을 잡고 수양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자 결국 수양은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수양은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눈을 따돌리고자 이 거사를 단행하기 6개월 전에 명나라의 사은사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명나라를 다녀온 다음 곧바로 이 거사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거사가 바로 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났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김종서를 살해하고 나서 그 길로 입궐하여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이미 작성된 '생살부' 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왕으로 등극한 수양

그는 어린 시절에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 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곧 조선 제7대 왕 세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의 치세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회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또한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 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과 정모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았다.

또한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또한 1460년에는 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고 호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한 법전인 호전을 복구했으며, 이듬해인 1461년 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 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 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 난 이 반란으로 한 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정 안정책에도 소흘하지 않았다. 우선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또 한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기강을 바로잡았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 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측근 중심의 정치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일례로 계유정난의 공신이기도 하고 변방의 안정에 공이 많았던 양정이 세조의 퇴위를 희망하다 불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 반면, 또 한 명의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을 살해케 했는데도 순종을 잘 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주고 끝내기도 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 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 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 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 정치를 폈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 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 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원상제의 도입

1468년에 탄생한 이 제도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 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이다.


그 외의 일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는 왕자 시절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즉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 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8대 예종 1468-1469(1450-1469)

세조의 4남1녀 중 정희왕후 윤씨(2남1녀)의 2남



예종의 즉위

예종은 1450년 태생으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 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원상제도

원상제도는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 원에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예종의 짧은 치세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 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월에는 각 도에 있는 둔 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제9대 성종 1469-1494(1457-1494)

덕종(추존1438-1457) + 소혜왕후 한씨(2남1녀)의 2남

덕종은 세조의 4남1녀 중 정희왕후 윤씨(2남1녀)의 1남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결탁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 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구성군 유배 배경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구성군을 지목하게 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 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성종1년)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초의 왕권이 불안정하였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 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성종의 성장 과정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로 추존)의 둘 째아들 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 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였는데도 그는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에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자을산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열 한살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1469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열 세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정희왕후의 섭정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우선 성종 즉위 직후인 1469년 12월에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통치의 총체적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작업 을 완료했고, 2품 이상의 관원이 도성 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조정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 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 편 외촌 6촌 이내에는 결 혼을 금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 이행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였으며,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간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리대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개에서 235개로 줄였다. 각 도에 잠실을 하 나씩 설치해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심게하였다.


사림정치의 기반조성

성종은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 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 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 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 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도학정치의 기틀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 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같은 도학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향현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간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태평성대의 다른 면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 준다.


