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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분 출발
부산발 코니 아일랜드호에 몸을 싣고 제주로 떠났다. 2월의 內海는 벌써 밤이었고 항구를 뒤덮은 휘황한 불빛은 엘튼존의 "candle in the wind"를 떠올렸다. 데림추처럼 어색한 술자리를 겉돌다 자리에 눕자 바다 깊은 곳으로부터 규칙적인 기관소리가 심박동과 엇박자를 이루며 전해졌다. 염려했던 배멀미는 없었다. 소요에 익숙해질 무렵 수면제 한알 입에 털어 넣고 잠을 청했다. 겨울 바다보다 깊은 어둠이 의식의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시반에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새벽 바다는 아이들의 웃음처럼 편안했다. 이른 선상 조식을 하고 6시 반 하선했다.
한라산을 등반하다 보면 수종의 천이만큼 수평과 수직의 구분 또한 명료하다. 진달래 대피소와 삼각봉 대피소를 기점으로 풍경을 향한 프레임의 방향이 일순 바뀌어 버린다. 나는 이 나라 숲 중에서 성판악의 겨울 숲을 제일 사랑한다. 특히 삼나무 숲 구간을 사랑한다. 흰눈을 신앙처럼 머리에 인 높고 긴 나무터널에 들어서면 고딕풍의 성당에 들어선듯 종교적 경건함을 느낀다. 정결한 새벽의 숲이다. 이 고요한 수목들 사이에서 내가 구하고자하는것은 긍휼이 아니라 破邪(파사)의 자비이다. 새벽을 따라 걸으며 한발 한발 邪心을 깨뜨리며 걷는 포행. 성판악 길은 다듬이질을 하듯 눈밭을 즈려 밟으며 나아가는 긴 수행길이기에 언제나 진중하다.
아침이 깨우는 숲. 우듬지마다에 말간 아침 햇살이 걸려있다. 발그라니 상기된 겨울 숲을 걷는 동안 내 마음도 재빨리 상기된다. 아련한 추억처럼 가지마다 뜻밖의 생명이 숨쉰다. 얼어버린 나목들 사이에서 오히려 생명의 신선함을 느낀다.
세상의 여백은 투명하였다. 질료가 되는 그 투명한 공간이 흰 눈들로 가득 메워졌다. 실존하지 않는 신기루의 환상이 숲을 걷는 내내 따라다녔다. 신비를 즐긴다. 거친 마티에르의 질감이 손 가까이에서 느껴진다. 평화와 긴장 단순하기에 더 아름답다. 한폭의 그림같다.
선이 보인다. 수직의 선이 보인다. 생명의 초록에 신선함을 입힌 선명한 원색의 무게를 절집 기둥처럼 삼나무 굵은 줄기들이 꿋꿋이 받치고 있다. 아름다움과 존재를 알리는 근본들이 원근의 켜를 이루며 삼투된다. 숲이 생명으로 가득하다. 겨울의 숲에서 생명의 원형을 탐색하는 一期一會가 얼마나 신선한가 함축적이며 고요하고 단순하며 詩的인 울림. 설명없이도 스스로 마음을 움직이는 가브리엘의 오보에와도 같다.
삼나무 숲을 잊지 마세요 오래된 책을 다시 읽을 때처럼 콕 하고 찌르는 나프탈렌과 같은 추억을. 그 사랑 잊지마세요. 세상 어디든 마무리 하지 못한 사랑 있기 마련입니다. 저 숲 끝까지 걷다보면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또한 어딘가에 살아서 마주 자라는 저 나무들처럼 나를 그리워할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오름 분기점에서 비로소 산을 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성판악 입구에서 사라오름 입구까지는 그야말로 트래킹이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등반이 시작된다. 느리되 높이 오르기 이것이 늦게 달아 오르는 한라산 등반의 묘미다. 상고대를 이룬 두터운 눈의 터널이 우리를 맞는다. 설국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서두처럼 우리도 마침내 긴 숲의 터널을 빠져 나와 비로소 설국을 맞이한다.
"현의 접경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밤의 밑자락이 하얗게 서려오고있었다."
