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독서 아카데미 300회 기념 모임에 초대받았다. 회장이 전화했는데 받지 못했다. 뒤이어 온 메시지를 보고서야 전화를 놓친 사실을 알았다.
어제, 10월 20일. 비가 많이 내렸다. 모임 장소는 부산 온천장. 정년퇴직 후 처음으로 밤에 찾아가는 온천장 나들이였다. 그것도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길. 비 내리는 밤의 온천장 골목은 비 내리는 산골 길뫼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같은 비인데도 도심의 비는 산골의 비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산 독서 아카데미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은 2000년 10월, 열세 번째 모임 때였다. 그날 읽은 책은 서동욱의 『자아와 타자』. 그렇게 모임에 나가 책을 읽다가 2013년 정년퇴직을 전후해 악양, 지리산 산기슭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부산의 독서 모임에는 나가기 어려워졌다. 서울의 수필 모임에도 못 나가게 된 것도 또 마찬가지.
이번 모임에서 『삼백 번의 만남 그리고』라는 제목의 300회 기념 자료집도 받았다. 독서 모임 300회의 역사를 화보와 짧은 글로 엮은 책이었다. 내 사진도 여러 장 실려 있었다. 한때 그 자리에 앉아 함께 책을 읽었던 흔적이 독서 아카데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는 게 흐뭇했다.
나의 부산 독서 아카데미 시절은 결코 짧지않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내가 스스로 골라 읽지 않았을 책들을 여럿 만났다. 자기 관심 분야 밖의 책을 일부러 찾아 읽기란 쉽지 않다. 독서 모임은 혼자라면 좀처럼 펼치지 않았을 책을 함께 읽게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의 바깥을 넓혀주기도 한다.
어젯밤 모임 후 부산 집에서 다음 카페 「부산 독서 아카데미」에 모처럼 들어갔다. 이거 내가 만들고 운영했으며 아직도 카페지기로 되어 있다. 처음 독서회에 갔을 때 「난장판」이라는 이름의 사이버 공간이 있었다. 이거 독립 도메인이 아니고 동아대학교 서버에 딸린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어떤 사정으로(독서회 사정이 아닌) 더 운영하기는 어렵게 되어서 다음 카페로 자리를 옮긴 거였다. 옛집에 온 기분이었다. 길뫼, 겨울참새 등 내 이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지기를 양도해야 하는데.
산기슭에 살다 보니 밤이면 컨테이너 서재의 창문 방충망에 달라붙은 하루살이를 자주 본다. 이튿날 아침이면 죽은 그것들이 창틀에 수북이 쌓여 있다. 또 밭둑에는 개미집이 서너 군데 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개미는 골칫거리다. 개미들은 쉴 새 없이 굴을 드나든다. 그 행렬이 길다. 한 마리가 지나가고 나면 또 한 마리가 뒤따른다. 어디론가 먹이를 나르고, 무언가를 물고 가고, 또 다른 무언가를 물고 온다.
책을 펼쳐 글자를 들여다보다 보면 문득 새카만 개미들의 행렬이 글자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죽은 하루살이들을 흰 종이 위에 한 줄씩 늘어놓으면 그것도 글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작은 흔적들이 모여 무언가를 이루는 모양이 글자의 생김새와 닮았다는 생각이다.
글자란 참 묘하다. 방충망에 달라붙었다가 죽어 까맣게 흔적을 남긴 하루살이나 줄지어 오가는 개미들처럼, 글자도 따지고 보면 종이 위에 찍힌 작은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흔적들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이야기와 삶이 담기는가. 누군가는 글자 몇 개로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한 권의 책으로 한 시대를 증언한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의 생각도 글자 속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책을 펼친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요즘 나는 내가 만든 책을 주로 읽는다. 또 다른 책을 만들기 위해 원고를 들여다보는 날도 많다. 남이 쓴 책보다 내 글을 더 자주 읽는 생활이 된 셈이다.
그러나 내 관심의 울타리 밖에 있는 책들, 혼자서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을 책들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해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안에 없던 길을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부산에서 함께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나를 어디까지 데려왔는지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그때 읽은 책들과 그 책을 사이에 두고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00회라는 숫자 앞에서, 한 권의 책을 읽는 일이 한 사람의 생애에 남기는 자국을 생각한다.
첫댓글 쉽지 않은 발걸음 해주셔서 300회 기념모임이 더욱 훈훈~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사랑합니다~
카페지기로 쭉 남아주시길 ... 잘 읽었습니다 ^^
회장님, 총무님, 조사(祖師)님 그리고 회원님들, 따뜻한 환대에서 받은 감동이 큽니다. 이 카페를 혼탁시킬가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여기에, 내가 드물게나마 요즈음 읽은 책 이야기나 사는 얘기를 가끔 올려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다 앗! 싶어 알라딘에서 찾아 보고 전자책으로 우선 한권 다운 받아 읽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