성종의 업적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 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 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 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경국대전의 완성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 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 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구성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등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 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 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 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성종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 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 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 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 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23년)에 착수하여 15 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 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 1년(광해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 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 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 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넓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 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같은 모양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 있고 동 쪽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쪽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또한 내용 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 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 하다. 여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 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 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 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 후 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 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에 대한 세조의 원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고대 사 관련 사서에 탈락된 것이 많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이미 골격이 형성된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삼국사절요'는 원래 신숙주가 거의 완성했으나 그가 미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노사신을 주축으로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시킨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 연결시키려 했던 것 으로 짐작되며, 이 속에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세조가 중점을 두었던 상고사류들을 참고자료에서 제외시킨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 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잡힌 것이지만 세조가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 편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 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 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을 내세워 어 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에서는 유년칭원법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선 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흘히 한 행정이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이 심해졌다. 또한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신라 등의 역 사적 위치를 높이고, 반면에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유교적, 사대적 역사관은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여 조선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세조의 의도를 매몰시키고 말았다. 이에 반해 신숙주 주도 하에 만든 '삼국사절요'에는 낭만적, 신화적 서술 체가 남아 있어 그나마 세조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1484년 서거정이 주도 하여 찬진된 '동국통감'은 편자들이 훈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명분론에 입각한 사서는 아니었을 것으 로 판단된다. 하지만 성종과 사림 세력에 의해 개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1485년판 '동국통감'은 엄격 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세조 및 그를 보좌하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벽책을 간 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사림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역 할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훈신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국통감'의 기초는 훈신들이 확립한 것이므로 비록 여기에 명분론 중심의 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 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때까지 조정 세력의 대립적인 양상 으로 역사관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의 역사 서술의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외에도 신용개 등에 의해 편찬된 것과 송상기 등에 의해 편찬된 것이 있 는데, 이 세 가지중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 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 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 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 에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단 1편의 작품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 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부터 이색, 권근 등 이 책의 편찬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 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이들 이외에 승려 29명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서 도합 500 명에 육박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 중에 1편만 실린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편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장이다. 문장을 종류별로 구분하면 조칙, 축문, 첩 등 의례성이 강한 문장이 1,130여 편인데 특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 한 분야만 460여 편에 이른다. 문장의 선택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량문, 재사,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 지배층 의 이념이 철저한 유교주의에 입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의 선정 기준에 내용은 포함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최충헌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시문이 많이 실려 있기도 하고, 또 승려의 비 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문선'은 철저히 지배층의 시문만을 망라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의 문 학 자료를 나름대로 책 한 권에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자료는 중요한 문화물로 인식되고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 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서는 음조를 60가지로 나눈 60조도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의 높이를 한정짓는 오성도설이나 연향에 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 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 독특한 일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2권은 아악진설도설과 속악진설도설을 설명 한 것으로 당시 사용되던 제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3권은 당악과 속악을 설명하고 있고, 4권 에서는 성조 대의 당악을 일괄시킨 당악정재도의를 설명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 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권에는 당부악기도 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 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 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향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 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 복도설은 악공들의 관복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9권의 악집에서 특히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로지 '악학 궤범'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총 망라한 것이며 특히 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요행히 '악학궤범'을 되찾은 덕분으로 모든 악기와 악제를 복원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제10대 연산군 1494-1506(1476-1506)

성종의 16남12녀 중 폐비윤씨(1남)의 1남



폐비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한 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나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훈구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함으로써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폐출된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성격을 나타내는 두가지 일화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 데 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사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연산의 폭정과 폐출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의 업적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학 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흥청의 내력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 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폭정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사림파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 말, 조선 초에도 간혹 쓰이긴 했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 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 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 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 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 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면 정주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 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 운동 내지는 정치 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 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 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정신에서 비롯된 이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군주의 절 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 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이 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간의 상호 견제를 통한 새로운 신권 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 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은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조선 조정을 균형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오사화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 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 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갑자사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 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 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 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 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 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 임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두쟁이었지만, 갑자사화 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제11대 중종 1506-1544(1488-1544)

성종의 16남12녀 중 정현왕후 윤씨(1남1녀)의 1남



연산군 폐출거사의 불씨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부사 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 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 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삭직 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 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 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 성공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 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개혁정치의 종말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 때부터 도학적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 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 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 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 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 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여러가지 사건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에 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 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 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국방정책▷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 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 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북방상황▷ 1512년 북방의 야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 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면▷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갔다.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했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유교적 조치에 이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조성하기도 했다.

한 때 조광조 일파 가 숙청되자 이런 양상은 주춤하는 듯 했지만, 그 뒤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 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 을 세워 유교 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 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서책이 편찬되었다. 최세진, 신용개, 이행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에는 찬집청이 설치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 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했다.


경제면▷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또한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 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 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밖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 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관천기목륜, 간의혼상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습득해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 루각을 설치해 누각에 관한 일을 보고하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 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에 영향을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조광조일파의 개혁작업

향약의 실시▷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 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 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 도 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현량과의 도입▷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 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 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 제 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 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 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일곱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 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 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이밖에도,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 여악을 폐지했으며 내 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같은 일련의 개혁 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혁의 실패와 후대의 평가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 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 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 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 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12대 인종 1544-1545(1515-1545)

중종의 9남11녀 중 장경왕후 윤씨(1남1녀)의 1남



인종의 등극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이다.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후사도 하나 남겨놓지 않고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일컬었다.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 금욕적인 생활 등이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문정왕후의 미움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그를 낳고 6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런데 문 정왕후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그와 빈궁 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불을 누가 지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는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 때마다 요행이도 그는 죽음을 면하곤 했다.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 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졸지에 화형을 당 할 지경에 처했는데, 그 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를 애타게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겐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이 불은 누군가가 꼬리에 화선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으로 들여보내 지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야 구태여 따져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범인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 고,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처리되고 말았다.


