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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 윤봉길 농민은 못난 사람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농민이 아니다. 못난 사람이 아닌 농민이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천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때에 비록 하루라도 농업을 아니하고 살아 본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의 첫머리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혀 농민의 나라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현대를 살펴볼 때 전 조선 인구의 10분의 8이 논에 밭에 산에 나서고 있으니, 온 세계를 통틀어 본다 하더라도 우리 조선과 같이 철저한 농업국은 다시 없습니다.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총생산 18억 원 가운데서 농산물이 13억 원을 차지하고 있어 이것 때문에 우리의 목숨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 농민의 손과 발이 가지 아니하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2천5백만 인구가 논에서 밭에서 산에서 귀중한 땀을 철철 흘리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때까지 주인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까짓 농군놈들, 촌놈들이라고 학대하고 멸시함이 정말 혹독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다 농민을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조금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주인인 농민은 도리어 헐벗고 굶주리고 불쌍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주인이 못살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못사는 법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농민이 이처럼 가난하다는 것은 전 조선이 못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농민에게 돌려야 합니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재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생산에 기대지 않는 것이 없느니만큼 농민은 세상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의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어떤 사회나 국가나 민족이나 한 덩어리로 이루어질 때는 반드시 그 가운데에 절대 다수를 차지한 계급이 그 사회나 국가나 민족의 주춧돌이 되며 기둥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볼 때에 조선의 장래는 농민의 것이 안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농민의 손으로써 농민을 본위로 한 정치와 경제와 문학과 예술과 교육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
(2) 노동야학
설립되기 시작하여 1920∼1930년대에 증가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초기의 노동야학은 1907년 옥기환(玉麒
煥)이 설립한 마산노동야학과 1908년에 서북학회에서 급수상(汲水商)들을 위하여 경성에 설립한 노동야학 등이다.
이들 노동야학 중에는 특수한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야학이 있었다. 즉, 점원조합(店員組合)이나 공
원조합 (工員組合)과 같은 조직체에서 조합원들을 위하여 실시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1921년 평양포목상조
합이 각 포목점에서 일하는 점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점원야학을 설립하였는데, 기간은 6개월간이었으며 점원 임무에 도움이
되도록 부기·경제학·상업·지리 등을 교육하였다.
그 밖에 평양의 양말공장조합, 춘천의 상업조합, 개성의 송도점원회 등 각지에서 점원이나 직공들을 위한 야학을 개설하였다.
이들 야학에서는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업무에 도움이 되는 내용의 교육을 실시하여, 조합원의 복
지를 꾀하는 동시에 업무에도 능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 여성야학
여성야학은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계몽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되었다. 일제하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정규학교에 취학하기
가 힘들었으므로 여성야학은 다른 야학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교육적 성과도 매우 컸던 것으로 평가되
고 있다. 여성야학의 학사(學舍)는 교회당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그 밖에 보통학교나 청년회관, 개인의 집 등을 사용하였다.
학생의 연령은 대개 15세 이상이었으며 학생수는 40∼50명이었다. 교과목은 산술·국어·한문·일본어·습자·가정·수신·작문 등이
었고, 영어·위생·지리·이학·주산·역사·아동심리·요리·재봉·그림 등을 가르친 곳도 있었다.
1910년 대구에서 부인을 대상으로 설립된 야학교.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면서 지방도시에서도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하
는 단체와 학교가 활발히 설립되었는데, 1909년 대구에서 여자교육회를 발기, 조직한 바 있는 김화수(金和秀)가 주간에 공부
하기 어려운 부인을 위하여 이 학교를 설립하였다
.
교사(校舍)는 대구사립달서여학교(大邱私立達西女學校)를 빌려 사용하였다. 이는 대구사립달서여학교가 재정난에 봉착했을
때 김화수가 여자교육회를 조직, 100여 회원으로부터 거둔 의연금을 이 학교에 기부찬성(寄附贊成)한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립 1개월 만에 부인학생 수는 20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이화학당의 설립이후 여성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근화여학당(덕성여중, 덕성여대 전신)이 차마리사 선생에 의해
1920년에 야학으로 시작하여 1938년에 덕성여자중고등학교로 개명, 사학으로 덕성재단이 되고 덕성여자대학교로 발전된다.
