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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5일
말씀: 요한1서2:16-18
제목: 세상의 원리
목회를 하면서 나이 드신 분들이 새벽에 잠이 깨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 ‘마음속으로는 낮잠을 많이 주무시나, 걱정거리가 많으시나’이렇게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할 때도 이런 관점에서 기도를 드리고 했습니다. 어떤 분이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이야기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몸이 많이 쇠약해 졌나’이렇게 생각하고 기도를 드릴 때 그런 관점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새벽에 잠이 깨면 잠이 안 오고, 귀에 무슨 소리도 들리고 눈동자에 모기 같은 것이 날라 다니고 실질적으로 겪으니까 이제야 이 분들의 마음을 깊이 있게 알게 되어 기도 내용이 달라지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점점 마음깊이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이 십자가복음 설교가 먼저 저 자신에게 유익된 것이 크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여기서 ‘결코...없으니’에 해당하는 ‘메 게노이토’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소원을 나타내는 화구법입니다. 이는 핍박을 면하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이중적 삶의 자세와는 전혀 대조적인 가치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고전 1:25)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가졌던 진리의 본질과 삶의 동기와 목적을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내게는’(에모이)이라는 표현은 온갖 불의를 무릅쓰고 끝까지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열정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저번 주에 이어서 이 문제,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에 대해함께 알아봅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하면 이 적용으로 나타난 고백이 바로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과, 십자가 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3:3-6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구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번 주에 ‘세상’(코스모스)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총제적으로 세상이란 인간들의 자기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1세기에 살든 사람들보다 오늘날 삶이 훨씬 진보적이고 다변화되고 엄청난 문화를 이룬 것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때 와 무슨 생각이 다르고 무엇이 변화되고 사고방식이나 사상이 다른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죄악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동일합니다.
요한1서2:16-18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리라.’
여기 말씀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람’의 예입니다. 이 세 가지 예 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합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안목의 정욕’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이생의자랑’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는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입니다. 요한은 16절에서 이 세 가지는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주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그러니까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짝하면 세상과 원수가 됨을 우리는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요한복음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그래서 세상의 원리를 우리가 살펴보는 이유이기도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아셔야합니다. 이번에 예숨 다함께 돌봄 센터를 운영하게 되면서 이 세상과 연계해서 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숨다함께 돌봄센터 개소식을 하는데 있어서 모든 순서에 종교적인 색채를 다 빼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지역아동센터가 열렸는데, 개소식에는 예배를 그대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청에서 점점 간섭을 하기 시작 하더니 급기야 개소식에 기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봉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고 축하 기도는 누구도 시비를 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마는 이것 하나 때문에 저희들은 구청에서 실시하는 개소식을 하지 않고 저희교회가 따로 개소식예배들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권위에서 기독교의 문제점을 만들고 확산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약5-6년 전에 대전시에서 인권조례법을 상정했고 시의회에서 통과시킨 사건이 있습니다. 지방에서 최초로 조례법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대전시연합회에서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이 일을 위해 준비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한 달 후에 통과를 취소하는 일로 인해 교회가 더욱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세상이 얼마나 적대관계로 세워졌는가를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장에서 이승만박사가 이윤영 의원에게(감리교목사) 기도요청을 함으로 첫국회가 열렸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미국도 대통령취임식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구에서 실시하는 사업인 돌봄센터 개소식에서 기도를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 부분을 우리는 영적으로 해석을 할 수 있어야 앞으로 이 땅의 복음을 위해 영적 전쟁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17절에서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세상은 한시적이고 찰나적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세상의 것들이 한 순간에 지나가고 세상 끝 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명으로 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고 죄에서 떠나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영원히 거하는 보장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통치영역 안에서 계시의 영역 안에서 산자들은 영생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무엇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외모와 겉치레와 화려함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모를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강남 쪽으로 가면 여자들의 얼굴이 다 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던데요, 왜냐하면 같은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돈만 있고 여유만 있으면 일차적으로 외형부터 뜯어 고치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모지상주의가 시대를 막론하고 뜨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겉치레와 화려함도 말할 것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과는 전혀 다른 외적인 모든 것입니다.