인종의 죽음에 관한 야사

인종이 앓아 누워 죽게된 것도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이 그 원인이라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갔는데, 그날 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했다. 인종은 난생 처음 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제13대 명종 1545-1567(1534-1567)

중종의 9남11녀 중 문정왕후 윤씨(1남4녀)의 1남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득세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7년(중종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소윤파의 대윤파 제거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 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 업에 착수했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 을 당시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 삼아 문 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 세력들 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 킨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시킨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 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또한 윤원형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 이 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의 악행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시키는가 하 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 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정난정의 자 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 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이량의 등장

윤원형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영입한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 역시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 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한 때는 자기 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 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 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해서 명종은 그를 한 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지만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이 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했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이 때가 1563년이었다.


사회의 혼란

문정왕후의 악행으로 임꺽정의 등장및 을묘왜변이 발생하였고 이에 중종때 임시로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하여 외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문정왕후의 죽음및 평화회복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것은 승려 보우와 윤원형 일파였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 판서에서 밀려나고, 다시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점차 질서를 되찾아갔다. 하지만 명종은 그 동안 너무 국정에 시달린 탓인지 병을 얻고 말아 문 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명종의 나이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 켰다. 이 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 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 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흉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 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번 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 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 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 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 에 세상을 떴으며, 12세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결 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 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 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 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 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 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 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 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당시의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에서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 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 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 가 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 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고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 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횅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 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 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다.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악화되었다. 조선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 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 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 왜란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제14대 선조 1567-1608(1552-1608)

덕흥대원군(추존-1530-1559) +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3남1녀중 3남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9남11녀 중 창빈 안씨(2남1녀)의 남



즉위초의 평화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 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 을 삭훈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 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을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 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했다. 사림의 분당 사태가 조정을 혼란시키자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 후 이이 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그러던 중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은 별 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 그 때 좌의 정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 을 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의 세력은 실각하게 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실각한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과 남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삭탈관직 당한 서인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 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과격파인 전자를 북인, 온건파인 후자를 남인이라 했다.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의 발발

야인들은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탕개가 주동이 된 이 반란으로 한 때 경 원부가 함락되고 부내의 관할권이 완전히 장악당하자 조정은 온성부사 신립과 첨사 신상절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다. 한 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 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이듬 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 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 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 게 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 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 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 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여 보 름 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했고, 5월 2일에는 한양을 함락시켰다. 이 후 개성, 평양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양(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을 남겨놓은 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고, 이 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1593년 4월에 한성을 수복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했지만, 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병사하 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신권정치의 구현

명종 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 행위를 선조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 적인 당파 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 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 분히 혼란상을 야기시켰고, 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선조가 구상했 던 당파 중심의 신권 정치는 근대적 정치 형태인 의회 정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붕당정치의 바른 이해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당쟁, 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 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 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 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발발 이전상황

임진왜란이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 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1, 2차를 합쳐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분로 쿠, 케이초의 역'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
'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건 도요토미는 1589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수호할 수 있 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하려는 목적은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가신들을 보내어 서로 통호할 것을 청하였다. 이 제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조는 찬탈시역한 나라의 사신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하지만 정2품 이 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의한 결과 관례대로 사신을 받기로 함에 따라 선조는 일본의 수교문을 받게 되는데, 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보서(사신의 서찰)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을 보류했다. 그리고 이듬 해 수 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마도주 가신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후 몇 번에 걸쳐 일본은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1589년 9월경에 여러 차례 논란 을 거친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해 이 결정은 다시 지연되었고, 11월 중순 쯤에 겨우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 통신정 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에는 허성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신사로 갔다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여야 했다. 서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략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 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 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전쟁설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성을 쌓는 등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 것마저 각 도에 명을 내려 중단시켰다. 이 후 선위사 오억령은 '일 본이 다음 해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지만 묵살당하고 도리어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왜인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 비게 되자 그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 축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 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때늦은 조치였다.