그당시 여자야학이 도시에는 상당히 많이 개설된 이유는 남녀가 함께 학습하는 것을 모두가 꺼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신
식여성 운동가에 의해 신식여성운동에 야학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4) 관립의 야학
일제강점기에는 군(郡)당국과 같은 지방행정기관에서 공립보통학교에 야학을 개설하여 일본어와 기타 교양과목을 강습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공립보통학교에서 직접 자체적으로 실시하거나 각 지방농촌진흥회에서 야학을 개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관립의 야학은 주로 일본어 보급이나 농촌진흥사업의 명목 아래 저급한 실업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운영되었다.
일본강점기 야학의 설립 및 경영
야학설립의 주체는 지방의 유지나 뜻있는 개인, 마을공동체, 기독교·천도교·천주교·불교 등의 종교단체, 여성교육단체, 청년단
체, 농민운동단체, 노동운동단체, 형평운동단체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야학은 민족실력양성운동의 성격으로 전개되었
기 때문에 설립자 및 경영자들은 민족의식이 강하였으며 대개는 집단적 설립과 경영의 형태를 취하였다.
야학을 설립한 지방유지들은 그 마을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로 부락민의 호응도가 높고 협조가 컸으므로, 그 경영은 마을
공동의 성격이 강하였다. 야학의 설립과 경영은 개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즉, 뜻있는 애국지사와 민족선각자들
이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을 설립, 경영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천도교의 조선농민사, 기독교의 기독교청년회·기독교여자청년회 등의 종교단체에서도 선교와 민중계몽의 목적으로 야학
을 설립하여 교육시설을 제공하는 등 커다란 몫을 담당하였다. 청년단체에서 설립, 경영된 야학으로는 일제강점기의 청년회가
대부분이 사업의 하나로서 야학을 경영하였는데 청년들이 스스로 교사가 되어 봉사함으로써 야학 경영이 용이하였던 것이다.
당시 청년회의 주요 활동은 주로 강연회·토론회·계몽교육사업 등이었는데, 회관을 이용하여 청년들 스스로 교사가 되어 아동을
교육함으로써 경비를 안 들이고 야학을 경영할 수 있었다. 한편 노동공제회를 비롯한 각 지방의 노동운동단체 및 농민조합·소
작인조합·농민회 등 일반 농민운동단체는 노동자와 농민의 계몽 및 그들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야학을 설립, 경영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 밖에도 각 농촌에서는 동민들이 공동으로 야학을 설립, 경영하는 사례가 많았다.
특히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지 않거나 학교까지의 통학거리가 멀리 떨어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지방에서는 교육문제가 동민
전체의 공동과제였기 때문에 개인독지가에 의해서나 동민공동으로 야학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야학 경영의 경비는 야학생이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설립자가 부담하였고 동민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경비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지들의 기부금을 받아서 경비에 보충하기도 하고, 학계(學契)를 조직하여 계의 기금으로 야학 경비를 부담하기도 하였
다. 야학은 대개 단기강습으로 되어 있으나 정규학교처럼 장기교육을 실시하여 학년제로 운영한 경우도 있어 강습기간이나 학
제는 일정하지 않았다. 당국의 인가를 받는 경우 법적으로는 1년을 기한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유지 경영은 힘든
실정이었다.
수업시간은 하루에 2∼3시간 정도였고 입학연령은 제한이 없었으며,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100명 이하의 경우가 많았다.
교사의 학력은 초등학교의 졸업자가 대부분이었고 중등학교 졸업자는 많지 않았다. 교과목은 대개 산술·국어·일본어·한문을 기
본과목으로 하여 습자·주산·지리·역사·창가 등을 교수하였고, 그 밖에 야학의 성격에 따라 필요한 과목을 적절히 교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야학은 민중계몽과 민족교육의 성격으로 발전되어 갔기 때문에 일제는 관립의 경우 외에는 온갖 방법으로 야학
을 탄압하였다. 야학에 대한 통제는 1913년에 공포된 〈사설학술강습회에 관한 건〉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야학의 설립을 도장관(道長官)의 인가제로 함으로써 사실상의 설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여도 시설미비나
강사의 자질과 사상을 구실 삼아 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
또한 도장관은 언제든지 폐쇄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며 인가된다고 하여도 1년 단위로 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합법적 인가나 장
기적 존속은 매우 힘든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야학은 주로 무인가 야학이 많았고 이에 대하여 당국은 불법이라 하
여 수시로 중지시키거나 폐쇄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의 의
일제강점기의 야학교육운동은 식민지교육정책에 따라 교육시설의 부족과 민중생활의 빈곤으로 정규학교의 취학이 어려운 시
기에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여 큰 교육적 성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민중계몽에 크게 기여하
였다. 당시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민중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 민족사적 의의는 더욱
큰 것이다.
