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광 주 의 3, 1 운 동
광복회 광주,하남 연합지회 지회장 송 재석
지금은 3동 4개 면의 작은 광주가 3,1운동 당시만 해도 16개면으로 현재 서울의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일대와 성남시 ,하남시 전역이 광주에 소속된 대 광주 였다. 광주가 서울시에 인접해 있기는 하나 산이 험준하고 경기도 20개 군 가운데 섬으로 이루어져있는 강화군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철도가 통과 하지 않은 지역인 관계로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 전달이 늦어 서울에서 가까운 위치로 봐서는 늦게 3,1운동이 시작 되었고 개화기에 근대화도 늦게 이루어져 학교, 우편, 관서, 도로 등 사회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한 인물들도 주로 한학을 수학한 유학자의 농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지역의 3.1운동은 우리나라 그 어느 지역에 못지않게 치열하고도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10여일에 걸쳐 전개된 광주지역의 3,1운동은 군청소재지나 면사무소 헌병주재소를 중심으로 연합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26일 송파지역 300명 규모의 첫 번째 시위와 27일 300명 규모의 중부면 시위 4월 6일 400명 규모의 실촌면의 마지막 시위는 면단위로 전개된 것이었지만 27일 동부면, 서부면, 구천면의 3개 면민이 모여 각 면사무소 에서 시위 한후 최종적으로 구천면 상일리 주재 헌병 주재소에서 1000여명이 집결하여 전개 한 것과 27일 돌마면 분당리 장날을 이용하여 시작된 시위가 낙생면 대왕면 지역을 순회하면서 3개면민 600여명이 연합 27-28일 까지 3일간 끈질기게 운동을 전개한 것과 28일 오포면 문형리 고산리 에서 시작되어 양벌리 주민등 1500명이 합세한 뒤 다시 경안면 주막리 에서 2000여명이 집결 광주군청에 육박하여 서울 주재 경성 헌병 본대로부터 진압부대가 지원 출동해야 할 만큼 광주지역 시위운동 중 가장 치열하고 대규모적이었던 오포 광주면의 시위운동은 인접면간에 연합적으로 전개한 대규모 운동이었다.
1, 오포면, 경안면의 연합 3,1운동
조선시대 이래 광주군의 중심지는 남한산성내의 산성리 였고 따라서 군청도 산성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제 합병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17년부터 경안면 주막리로 이전하여 광주군의 중심이 되었다. 군청이 이전함에 따라 그간 산성리에 있던 용인 헌병 분대 소속의 광주헌병 분견소도 경안면으로 옮기게 되었고 군의 중심지로서 1군 1교 정책에 따라 같은 해 광주보통학교가 설립 개교하였다. 이제 경안은 명실상부한 광주군의 정치, 행정, 교육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따라서 경안면은 광주군의 3,1운동에 있어서도 중심적 위치가 되어 경안면 에서의 3,1운동이라기 보다는 군청소재지에서의 만세운동이었다. 따라서 그 규모도 가장 크고 보다 격렬하게 전개 된 것이다.
오포면 추자리에서 1883년에 출생하신 정제신 선생은 한학을 수학하신 유학자로서 일본의 강압통치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19년 3월 28일 새벽 1시경 문형리, 김인택, 임무경등 주민 30여명과 하께 마을 뒷산에 올라가 봉기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시작으로 오전 9시경에는 유면영이가 이끄는 양벌리 주민등 600여명이 오포면사무소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리다가 11시경 1500여명으로 늘어나자 유면영의 ‘이제부터는 광주군청으로 몰려가자 ’는 선동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자 시위군중은 일제히 광주군청으로 향해 행진해 들어갔다.
이렇게 추자리를 출발한 오포면의 시위대가 오후 1시30분경 주막리에 도착하자 역리주민까지 합세 시위대는 2000여명 이상이 되었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단 군청사 앞마당에 집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한편 군수와 군청직원들을 시위대에 가담 할것과 한국독립을 승인하는 날인을 하라고 협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속에 시위군중 들은 더욱 과격해져 군청과 옆 건물인 우체국에 투석하여 수많은 유리창이 파손되었다. 이때 헌병대원이 총기로 위협하자 군중들은 군청내로 밀고 들어갔고 헌병들과 격투를 벌리고 총기를 탈취하려하자 아오야마[청산]등 진압헌병이 드디어 발포 6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이재복등 15명이 부상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니 시위군중도 해산하였다
이로써 만세시위를 사전에 계획하고 선두에서 지휘한 유면영, 정제신, 김인택 임무경등 주동적 인사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 투옥되어 이른바 보안법 제7조 및 조선 형사령 제42조 위반죄를 적용 정제신은 징역1년 김인택, 임무경은 징역8개월 유면영은 특히 시위선동의 정도가 높다고 징역 1년6개월에 처해졌다. 출옥 후 정제신은 1928년 5월 31일 계속되는 일경의 핍박과 박해에 견디다 못해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2, 중부면의 소재지인 산성리의 3,1운동
산성리에 면 소재지를 둔 중부면은 동부지역 6개리와 서남지역 6개리 등 13개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3,1운동은 서남부 지역에 속하는 단대리, 탄리, 수진리등 3개리 주민들이 주동이되어 남한산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고창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27일 오전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명이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친일파 면장을 끌어내어 곤봉으로 머리를 구타 실신케 하는 등 시위양상이 과격해지자 경비중이던 헌병의 발포로 군중은 해산되었다.
3, 오향리 실촌면 사무소의 3,1운동
실촌면 3,1운동에 대하여는 이용락의 3,1운동실록 [1969, 431-433쪽]과 광주군지[1990,356쪽]에 이병승, 문항규,오수식등이 주동이되어 3월12일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서는 경기도사 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경기도 3,1항일 독립운동사에 내용을 옮겨 적는다.
4월6일 오전 7시경 오수식은 같은 마을의 오흥운, 오세인 등 이선리 주민 50여명을 인솔 만선리에 집결하여 각지로부터 모여든 시위군중 400여명을 인솔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소재지인 오향리로 향하였다. 오후 5시경 오향리 면사무소 앞에 다다른 시위군중은 실촌면장 구연복 을 협박하여 시위대에 합세시켜 곤지암으로 행진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곤지암 헌병주재소의 헌병에게 오수식, 오흥운, 동치익, 김익수등 7명이 체포 연행되자 시위군중도 해산하였다. 검거 연행된 오수식등 7명은 곤지암 헌병 주재소에 구금되어 심한 고문과 취조를 받은 후 오수식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시말서를 쓰고 4월 24일경 석방되었으나 오수식은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는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 서대문 감옥에 송치 이감되어 징역 1년에 처해졌다.
그밖에 퇴촌면 광동리 , 남종면 분원리 에서도 만세 시위운동이 계획되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정제신, 유면영, 오수식 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이제 파아란 3월의 하늘이 열린다. 100년전 대한독립만세의 민족의 함성이 창공을 꽉 메우고 너른고을 광주벌에 항일 민중 봉기의 횃불로 가득찻던 3월의 하늘아래 광주 농민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높이 찬양하고 후대에 길이 계승하고자 광주벌 산 정상에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하게 된다.오늘에 사는 우리 시민들은 선열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독립정신을 애국정신으로 승화시켜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남북통일을 이룩하는데 총 매진하여 민족의 염원을 달성해야 할것이다.
참고문헌
경기도 항일 독립 운동사 [1995,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3,1운동 실록 [ 1969, 이용락 ]
광주군지 [ 1990, 광주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