눅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안목’이것은 눈에 띄는 외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이 노선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안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체면과 부정직함과 위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보기 좋다’는 것에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지 않나 한 번쯤 돌아보셔야합니다. 실질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화장한 얼굴, 페인트, 회칠, 이런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냐 이런 삶이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모를 가꾸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도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가식적이고 외형지상주의고, 체면을 중시하는 자존심에 매여 있고 하는 것으로 인해 이것이 우리의 인생관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안목과 정욕은 외모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과 실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긍정 앞에 ‘개’자를 붙이고 부정 앞에 ‘왕’자를 붙인다고 합니다. 개 맛있다, 개 쩐다, 왕 싸가지,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자기를 드려내지 않기 위한 심리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언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만 드러내는 위장과 회칠입니다. 회칠은 무덤을 색칠하는 것인데요, 무덤 안과 밖의 차이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고 청결하나 안은 그렇지 않다’그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더럽고 추악하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놀랍지만 안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저 겉으로 보는 것만 괜찮으면 된다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입니다. 문제는 야심과 교만, 헛된 욕망, 정욕이 삶의 긍지를 형성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위해 살고 성공을 기준으로 삼고 자랑합니다.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고, 이름이 나고 싶고 하는 욕망이 정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의 삶에 대한 성경의 분석입니다.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이 세상을 이처럼 무섭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총체적인 삶의 형태를 보면 이 속에 거짓이 있고 간사함이 있고, 교활함이 있고, 이중적인 삶의 형태가 있고 추악함과 불범과 방종과 미움과 살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삶을 살아가면 질투가 동반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생의 자랑이 나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 모두는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이 질투와 시기심이 얼마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제대로 잠도 못자는 밤을 얼마나 많이 보내어야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이생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둑질과 강도, 이 육체의 정욕,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을 갖고 싶어 하는 이런 것이 도둑질과 강도입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재산을 훔치면 법적으로 벌하지만, 남의 남편이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벌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사회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도둑질 하는 것을 하나의 오락거리로, 유흥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최근에 서울시의회 교육전문위원 실이 최근 서울시교육청에 ‘성관계는 부부만 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 담은 학생 관련 조례안에 대한 의견 조회를 요청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례안은 학생, 교직원, 보호자가 지켜야 할 성, 생명 윤리를 규정했는데, ‘성관계는 혼인 관계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성교육은 절제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논란이 되었답니다. 이것이 논란의 문제인가요?
서울시의회 측은 논란이 일자 한 단체에서 조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와 의견조회 공문을 보낸 것 뿐 이라며 해당 조례안이 발의된 건 아니라고 해명했다 것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느냐하면 성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정욕, 이것이 도둑질과 강도로 표현되고 있지만 크게는 전쟁이 이와 같은 형상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참혹한 일들이 도둑질과 강도의 근본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최고의 수단이 전쟁입니다. 힘 센 자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구조가 변화지 않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국 비참함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약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정욕으로 나타난 현상, 이것이 인류역사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그대로 세상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야하느냐 하는 답을 바울을 통해 찾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요 2주 동안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과 단절된 삶을 요구하고 있음을 아셔야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성자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오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한 후 비로소 세상이 어떤 곳인지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악한 세상을 바로 잡기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교육입니까? 신념입니까? 정당을 만들어 함께하는 개념을 모아 정치를 하는 행위입니까? 그런데요, 어떤 일들도, 첨단과학도 첨단 의료시설도, 교육으로도 전혀 세상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예수그리스도로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이 세상은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율법은 그리스도로 이끄는 몽학선생에 불과합니다. 선민사상으로 구원을 이루면 되지 않겠습니까? 할례를 받고 정결 법을 지키고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구원을 이루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데요, 이것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정결한 제사제도로도 안 되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로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어떠한지 주님이 오셨을 때 인간들의 반응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자하나님은 하늘 보좌를 비우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며 말씀을 가르쳤으며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억눌린 자를 위해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귀신들린 자들을 위해 병든 자들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은 그를 미워하고 배척하고 핍박하며 선하신 분보다 살인자를 더 원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세상이 진정 어떠한 곳인지 이 세상의 본질을 폭로하셨습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예수님은 조롱하고 비웃고 우스갯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지구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고 배척을 당하고 죽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1세기 때 사람들과 똑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방법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과한 우리는 세상에 못 박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못 박은 우리는 영혼에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세상에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살아도, 얼굴을 해마다 리모델링을 하며 외형적으로 잘 가꾸어도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궁정과 같은 집에 살아도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입니다.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향해 우리가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 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 땅은 유한하고 영원에 비해 한 점도 되지 않은 나그네 인생임을 우리는 압니다. 잠시 왔다갈 이 땅에 매몰되어 탐심과 정욕으로 삶을 살아가는 그 과정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합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우리가 못 박고 세상이 우리를 못 박는 일이 있어도 담대히 싸우며 이 땅의 변화를 위해 생명소생을 위해 복음의 삶을 살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