이 야학교육으로 수많은 아동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특히 문맹자들의 계몽에 성과를 올렸으며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여성의 지위향상과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민족실력
양성에 공헌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日帝下 女子夜學(盧榮澤, 史學志 9, 1975)≪참고문헌≫ 日帝下 私設學術講習會의 實態(盧榮澤, 史叢 20, 1976)≪
참고문헌≫ 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鄭世鉉, 一志社, 1978)≪참고문헌≫ 日帝下 民衆敎育運動史(盧榮澤, 探求堂, 1979)
Ⅱ해방후의 야학
1950대 후반 ~ 1970년대
50년대 육이오 이후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배움의 대한 열망으로 등장한 천막학교 검정고시야학(검시야학) 5·16이후 재건학교 -새마을학교와 성경구락부 공민학교(초등과정), 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 고등기술학교(고등학교 과정) 등으로 제도화되는 야학의 등장으로 야학이 복잡하게 분류되고 배움의 열망에 부응하여 극빈층의 청소년을 학습케 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충분히 해 나간다. 야학으로 출발하여 학생이 많아지고 일정금의 수업료로 서울, 부산 같은 대도시의 야학들이 전수학교 혹은 고등공민학교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등포야학(영등포여상)
부산 세화여자상업전수학교 등이 그 예다. 비비에스연맹에서는 신문팔이나 구두닦이 등에게 야간에 중·고등과정을 가르치는 비비에스학교가 있었고 재건국민운동으로 박정희 정권은 지역의 고졸이상 청년들을 모아 재건국민운동위원으로 활동케 하면서 재건학교를 운영하게 하여 시·도 재건국민운동 지부에서 관리하였다. 금전적 지원은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고 국민계몽운동으로 활용되었다. 바로 우민화정책이 재건학교 설치 배경이었고 배움에 목마른 근로청소년들은 우선 학습의욕과 교복을 입고 싶어 밤에도 공부하는 재건학교에 다니게 되며 농촌에는 중학교가 없는 면소재지에 재건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한글 공부
5.16 혁명 후인 1961년 12월 한글을 배우려는 성인을 위해 재건운동본부에서 펴낸 책이다. 자모(字母). 받침. 글의 세 부분
으로 나누어, 첫 장에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과 구호가 제시되어 있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을 미화하
는 내용을 공부의 방편으로 삼는 또 다른 암흑의 면모를 한글 공부에서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에 학생운동이 학내에서 투쟁하는 한계에 부딪혀 노학연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야학이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다시 일제 때의 노동야학이 등장한다. 유신헌법 이후 야학은 공안정부로부터 유래없는 탄압을 받는다. 계급의식화와 조직화가 주된 목적인 노동야학이 등장하여 야학이 모두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재건학교가 새마을청소년학교로 바뀌며(재건국민운동본부 해체-새마을금고연합회로 개편 1975년) 내무부의 행정적 지원을 받게 되며, 새마을학교가 아닌 야학은 패쇄령을 내린다.