-설국에서-
프랑스국기를 연상시키는 적청백의 조화 자유 평등 형제애
가지에 달린 채 그대로 상고대가 되어버린 먼나무 열매
상고대
먼 우주의 행성처럼 백록담 정상부가 떠오를 무렵 우리는 마침내 진달래 대피소에 도달하였다. 참으로 긴 길이었다. 샹델리에의 숲이 없었다면 길은 소통이아니라 기다림의 존재였을것이다. 더없이 넓은 산중의 평원은 마침내 수직의 세상을 물려 놓고 수평의 광활함을 선보였다. 흰눈을 마음껏 받아들인 구상나무의 군락이 융단을 깔아놓은듯 부드럽게 느껴졌다. 희망과 함께 탄성이 터져나왔다. 등산에 앞서 오늘은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기록될것이다. 내 생애 언제 오늘같은 날이 다시 찾아오랴 오늘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날이 되고 말았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며 한라산 구상나무는 우리나라 토종 식물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제배되어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성가를 날렸다. 이 아름다운 구상 나무 숲이 사라져 가고있다. 한대림인 구상나무는 한반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지난 30년간 그 면적이 삼분의 일로 줄었다. 언젠가는 제주도에서 구상나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정원을 걷는듯한 이 낭만적 분위기도 사라질것이다.
눈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마 트리 속을 지나는거처럼 동화적인 분위기다. 피카소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까지 9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데 지금 나는 바로 그 동심이 되어 숲을 걷고있다. 순백의 눈빛처럼 단순해진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란 말인가. 말이 사라지고 문자가 사라진다. 卽物이 卽心이다. 物과 心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 광활한 평화와 깊은 안도감. 자제도, 자제의 대상도 없는 경계가 무너진 광대원만의 세계. 바로 그 세계다.
한라산 정상부를 향해 지그재그로 오르는 인파.
사라오름을 위시한 크고 작은 오름들
玄의 세계 너머 푸른 바다 그리고 하늘, 땅과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다 無다. 세상은 광활하다 과거는 티끌이요 미래는 바람이다. 나는 눈밭을 꼭꼭 누르며 나아가는 하얀 족적의 현실이다.
원융의 세계
세상을 설명하려는 이가 있고 그 설명이 필요없는 세상이 또한 있다. 원융의 세계가 그렇다. 하나로 통하여 구별이 없는 세계 막힘이 없는 세계. 풍경이 곧 화엄경이다. 풍랑이 거치고 잔잔해진 바다를 바라보며 해인삼매를 떠올린다. 법성계의 일구를 독송하듯 화엄의 바다를 본다. 세상이 화엄의 바다에 떠오른 연꽃처럼 맑다.
오늘을 기념하며, 정확히 말해 오늘의 티없이 맑은 하늘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적설과 흠잡을 때 없는 신들의 은총을 찬양하며 한라산 정상에서 할렐루야!!!!
정상에서
산정에 걸린 휴식을 찾으러 산에 올랐건만 산정은 온통 사람 뿐이고 사람의 배경 뒤로 비로자나불이 된 풍경들이 한없는 자비의 모습으로 걸려있다. 성판악 숲에서 파사의 일념으로 산을 올랐으니 顯正의 정법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듯하다. 더 이상 세상을 위로 쳐다볼 필요가 없다는것은 마음의 경계가 무애하다는 뜻이다. 마음이 무애하다. 세상이 일시에 열려버렸다 경계가 없다는 경지가 바로 이런것이리라.
한라산 정상에 점심을 먹었다. 늦고 헐한 점심이었으나 마음에 점하나 찍기에는 너무 호사스런 장소였다. 낯선 바람이 일었으나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사방에 맑은 빛들이 흘러내리고 빙점을 넘어선 기온에 설원은 몸을 뒤틀었다. 눈 위에 바람의 물결이 만들어진다. 신이 두드리는 인기척, 대양을 넘어 온 바람이 온몸을 평화와 감사의 기도로 가득 채웠다.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저 눈속에 붇박힌 울타리처럼 영원히 이곳에 머물다 흉칙한 긴부리의 까마귀가 되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만물이 다 감사의 기도 같았다.