전쟁의 발발

조선이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인하여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전무했던 것에 비해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연 마한 병법, 무술, 축성술, 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서양에서 건너온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 일본의 20여 만 병력은 모두 아홉 개의 부대로 나뉘어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일 본의 총 병력이 30여 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 병력의 3분의 2가 조선 침략에 투입된 셈이었다. 나머지 병력 중 약 10만여 명은 도요토미의 지휘 아래 나고야에 머물러 있었으며, 3만여 명은 교토를 수비하고 있었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양을 내주고 말았다. 이 후 6월에 평양을 내주 고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했다. 조선은 전라도 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라도 지역의 수군만큼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은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완전히 차단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6월 이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가 보낸 원군으로 전세는 조금씩 역전되고 있었다. 이듬 해 2월 평양성을 회복하고,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4월에 마침내 한양을 탈환했다. 이 때 한성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강원도와 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 위쪽의 서생포에서 진주 아 래 쪽의 웅천까지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일본은 화의를 진행시키는 한편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 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편 명은 일본의 화의 제의를 일단 수용하고 심유경을 도요토미에게 보내 2, 3년간 교섭을 진행시켰다. 화의 진 행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무역허가 증명서인 감합인을 복원할 것, 조선 8 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보낼 것 등 네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잡아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명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을 내세워 명의 허락을 얻어냈다. 이에 1596년 명은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도장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분개하면서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 선 침략을 꾀하였다. 이 때문에 심유경은 명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몇 년간 지속되던 화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1597년 1월 15일 일본은 다시 15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입해왔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이 다시 침략 하자 명나라의 원군도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고 조선 땅은 또 한 번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한 때 임금이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동안 방비책을 마련한 조선군과 명군의 거센 반격 으로 일본군은 충청도를 넘지 못하다가 이듬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철군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겨우 퇴로를 열어 11월에 완전 패퇴했다. 이로써 6년 7개월간의 조. 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영향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을 거듭하던 사회가 이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가 극심해진다. 전화에 따른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어 170만 결이던 농토가 54만결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난 중에는 국가 재정 마련책의 일환으로 납속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 납속책은 소정의 곡물이나 돈을 받 고 납속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의 시행으로 임진왜란 동안 많은 향리, 서얼, 천민, 노비 등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신분에 상관 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었기에 조선 사회는 신분 제약이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져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전란 중에 조정에 불평 을 품고 내란을 획책하는 사례도 있었다. 1594년의 송유진의 난, 1596년의 이몽학의 난이 당시에 일어났던 대표적 인 반란 사건으로 일반 민중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의 소실도 엄청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 미술품 등이 없어 지거나 약탈당했다. 또 역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하지만 전란이 꼭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전란의 영향으로 그동안 소흘하게 다루어졌던 국방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타민족과의 갈등을 통해 애국심이 고취되기도 했다. 또한 병제를 재편하고 무기의 개량에 착수했 으며 병술을 개혁했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예비군인 속오군을 두 어 교관을 파견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는 종래의 주무기인 활, 창, 검 등의 무기와 총통, 완구, 화전 등의 화기 외에 난 중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일본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조총을 제조하여 실전용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편 일본도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의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 생활을 피폐해져 있었으 며,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끌고간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로 도자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약탈해간 조선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거기에다 포로로 끌고간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서적들을 가져가 일본 문화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병했던 명은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고,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그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 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은 비록 일본의 침 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이 지속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힘이 커지고 양반 중심의 정부의 힘이 약화되는 현상을 낳았다.




제15대 광해군 1608-1623(1575-1641)


선조의 14남11녀 중 공빈 김씨(2남)의 2남


세자책봉의 음모와 정철의 퇴출

1591년, 좌의정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과 세자 책봉 문제를 놓 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논의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음모가 진행되었다. 서인의 거두 정철을 궁지로 몰기 위해 동인의 중심 인물인 이산해는 은밀 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빈을 찾아가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한 뒤 인빈과 신성군 을 모함하여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인빈은 당장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인빈을 총애하고 있던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심하게 분개하며 정철을 벼르 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가 선 조의 진노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이 때 동인인 유성룡과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인 이해수, 이성 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다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의 험난한 등극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 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 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 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 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 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왕권안정에서의 피바람

그는 즉위 하자마자 우선 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 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인조반정의 명분 제공