(비비에스는 경찰서, 바이블 스쿨은 기독교장로회 보호 하에 학습 허가됨)
1980년대
노동교육이 활성화되고 정치투쟁이나 현장투쟁을 중심으로 교육 및 조직화 사업이 이루어지며 부림사건 (주동인물 중에 부산대학의 노재열군 등이 주축이 되어 온천장 문성야학에서 강학생활 했음)이 일어나고 부마사태가 터지면서 야학탄압은 극도로 심해졌으며 광주사태 등에 야학이 그 중심에 있다는 정부의 판단으로 새마을 학교가 아닌 야학은 학생모집행위를 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한림학교의 주선으로 근로청소년학교를 야학 간판으로 바꾸어 정부와 타협을 하여 사회교육법(현재 평생교육법)을 만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여 결국 의원제정으로 통과하고 대부분 야학이 근로청소년학교의 간판을 달게 된다. 지금의 평생교육법은 당시 한림학교 이현만 교장이 앞장서고 서울 5곳 광주 1곳, 부산 에서는 필자가 참여하여 6개월에 걸쳐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당시의 새마을 학교는 사회교육법의 통과를 반대했었다. 그런데 사회교육법이 발효되자 새마을학교들은 앞 다투어 사회교육시설로 등록을 했고 1985년에는 새마을학교들이 학력인정사회교육시설학교로 대거 승급하게 되었으며, 순수야학들 중 일부는 “학력미인정사회교육시설“로 명맥을 유지하고 또 일부 야학은 문을 닫거나 근로청소년학교로서 겨우 간판을 달고 운영하게 된다.
처음으로 정부의, 교육부 당국의 등록증을 받게 되는 법적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다시 말해서 정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순수 야학들이 힘겹게 얻어 낸 결과를 대부분의 야학들이 법적지원을 못 받고 그동안 정부의 비호아래 운영되던 새마을학교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당시 야학들이 기업체와 결연을 맺거나 기업체에 다니는 근로자들이 야학에 많이 다니게 되니 기업체가 직접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정부에서 “산업체 특별학교법”이 발효되고 마산의 한일합섬, 대구의 제일모직, 부산의 삼화고무, 태광산업, 태창기업 등의 대기업에 이어 중소기업들도 참여하게 되어 착취의 수단으로 근로자들을 옭아매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현재 대부분의 야학 학생은 40대 이상 여성들이다. 이들은 거의 유일하게 남은 비학력층으로 많은 야학은 검정고시 프로그램에 집착하며 이들을 주된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있다.
현재까지 주류로 이어지고 있는 대부분 야학의 교과목 체계는 검정고시 과목체계를 따라왔다. 따라서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국사 중심에 선택과목들이 포함되는 형태로 짜여졌다. 한편 야학을 하나의 ‘학교 제도’로 생각함으로써 자치회의(HR), 문예수업이 함께 편성되었다. 검시야학은 보수야학이라기보다는 수요자의 동기에 보다 솔직하게 반응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시사정치수업이나 노동법 수업이 정규교과체계에 편입되었고, 각 교과목 속에서 다루는 내용도 정규 중등교육과정을 벗어나 민중교육에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야학들이 검정고시 야학들로 정리된 90년대 이후, 이들이 운영의 독자성을 갖추면서 각 교과목의 교육과정이 정규 중등교육과정으로부터 벗어난 정도에 따라 생활야학과 검시야학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시민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생활야학을 표방할 경우 교육목표를 ‘검정고시 합격’보다는 ‘공동체성 획득’에 두기도 하였다. 강학들의 활동연한이 짧아지고 세대간 문제의식 연계가 약해지면서 최근에는 이 정도의 낮은 단계에서 보수야학과 진보야학의 구분이 만들어지고 있다.
2000년대
21세기에 들어서 다시 신생야학들이 등장한다. 도시화가 되면서 야학의 모습이 많이 바뀐다. 예전에 농촌에 설치되었던 야학은 유지가 땅을 내놓아 논이나 공터에다 건물을 짓고 교실을 꾸미는데 비해 이제 그러한 형태에서 설치자가 건물을 임대하여 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복지관이나 단체의 더부살이 하는 일명, 시설야학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습과목이나 내용도 다양하여진다.
사회교육법이 평생교육법으로 바뀌고 “평생교육”이라는 용어가 대중화 되면서 야학의 학습내용이 평생교육 개념을 많이 띤다. 중 고등검시학원에 밀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야간에 학습하는 야학은 학생유치에 어려움이 많다. 대학생이 운영하는 동아리 성격인 야학은 교사확보가 매우 어렵다. 예전에 사범대생들이 대부분 교사로 활동을 했는데 임용고사에 묶여 봉사할 형편이 안 된다. 또한 야간학습의 한계로 2중고를 겪고 있다.
