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박갑철동문의 부친께서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있었으나, 삼우제까지 마친 마당에 갑철이에게 전화 한 통화를 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어렸던 1968년 중학교시절, 같은 반이었던 관계로 갑철이 집에 놀러가기도 했었습니다. 갑철이 어머님의 지극 정성이 담긴 저녁밥을 먹고 돌아올 때 어머님께서 교모를 두손으로 받쳐들고 건네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춘희동문의 이사관승진소식, 김왕복동문의 예정된 미국파견근무명령,그리고 하태윤동문이 인사과장으로 들어온다는 등의 기쁜 소식이 있어 무척 반가웠고 태윤이도 빨리 국장급으로 승진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8/2일에 미국유학간 오태진동문과 10일출국예정인 김왕복동문 모두 무사히 임기를 잘 마치고 귀국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세분 동문은 오늘 전화연락이 어려웠습니다.
이번 하기휴가는 8년만에 다시 찾은 설악산 일원에서 매우 유익하게 보냈습니다. 동기동창 가운데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는 친구가 드믄 상황에서 강원도 양구와 인제 심산유곡에서 국가와 국토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직도 젊음을 불태우고 있는 조봉현동문이 있어 일부러 찾아갔습니다. 봉현이 내외의 넘치지 않고 부족함없는 절도있는 배려와 환대에 감사와 더불어 찬사를 보내며, 조대령의 전도에 무운장구하시길 충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라고 소시적에 입력되어 있는 인제 원통은 이번에 제가 살펴보았기로 결코 그런 부정적 함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인제(麟蹄)는 태백산맥 서쪽 산골오지임에 분명하나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만큼 그곳은 역사적으로 천혜의 요충지였습니다.
신라 경순왕이 30리나 되는 긴 행렬을 지으며 문경새재 넘어 충주,장호원,이천을 지나 한강을 건너고 임진강을 건너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기 위해 개경으로 투항하러 갈 때, 마의태자는 자기를 따르는 군졸들을 거느리고 죽령넘어 제천,원주,횡성,홍천 등지의 산길을 따라 이곳 인제 한계리 옥녀탕위의 한계산성(寒溪山城)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와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마의태자는 이곳에 주둔하여 군사들을 조련하고(인제군 남면 갑둔리(甲屯里)), 군량미를 비축하였습니다(양구군 양구읍 군량리( 軍糧里)). 다시 말하여 신라부흥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金傅里)의 김부는 경순왕의 이름이나 김부대왕제1자(第一子)라는 위패의 줄임말입니다.
이성계의 조상이 전주에서 서해와 남해바다길을 돌아 삼척에 들렀다 함흥으로 갔듯이 옛날에는 내륙길보다 바다길이 더 수월했기에 인제는 난공불락의 군사적 요충으로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동해바다를 통하여 쳐들어올 고려 왕건의 토벌군을 설악산 한계령에서 망을 보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당시 동해안에서 인제로 넘어오는 가장 쉬운 길은 고개높이가 낮은 진부령이었을 것이랍니다. 진부령은 김부령이 변해서 진부령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패퇴하여 금강산으로 밀려났는지 모르나, 또 다른 혹은 동일한 마의태자가 영흥으로 올라가 금나라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과 더불어 금나라와 여진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으니, 아뭏든 인제는 천년사직 신라의 명맥을 조금이나마 더 이어준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새삼스레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역사를 공부하자는 게 아니고, 요체는 우리 민족의 성깔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불굴의 저항정신과 끈기가 있었다는 것을 인제는 가르쳐주고 있으며, 오늘날도 군사요충지로서 호국의지와 상무정신의 도량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그곳에 우리의 친구 조봉현대령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올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영흥땅은 금나라가 일어나 고려를 압박하였고 급기야는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를 멸망시켰던 고장입니다. 이성계는 여초(麗初)의 항려운동을 잘 알았다는 듯이 왕위를 탈취하자마자 왕씨를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 없앰으로써,예컨대 바다 한가운데로 싣고 나가 수장시키는 등 왕씨의 씨를 말렸다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니면 왕씨 스스로 옥(玉)씨,전(全)씨,전(田)씨등으로 성을 바꾸기도 하였고, 따라서 고려부흥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권력의 독한 속성은 바로 그런 것인가 봅니다.
원통리(元通里)는 인제의 중심지로서 내설악으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목이며, 또한 원통 오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는 453번 지방도는 서화리를 통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백담사 들어가는 길은 골이 너무 깊어 만학천봉(萬壑千峰) 내설악의 그윽한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년에 서울대병원 30대 미혼 간호부와 만나 재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으나 성북동에 북향집을 지어 살면서까지 일본제국주의에 끝내 굴신하지 않았던, 변절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33인으로서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안타깝게도 조국광복을 보지못하고 1944년에 타계하신 만해 한용운선사께서 1904년 26세 청년의 몸으로 발목이 짤려 나가는 듯 차갑던 북천물을 건너 백담사 불문에 귀의하시고, 밖에 나가 여러가지 수많은 활동을 하시다 다시 돌아와 1917년 12월 39세 겨울에 오세암에서 득도하셨다는 사실이 대표적 유사(遺事)인 백담사에 某전직의 2년간 거처를 역사적 유물로 승격시키려는 흔적이,그것도 대웅전 바로 앞에 아직 남아 있어, 뭔가 부조화상태임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을 비토했던 천재시인 김시습과 만해 한용운, 이 두분만 있어도 백담사는 그 명성을 영구히 유지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담사 앞을 가로지르는 큰 냇물의 유장한 물소리를 들으며, 환속작가 고은이 저술한 한용운평전을 읽으며 암기해 두었던 만해선사의 오도송(悟道訟)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사람은 어디메를 가나 이르는 곳이 곧 고향인 것을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그 누가 나그네 설움 가운데 오랜동안 머무르는가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외마디 큰 소리 한번 질러 삼천계 우주를 다 말하노니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눈 속에 붉은 복사꽃잎이 펄펄 날리네 (雪裏桃花片片紅 설리도화편편홍)
고성의 최북단통일전망대,화진포해수욕장과 김일성별장,이기붕과 이승만별장, 북단의 어항 거진항,바다와 모래가 그토록 곱고 아름다운 청간정 등등 관동명승지의 얘기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이은상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등을 모독할 것같으므로 이만 줄이는 게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2001.8.4 許南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