1611년에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과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 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 다. 그리고 이듬 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서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 이 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는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 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 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 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 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 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 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민생안정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 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 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 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능양군의 반정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반 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41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폐위 그 이후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 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 지가 있었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는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 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 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 정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 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 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 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긴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 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 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 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 년 귀양생활 18년 수 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적제거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 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 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 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 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 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 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 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 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 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 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 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 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 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작업

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 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 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이 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버린다. 이 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 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 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 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대강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 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를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 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 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제16대 인조 1623-1649(1595-1649)

원종(추존1580-1619)의 4남 중  인헝왕후 구씨(3남)의 1남

원종은 선조의 14남11녀 중 인빈 김씨(4남5녀)의 3남


능양군의 무력정변의 배경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던 선조였지만 임진왜란과 그밖의 여러가지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자리에서 밀린 인빈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은 항상 불만을 갖고있었다. 후에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그녀의 소생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지목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능창군을 신경희 사건과 연루시켜 사사하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자 능창군의 맏형인 능양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던 서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에 관한 합당한 이유 세가지


첫째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셋째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왕으로 등극후의 수습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으며, 광해군 시절 정권을 독점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대북 세력 200여 명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 에 유배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작을 복구시켰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 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 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오던 중립 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대강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 자 후금군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 때 후금은 조선측에 서신을 보내 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 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군하였다. 이 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 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 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 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 척화론 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모든 일련의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이괄의 난때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기에 변방의 수비에 많은 허점이 생겼던 까닭일 것이다.


인조의 업적

1624년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 했고,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일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 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세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북관 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새로운 문화형성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 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책들이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제17대 효종 1649-1659(1619-1659)

인조의 7남1녀 중 인렬왕후 한씨(5남)의 2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모생활에서의 차이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 게 천주상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 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경험들은 반청 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게된 원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한 것은 반청 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 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 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독살 의문성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 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 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 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 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 만에 죽 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 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 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 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 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 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 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 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 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 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 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 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 외교를 주 창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 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이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 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북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김자점의 역모사건

김자점,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 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바 있으며, 이 후 김류와 제휴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 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 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 관계를 보다 강화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 인사들을 중용 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구신 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조선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문서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외교 능력에 힘입어 이 사건은 무마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아들 이익으로 하여금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리 폭 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당했다.


효종의 북벌 강화정책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 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00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남한 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였고,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강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빈약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 제도를 강화하고, 1656년에는 남방 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한양 외곽과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꾀했다. 효종은 이러한 군비 증강을 바탕으로 두 번에 걸쳐 나선 정벌을 감 행하기도 했다.(나선은 러시아를 가리킨다) 나선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 집하는 등 불법적인 탈취행위를 하였다. 그 때문에 주변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잦았으며, 나아가서는 청나라 군대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청은 누차에 걸쳐 나선인들의 국경 진입을 막았지만 그들은 점차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일삼 았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를 보내어 영고탑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총포에 번번이 당하곤 하였다. 청은 별 수 없이 조선 조총군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청은 조선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영고탑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심의 끝에 조총군 사 100명과 여타 병력 5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이것이 1654 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나선 정벌이다.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 따라 다시 조총부대 200명과 초관 및 여타 병력 60여 명을 파견해 제2차 나선 정벌 에 나섰다. 나선 정벌에 나선 청군과 조선 조총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접에서 적을 만났다. 이 때 나선 군은 10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 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이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 후에도 나선 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 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집념어린 군비 확충 작업 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쳐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 게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효종의 업적

두 번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 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 '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 '농가집성' 등의 농 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쓴 '경민편' 등을 간행하였다.


 

 

 

제18대 현종 1659-1674(1641-1674)

효종의 1남7녀 중 인선왕후 장씨(1남6녀)의 1남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되었다. 이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 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 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 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 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인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 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지으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 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 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 현종은 이 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 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의 파 장은 '현종실록'에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현종의 업적

군사적으로는 효종 대에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북벌 계획이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를 중단하는 대신 군비 증강을 위해 훈련별대를 창설하였으며, 민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 이후 꾸준히 실시해오던 대 동법을 호남 지방 전역에 확대 실시했다. 문화적으로는 인쇄 사업 육성을 위해 동철활자 10여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관측법과 역법 연구를 위해 혼천의를다시 제작케 했다. 그리고 예론 정쟁이 활발히 일어나 사회 예절이 강조됨에 따라 동성 통혼을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또한 정실이 개입 될 요인을 없애기 위해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있거나 송사를 맡거나 시험관을 맡는 것을 금지시키는 상피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제주도에 표류해 압류되어 있던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인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4년간의 억류 생활을 서술한 '하멜 표류기'와 부록인 '조선국기'를 발간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되기도 했다.




