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부
3장 노동자-도시의 또 다른 주체
-서울 봉래동, 3월22일 노동자대회
1919년 3월1일의 움직임이 거대하고 통일적이었다면, 23일의 움직임은 소규모인 동시에 산발적이었지만 끈질겼다. 3월1일 운동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학생들이 귀향을 하는 쪽을 택했고 검거 선풍 속에서 주도 세력 대부분이 구속 됐으며, 학교 간 대표 조직이 와해된 때문이다.
이 시기에 서울 시내의 긴장을 이어 갔던 것은 노동으로써 생애를 삼았던 축이다 3월 8일 용산 인쇄곡 노동자 200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9일 정오 무렵에는 동아연초주식회사 직공 500여명이 파업시위를 전개 상인들 또한 영업 거부에 돌입했다. 10일 밤에는 단성사에서 귀가하던 관객들이 만세를 부르고 12일 낮에는 도립청원서 발표가 있었으나 국지적 사건에 불과했다
표면상의 평온을 깬 것은 3월 22일 아침에 열린 노동자대회때 노동자 200명~300명 그리고 700~800명의 군중이 모인 것이 발단이었다 노동자대회,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워 시내 곳곳을 누볐으며 대중 일반에 호소하는 보다 광범위한 운동이었다.
이 대회는 도시 노동자라는 존재 일반을 문제화 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노동자는 운동을 계획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존재가 되었다.
23일밤 종로와 동대문 일대에서는 수십 수백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105명이 검거되었다 27일 밤까지 서울 시내 및 인근에서는 밤마다 시위가 이어졌다.
-밤의 노동자 대안적 봉기 주체
3월초에는 시위의 주축은 학생이었으나 점차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자비를 털어 시위를 이끌어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노동자는 종교계와의 연관이 희미했고 노동자들은 3.1운동초기부터 야간시위에 스스로 개입했다.
3월22일 노동자대회의 준비과장에는 배재고보의 정지현이 노동회보를 발간하는 등의 역할을 했고 조선약학교의 김공우가 협력했다고 하니 학생들의 역할도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도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용산에서 기관차 화부로 일하는 22세 차금봉등은 노동조합 창립을 지원했고 조선노동 총동맹을 주도하다 투옥되어 1929년에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런 노동자들의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배제할 수가 없겠다.
-3월말 서울, 투적과 횃불의 게릴라성 시위
3월22일 노동자대회 이후 3월27일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밤은 불온했다. 27일 사대문 안 서울은 물론 외곽 지역까지 수 십 수 백명 단위 군중이 횃불 지피고 만세를 불렀다.
서울 인근지역 시위는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도봉동 상봉동 동쪽으로는 상일동 남쪽으로는 양재동 그리고 양주와 파주와 일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에서 각가 수십명에서 수백명 규모의 군중이 밤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날 밤을 절정으로 시위가 주춤해졌는데 진압은 폭력화 됐고 군대도 증원되었다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시내는 또 다시 고요해졌다. 특이한 점은 3월말 4월초 경기 충청 강원 일원의 봉화 횃불 시위가 본격화 되었다고 한다. 안산군에서만 50여개소 2500명이 횃불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노동의 레짐’의 변화와 8시간 노동제
조선인들이 돌립 승인을 기대했던 파리평화회의 본외의가 폐막된 것은 1919년 6월28일. 조선을 포함해 아시아 아프리카 어쩐 민족의 독립도 논의되지 않았고 일본이 제안한 인종차별철폐안도 결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파리평화회의는 기념할 만한 성취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베르사이유평화조약 13편이 ‘노동편’이다. 노동조합권.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를 명문화한 이 조항을 19세기 후반 점점 가열돼 온 유럽 노동운동이 획득해낸 성과로써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의 노동시장을 크게 변화시켰다.
3.1운동 후 세계적으로 노동의 레짐이 변동하는 가운데 그것이 조선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을지는 의문이다. 1917년 기준 농림업 인구가 85.1퍼센트인데 비해 광공업 인구는 2퍼센트에 불과했다. 1919년을 기준으로 공장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예외적 특별한 상황에 불과했으므로 8시간 노동제 등 국제적 노동조건의 변화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채 옛관습대로 노동을 계속해야 했다. 공장노동자들은 12시간 미만 일하고 일년에 100일을 공휴일을 갖는데 비해 농민들은 평균14시간 일하면서도 20일 남짓 휴시하는데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왔던 배경이다( 여기서 잠깐만, 공장노동자라도 과연 1년에 100일을 공휴일로 갖었을까?)