산정에 올라서니 제주의 모든 풍경들이 바다를 내려다 보고있음을 알았다. 바다와 하늘이 경계가 없는 가운데 원경은 아득히 사라지고 눈부신 시간의 알갱이들이 목적없이 섬을 떠다녔다. 신생의 햇살이 가득한 가운데 언어의 멸절과 시간의 부재감이 혼란스레 밀려왔다. 나는 쫒길 필요도 없는 시간의 언저리에 놓여나 시간을 따라 산을 줄행랑치며 내려 간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질긴 힘이 자꾸 나를 뒤돌아보게 했다. 사랑하기에 이별해야 한다는 싸구려 유행가 가사도 삶에 요지부동처럼 되살아나 돌아서는 마음은 온통 아쉬움이었다.
백설이 세안용 폼처럼 덕지 덕지 붙은 나무들
광활한 구상나무 숲
장구목 능선
능선 위에 동계훈련을 하는 산악인들이 보인다.
태풍 매미로 인해 허물어진 백록담 동북 사면
이곳으로 부터 서쪽에 위치한 윗세오름까지의 구간이 단절된 까닭으로 동서 남북을 아우르는 종주길이 완성되지 못했다. 돈내코 코스는 백록담의 남벽을 휘돌아 영실, 어리목에 이르는 코스다. 언제가 이 길이 개통되면 영실에서 성판악에 이르는 멋진 종주길이 완성되리라.
천사의 날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되어 출입이 금지된 구간을 너머 백록담 아래로 향하는 길로 살금 살금 들어갔다 들어가다 새가슴이 되어 다시 돌아나왔다. 백록담 아래를 쳐다봐도 온통 흰 눈밭이다.
화가가 일찌기 없었던 색을 만들어 내듯 흰색도 결국은 빛의 산물이다. 나는 고통과 사유가 삼투되는 순백의 숲길을 내려 오며 호흡과 언어가 뒤엉켜 풍경의 뒷면에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들을 경청할 겨를이 없었다. 心境을 뛰어넘는 詩語의 모색조차 힘들고 지리멸열하였다. 규모가 아주 큰 느낌의 덩어리들이 우무질처럼 떠다녔다. 눈길에 빠져드는 발걸음처럼 답답한 마음을 조린 채 밀려드는 인파에 떠밀려 끝도없는 산길을 종종걸음 치며 내려왔다.
꽃잎처럼 꼬리를 단 사람들의 열차가 하산을 서두른다. 풍경속에는 사람도 하나의 오브제다. 오색의 선들이 주는 묘한 정감. 다가오는 시간들과 물러가는 시간들이 절묘하게 부딪히는 풍경이다.
눈은 땅에 달라붙어 완강했고 시간에 맡긴 몸은 점차 헐거워왔다. 바위산은 사태를 일으킬만큼 어마어마한 눈을 짊어지고 있건만 모험을 즐기는 이들은 전인미답의 절벽길을 가볍게 헤쳐 내려오고 있다. 저들에 비하면 내 젊은 날의 편력은 참 초라한것이다. 잘 보온된 포란기 속에서 잠을 자듯 젊음을 보낸탓일까 내가 일찌기 이루어 보지 못한 야성의 삶이 저들을 통해 깨어난다. 나는 능선 저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물구나무를 선듯 시간을 거꾸로 보고 있었다.
흰눈 위에 만들어진 길을 보며 나때문에 세상이 변한지도 쉰다섯해가 되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隨處作主(수처작주) 立處皆眞(입처개진) 즉, 가는곳마다 내가 주인이요, 서있는곳마다 다 진리이니 나는 눈밭을 걸으며 비로소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깨닫았다. 원망의 마음도 고질적인 피해의식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까닭에 다 허무일 뿐이다. 세상을 이런 의연한 마음으로 품을수 있는 여유를 나는 저 빈틈없는 설원에 상흔처럼 그어진 한줄기 길을 보고야 깨닫았다. 나로 인해 세상은 변했다.