제19대 숙종 1674-1720(1661-1720)

현종의 1남3녀 중 명성왕후 김씨(1남3녀)의 1남



남인중심으로의 변화

숙종은 예론 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 켜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 세력의 유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 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숙종의 남인견제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 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김석주는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은 이른바 '삼복의 변'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롯한 대 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남인 세력 축출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장희빈의 득세와 남인의 정권독점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 데, 서인측이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 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 은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 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장희빈의 강등과 갑술환국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 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 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무고의 옥과 노론의 대거진출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에 발생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 가 있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 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 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 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그 밖의 사건들

이 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정한 연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1711년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 로 소론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원래 '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 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이라 하고 주희 이 후 여러 학자들의 사례에 관한 예절을 나누어 모아 '류'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는데 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 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 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 론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 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 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 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와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숙종의 업적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 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 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 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 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 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전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 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 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 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숙종의 용사출척권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 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 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 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 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시켰 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 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 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노론과 소론의 성립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 세력과 이를 관망하던 세력으로 분리되었 다. 공신 세력을 공서 또는 훈서라고 했고 관망파를 청서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훈서파의 영수는 정사공신 김류였 으며 청서파의 거두는 김상헌이었다. 훈서와 청서로 갈린 두 파는 다시 훈서는 노서, 청서는 소서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서인 세력은 인조 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과 김자점을 당수로 하는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도 사림의 청의 를 주장하는 사류(사림)들이 중심이 된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되어 서인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다시 둘로 갈라서고 말았는데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다.


분당의 계기

1680년에 발생한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기름 천막 )남용 사건과 서인 김석주, 김익훈 등에 의하여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 사건(삼복의 변)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이후 서인은 남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놓고 일대 지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1683년 서인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는데, 한태동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오히려 김익훈을 탄핵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이 탄핵 상소에 반박하며 소장파와 대립하였고 특히 송시열은 제 자 윤증과 사적인 감정까지 좋지 않아 분파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인은 노장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소장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이리하 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 노, 소론에 속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고 한편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 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에 속하였던 서인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국). 이 때 노론 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도 대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갑술옥사로 남인이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앙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관련하 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면서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을 운영해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대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 상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이었다. 하지만 영조 대 중반에 집권당이던 노론은 장헌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진다. 벽파는 영 조편에 서서 장헌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 무리였고 시파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동정하는 무리로 이루 어졌다. 이 때 세력이 약했던 소론은 시파에 가담했다. 이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는데, 영조 대에는 벽파가 우세하였으나 정조 대에는 시파가 우세 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의 딸 영조 계비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라 다시 벽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순조1년(1801년)에 일어나는 신유사옥을 계기로 시파와 이에 동조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노론 독주시대가 전개된다.




제20대 경종 1720-1724(1688-1724)

숙종의 3남6녀 중 희빈 장씨(2남)의 1남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 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 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종의 즉위와 소론정권의 부흥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 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 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 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 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노론의 타격과 신임사화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단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 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 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 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 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 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 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경종의 작은 업적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제21대 영조 1724-1776(1694-1776)

숙종의 3남6녀 중 숙빈최씨(3남)의 2남



임인옥사와 연잉군의 자구책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 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 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 죄하여 축출시켰다. 이 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 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이 수족 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 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당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 왕후 김씨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대비는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을사처분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정미환국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 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 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 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 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영조의 쌍거호대