-삼베로 머리띠를 두른 자들, 광산.농업 노동자
서울 외 지역 즉 황해도 비쓰비시제철소에서도 3월3일 첫만세 시위가 있었다. 노동자 200명이 합류 3월 27일에는 중남 직산 금광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미국인이 경영하던 직산 금광에는 무려 1만명 안팎의 광군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 중 200여명이 양대리 경찰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시위하다 총탄에 맞아 5명의 인명피해가 났었다고 한다. 소설가 이기영의 증언에 의하면 광산노동자들이 내세운 것은 임금 인상과 처우개선 요청이었지만 회사 측은 헌병의 협조를 얻어 무력 진압을 시도 하는등 대립이 컸었다 이 때의 노동쟁의가 일어난 것은 일본 미가정책에 의해 쌀값이 폭등하면서 생활상 곤란이 심해졌던 때이다.
-3.1운동의 주체와 한국 사회주의
학생과 노동자는 근대 조시가 낳은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대표적인 존재다 식민지 조선은 농업 인구가 절대다수였으나 농민들의 조직화 방식은 도시적 존재와 달랐다 농학농민운동 당시 그랬던 것처럼 농민은 농민군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뭉쳤다 사라지는 익명의 대중이 될 수는 없었다.
3.1운동의 시위자들은 직업군은 구두직공 양복직공 연초회사직공 정미소인부 등에서부터 상점이나 음식점종업원, 관공 임시고용인 등을 망라한다. 대공장 노동자의 전형적 상과 달랐다. 3.1운동 전후의 노동쟁의는 개별 사업주와의 충돌이라기보다 식민권력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표상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식민권력이 쟁의에 빈번하게 개입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동시장의 성격상 중개를 넘어 문제를 추궁할 수 밖에 없었던 때문이다.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확산되고 있었고 재러시아 한인 중 상당수가 적군에 가담하고 러시아 지역에서 한인사회당이 창당 되는 등, 3.1운동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났다는 것이다. 결과로부터 거꾸로 소급해 생각하자면 그렇듯 한국 사회주의의 첫 장면에 3.1운동을 두려는 경향은 당연해 보인다 박헌영을 위시하여 김단야. 이승엽. 주세죽 등 후일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인물 중 상당수가 3.1운동으로 사회적 경력을 시작했으며 3.1운동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에 있어서조차 사회주의 활동가 중 다수가 3.1운동의 후예들이었으니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섹에가 평화와 토지에 대한 요구가 드높았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그러했다. 사회주의는 1910년대중반부터 아나키즘 생디칼리즘등 다양한 사상과 더불어 조선청년들 사이에도 소개되기 시작했고 해외로 떠난 조선인들 중에서는 러시아혁명과 볼셰비키의 활약상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조선에서는 윌슨이냐 레닌이냐의 선택은 그저 막연한 쟁점이었다.
4장 여성(민족과 자아)
-아산보통학교 교사, 15세 박경순
1919년 봄 경순은 만으로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소녀라고 해야 옳을 나이에 갓 여학교를 졸업한
보통학교 교사에 재직 중이었다. 3.1운동 소식을 들었으나 교사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웃 마을 여학생 유관순의 소식을 매일신보를 통해서 들었을 때 충격은 컸다. 이후 박경순은 교사 노릇을 그만두고 모교에 편입 학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으나 이혼을 하고 또 재혼을 하면서 4명의 자녀를 키운다 교편을 다시 잡고 소설가 박화성으로 유관순에 관한 전기소설 [타오르는 별을 집필한다. 유관순을 보통사람이 아닌 진짜 영웅이 될 위인으로 묘사한다.
-서울 대정권번 기생,21세 정금죽
기생 수업을 시작한 것은 8세 때였다 기예를 배우러 다니면서 제법 솜씨가 있어서 가야금과 소리에 빼어났으며 여가에는 영화 보고 소설 읽기를 즐겼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남자 이상으로 활발하고 용감스러운 모습을 보고 조선에 유명한 여장부가 될까 하는 마음이 일었다. 말을 탈 때는 곧잘 남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으며 두어군데 명문재가의 소실 노릇을 하기도 했다. 3.1운동 때 여러 지방 도시에서 기생 시위가 일어날 때도 서울 기생들은 집단행동을 벌이지 앟았다 그러나 진주 수원 안성 해주 통영등 여러 지역에서 시위에 가담했다. 패물 팔아 마련한 상복 입고 집신 신고 태극 수건까지 두른 채 만세를 불렀다. 위생검사에 항의했고 혈서를 썼으며 시위 군중에게 마실 물을 제공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여학생들과 감방생활을 함께한 수원 기생 김향화처럼 오래 기억되는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삼엄한 경계속에서 집합적 궐기가 어려워서 기생 개개인이 3.1운동에 접촉하는 일은 어려웠겠지만 개인적으로 시위행렬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정금죽이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은 3.1운동 직후다 그녀는 현해를 건너면서 정칠성으로 이름도 바꾸고 사회에 점차 눈을 뜨게 되면서 활동가요 연설가로 거듭났다. 귀국하여 근우회를 조직하고 신간회에서 활동했다. 일본을 오가며 연설을 할 정도로 열렬한 활동을 했다. 해방기 정치활동이라든가 월북 후 활약하지만 숙청된다
현계옥은 망명후 의열단에 가입했고 강향란은 배화여학교와 정칙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더 자유로운 정신으로 3.1운동으로써 활약하였다. 이 당시 기생이란 신분이 재조정을 통과하게 되었던 때이지만 신여성으로서 새로운 사회성을 존재 방식으로 선택했다.