왕관봉의 위용
삼각봉을 지나며
산자락을 따라 내려오며 두서없이 풍경 몇조각을 붙여 본다고 하여 저 깊은 산들을 속속들이 알았다고도 할수 없고 생각의 정처가 따로 있는것도 아니다. 산을 아우르는 몇마디 표현조차 내뱉지 못하는 결함을 나는 알고 있다. 오늘 나는 산을 내려온것이 아니라 산의 가랑이 사이를 겨우 비집고 내려온 셈이다. 풍경은 풍경인채로 남아도 그만이다. 붓질을 하다보면 먹물이 소매자락에 얼룩을 남기듯 내 마음 한 언저리에 한라산의 진한 그리움이 촛농처럼 얼룩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정현종 시인의 싯구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않다. 이 신바람이 있기에 유한의 운명조차 두렵지 않다.
삼각봉 대피소 지나 하산길
다시 수직의 일탈로
보들레르를 읽어야했던 그 시절에는 나는 왜 내 청춘의 아우라조차 보지 못했던 것일까? 세상은 꽃만으로 살기에 쓸쓸한것이었는지 나는 세상이 던져 준 우윳빛을 탐닉했다. 세상은 꿀처럼 달콤했고 욕망은 고요했다. 나는 그 달콤함에 취해 청춘을 거세했다.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은 어딘가? 入處가 모두 진리인데 보들레르는 이미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꽃이 없다면 꽃 너머의 세상을 보아야한다. 幻의 나비처럼 사라진 꿈을 두고 나는 메마른 길을 걸어야만했다.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기에는 길은 멀고도 아득했다. 이제 비로소 희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내가 주인인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수직의 나무들은 뫼르소의 총처럼 권태를 거부한채 하늘을 향해 막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나무들은 휘어지고 찢어진 채 겨울을 난다. 내 어린 시절 겨울도 찢어지고 터진 손등과 함께 지나갔다. 그 손등이 지금에야 생각하니 작은 숲이었던 모양이다. 봄의 희망이 숲으로 돌아오듯 봄이 오면 어느새 내 손등에 살이 돋아 맑고 부드러운 손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런 재생의 순화이 있기에 내 몸도, 숲도 건강하다. 요즘처럼 손등이 갈라질 일이 없는 상온의 환경을 살아오는동안 나는 더 병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을 내려오며
어딘들 두루 하늘 아래 아닌 곳 있으랴! 아쉬운것은 어디 나를 두고 오지 못함이다. 눈바람 온전히 맞으며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딘들 일반 일숙을 구하지 못하랴! 그 어디 있을지도 모를 아리송한 품을 그리며.
- 후 기-
남을 원망하거난 미워하는 發心의 근원은 바로 자신이다. 미망도 참회도 다 마음 속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순백의 눈길을 걸으며 나는 수도없이 내 마음을 훔쳐보았다. 자신의 마음을 훔쳐 본다는것은 눈을 비벼 세상을 더 또렷이볼려는 노력과도 흡사하다. 마음이 티없이 맑아지는 가운데 때묻지 않은 행복이 찾아왔다. 정결한 기분을 얻는것을 淸이라 한다면 이때 느끼는 행복감을 福이라 할것이다.
淸福
청복이 꼭 먼 산에있는것만은 아니다. 내 발이 닫는 곳 마다 내가 주인인 까닭에 오늘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걸었던 한걸음 한걸음을 통해 청복을 얻었다. 산행이라는 비물질적 행위를 통해 이처럼 가슴을 꽉 채우고도 남는 행복을 느낄 수있다는것이 내 생애의 큰 행운이다. 살다보면 오늘처럼 젝팟이 터지는 날이 한번쯤은 있다. 그것이 노름꾼의 짜릿한 손맛같다 하여도 좋다. 나는 다만 오늘에, 오늘 한걸음에 충실할 뿐이니까.
- 글, 그림 ; "poll"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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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애님모습이 안보이길래 햇더니 폴님산행기였군요~
설국의 나라 따스한 남쪽제주도 한라산의 막은 하얀눈이 그립습니다
언제한번 가고싶은날 떠나면 좋겠네요
사진도 산행기도 감탄!!!!!
훅! 갔습니다^^
말이 필요없습니다. ^^
하얀 순백의 세상 넘 아름답네요.. 한라의 멋진 사진과 산행기 잘감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