야학의 시대적 변화 도표
시기구분 |
주요목표 |
주요대상 |
주요내용 |
특성 | |
구한말 |
애국계몽 |
농민 |
개화사상 한글교육 |
최초 야학 등장 | |
일제시대 |
애국계몽 항일독립 |
농민 도시빈민 |
보통교육 수준 한글교육 독립사상 사회주의교육 |
저항성 강화 및 일제의 탄압과 관변야학의 등장 | |
해방 이후 |
1960년대 이전 |
지식습득 학력취득 |
농민, 도시빈민, 실업자 |
검정고시 |
국가 차원의 재건학교 운동 |
1970년대 |
민중의식고양 의식화 및 세력화 |
도시빈민 노동자 |
검정고시 생활지식 사회과학 |
생활야학 및 노동야학 출현 | |
1980년대 |
의식화 및 세력화 |
노동자 도시빈민 |
사회과학 노동법 검정고시 생활지식 |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과 결합 정부 탄압 일상화 야학 전국 조직 결성 | |
1990년대 이후 |
학습요구 충족 학습권 보장 생활정치 |
노동자, 여성, 저학력층, 장애인 등 |
검정고시위주 문화 컴퓨터 성인기초교육 시민교육 |
학습자 다양화 교육적 기능 강화 |
Ⅲ결언
이제껏 여러 가지 자료들을 들어 야학사를 훑어 보았다. 구한말 신식교육의 태동기인 1860년대의 사회적 상황이나 초기 야학의 내용은 생략하였다. 구한말의 야학사는 연구하여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으나 차후에 분명히 연구를 거쳐야 할 것이다. 보편적인 야학사를 다시 정리하면서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가야하는 야학의 다음 종착지는 어디인가? 그리고 우리 야학이 어떤 의미로 사회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가? 학습자를 어떻게 파악하고 학습자에게 무엇을 학습할 것인가? 방향성을 제대로 찾아내는 일이 그리 쉽진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정부를 상대로 우리의 권익을 찾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아니, 학습자의 권리, 국민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
고 있다.
암울했던 시절은 이제 지나고 정부 당국자를 상대로 지난 몇 년간 대안모색을 해오고 있다.
그리고 예전처럼 불법이 아닌 ngo로서 활동범위나 영역이 확실하게 확보되었다.
2007년 11월에 국회를 통과한 개정평생교육법에서 국가가 지원하여야 할 교육내용으로 문해교육이 명문화 되었다. 『“한글공부”는 야학의 교과과정 중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유네스코가 한글공부를 비롯한 문자교육을 “문자해독“ 즉 ”문해“라는 신 용어를 만들어 내면서 ”문해교육기관“이라는 형태의 야학들이 나오고 또 문해교육연대체가 조직되어 그간의 야학의 고유영역이었던 문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시기에 집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있다. “문해”라는 단어에 대해 야학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문해는 교육과정이다라고 해야 한다. 야학은 기관형태라고 한다면 문해교육이든 문자교육이든 상관이 없이 야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형태다.』
앞으로 문해교육 지원을 두고 설레임도 있지만 제도화하는 내용에서 야학들이 제대로 살아남을까하는 염려가 더 많다. 야학자체의 생리에서 제도화란 결코 맞지 않는 단어다.
교육부 당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야학의 다양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지원책을 강구키로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담당자의 입장이고 제도는 제도인 것이다.
야학이 정부당국과의 협의나 국가의 지원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야학정신을 해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엄염히 우리는 사회정의에 합당한 활동을 하고 애초에 잃은 국민교육권을 회복하는 차원이기에 국가의 지원은 합당하다.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히 야학이 살아남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단지 이상한 모습으로 기생하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우리 야학의 지상목표는 이 사회에서 야학이 절대로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꾼다.
당당하고 명확한 의지로 야학이 또 다른 백년을 향해 나아가는 철학이 필요하다.
교육이라는 제도는 인간이 만든 제도중에 가장 성공한 제도이다. 그런데 그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는 가장 소외된 자다. 우리는 교육평등을 외치기보다 다만 묵묵히 그들과 함께 학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