-개성북부교회 전도사 39세 어윤희
개성은 3.1운동 이전 서울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3월1일 당일 선언식 선언서 배포를 의뢰했던 여섯 개 지역 중 하나다. 그러나 개성 유지들은 주저했다. 3.1운동 선언서가 자칫 빛도 보지 못할 상황에서 어윤희가 선듯 자신이 책임지고 선언서를 배포하겠노라 했다. 다른 여성들도 뒤따랐다. 어린 보통학교 생도의 도움으로 선언서를 가가호호 돌렸고 개성 시내 호수돈 여학교 및 미리홈여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선언식을 치렀다. 덕분에 개성에서의 독립선언식은 잘 진행이 되었다. 어윤희는 훗날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대한의군부를 후원하고 신간회와 근우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3.1운동 당시의 삶을 이어갔다.
-미친 누이 칼 휘두른 백정 아낙들
경상북도 영천읍 장터에서 홍종현이라는 농민이 혼자 준비하고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써서 독립기를 만들었고 태극기도 장만해서 만세를 부르다 순찰에게 끌려갔다. 그 만세소리를 듣고 그 순간 스물네살 김정희가 홀로 독립기를 흰 비단으로 만들고 한글과 한자를 섞어 대한독립만세를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썼다고 한다 오전 11시결 홀로 노상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됐다고 한다. 그녀는 재판정에서 정신병 운운하는 말이 나오자 내 정신은 이상이 없으며 너희가 미친 사람처럼 우리를 압박한다고 반박을 했다고 한다. 1919년 5월 재감인원을 기준으로 할 때 기소된 여성은 총 212인이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50대주봉산은 자신의 왼손 무명지를 베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마련하여 홀로 만세 부르다 헌병소에 들어갔다. 진주에서는 기생 노동자 걸인 시위가 있었을 때 백정 아낙들도 나섰다. 고기창고에서 쓰는 칼을 들고 나와 휘두르며 대항하다가 체포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백정 숫자는 3만 5000여명에 달했으며 백정아낙들의 시위가 있었던 진주는 몇 년 후 백정 해방운동의 발상지가 된다.
-여성이 정치와 조우할 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세계사적 사건이지만 발생 당시만 해도 그 힘이 어디를 향할는지 불분명했다 왕당파가 재결집하고 그 군대가 강화되어 8월에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겠노라 선서했던 국왕은 10월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비준을 유보하겠노라 선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한 무리 여성들이 베르사이유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은 상인들 성매매여성은 물론 여장 부랑자들까지 포함된 구성이었다. 마치 3.1운동 중 진주의 백정 아낙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엌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처음에는 빵을 달라고 시작했으나 체제 개혁에 대한 요구로 급전 베프사이유에 도착해 여섯명의 매표가 국왕을 접견한 데 이어 마침내 베르사이유궁전으로 쳐들어가 왕실과 국민의회를 파리로 귀환시키는 데 이른다 오늘날 10월의 행진 베르사이유로의 행진이라고 불리운다.
한 세기가 넘게 흘러 3.1운동과 같은 시기 1919년 3월 이집트에서도 여성들은 세상을 바꾸어내고 있었다. 마치 민족대표가 최초의 추동력을 제공한 것처럼 이집트에서는 와포드당 즉 대표당이 첫동력을 제공했단 미국 위른 대통령에게 도립청원서를 보내고 파리형화회의에의 대표 파견을 결의한 행동 양식도 비슷했다. 그리고 독립선언 직후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됐든 대표당 지도자들은 사건의 최조 단계에서 즉 1919년 3월 8일에 영국 식민권력에 의해 말타섬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이집트 전역은 이들의 석방 및 이집트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로 달아오른다 3월9일 카이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300명 이상이 체포된데 이어 이튿날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더 크고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그 열기는 북부 내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여성들만의 시위가 두 차례 열렸고 이 중 후다 샤라위는 명문가 출신으로 1947년 사망할 때까지 이집트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20세기 초 이집트에서 여성들은 정치 변동의 주체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혁신했다 . 여성참정권과 가족 내 평등을 요구했으며 살해하고 살해당하고 단두대에도 올랐다. 올랭프 드 구즈는 단두대에 오를 수 있다면 연설대에도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전개 과정에서 소수자에 빚지고도 최종적으로는 소수자에 등을 돌린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으로 귀결됐든 이집트혁명이 왕정의 복권으로 귀착됐든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요청한 새로운 미래는 거의 달성되지 않았다. 테르미도르 이후 프랑스 정부는 보수와의 길을 걸으면서 여성을 집안의 존재로 돌려놓으려 했고 명목상 독립을 성취한 수 이집트 정부는 여성의 정치적 공헌을 묵살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