즉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 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 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 궤도 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사도세자 사건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 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 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 장을 담을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 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영조의 업적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 술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 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 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 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 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 탈세 를 방지했다. 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이정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 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 한 제도였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 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 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 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 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이같은 국방 정책은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 구축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 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 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 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를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인쇄하여 각 도에 배포했다. 이 회에 '경국대전'을 보수한 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 '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1754년의 '천의소감' 1757년의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주윤음' 등과 1765년의 '해동악장', '여지 도서'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 사전인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등이 있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장필람' 그리고 '어제경 세문답', '백행원' 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 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 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제22대 정조 1776-1800(1752-1800)

장조(추존1735-1762)의 5남3녀 중 헌경왕후 홍씨(2남2녀)의 2남

장조는 영조의 2남12녀 중 영빈 이씨(1남6녀)의 1남



'세도'의 유래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 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 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 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홍국영의 몰락과 정조의 계책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 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에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 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 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고의로 홍국영 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규장각의 발전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 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 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 에 상관 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 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갈 수 있었다.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하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왕 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 화(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신해박해와 벽파의 기세

전라도 진신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 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 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 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 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 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조의 업적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 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오던 문물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 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 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 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 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 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제23대 순조 1800-1834(1790-1834)

정조의 2남2녀 중 수빈 박씨(1남1녀)의 1남



천주교 탄압의 서곡

순조는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 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 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의 두가지 이유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 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 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오가작통법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 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식의 법.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 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 장을 열게 된다. 후 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 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 혁 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 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 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년 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됐다.


순조대의 세도정치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 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 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 도 정권을 만들어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재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이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천주교 박해의 배경

군신 관계와 상하 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 원리는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 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 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변천사와 폐단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 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 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 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 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제24대 헌종 1834-1849(1827-1849)

문조(추존-1809-1830)의 1남 중 신정왕후 조씨의 1남

문조는 순조의 2남3녀 중 순원왕후 김씨(2남3녀)의 1남


헌종대의 사회상황

헌종 대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 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 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 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 화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 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 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 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 조씨 일문 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 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켰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이양선의 출몰과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 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 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 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 문서가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 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등 국 내외적인 위기가 조성된 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화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제25대 철종 1849-1863(1831-1863)

진계대원군(1785-1841)의 3남 중 용성부대부인 엄씨(1남)의 1남

진계대원군은 장조(추존)의 5남3녀 중 숙빈 임씨(2남)의 1남 은언군(3남)의 3남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한 철종의 즉위 배경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 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 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민진용의 옥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 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철종의 대민 노력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 간에 대여해주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 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 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 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 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삼정의 문란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 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 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 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 기 때문에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을 감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양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 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 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진주민란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 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 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 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 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 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 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 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 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 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 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 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류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 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 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 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 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 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 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제26대 고종 1863-1907(1852-1919)

흥성대원군의 3남2녀 중 여흥부대부인 민씨(2남2녀)의 2남

흥성대원군은 장조(추존)의 5남3녀 중 숙빈 임씨(2남)의 2남 은신군(?-1771)의 양자

남연군(1788-1836 인조의 3남 인평대군 6세손 병원의 2남)+여흥민씨(4남)의 4남



고종이 왕위에 오른 배경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력 구도를 깨트 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 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 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 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 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 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대원군의 정책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 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대원군의 실정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 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병인박해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 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병인양요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셔먼호 사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


신미양요

미국은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 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 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 사건 '으로 조. 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 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일본과의 수교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 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 일 수호협약이 체결되면 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개혁파와 위정척사파와의 격돌로 인한 자주권 손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을미사변의 발생

당시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선 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 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대한제국의 탄생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 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 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계속되는 고종의 위기와 을사보호조약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 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 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 일 협약을 강요했 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 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 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 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 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되었을 뿐만 아 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 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제27대 순종 1907-1910(1874-1926)

고종의 10남4녀 중 명성황후 민씨(5남1녀)의 3남


조선의 멸망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 이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 각부의 장관을 일본이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내정 간섭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 재정 부족을 이유로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1909년 7월에는 기유 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갔다. 이처럼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든 뒤 이토 총독이 자국으로 돌아가고 소네 총독을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 총독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화 계획은 더욱 강화된다. 일제는 1909년 7월 기유각서의 각의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킨 뒤 러시아와 사전에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때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포살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 력 강점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일제는 이를 위해 친일 세력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 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다는 논리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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