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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수준의 극한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대 폭염 일수를 일찌감치 갈아치울 전망입니다. 낮에는 살이 타는 듯한 뜨거움을 느낄 정도여서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선풍기로 견뎌보다 못해 에어컨을 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가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 같은 이 상태가 이미 예고된 일이지만, 막상 닥치니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만 시작일 뿐이라면 앞으로가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끔찍한 재난이라고 투덜대다가 이 뜨거움에 분단의 철책이나 녹아내렸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더위를 먹어서일까요? 1945년, 폭염이 절정이었을 8월 15일에는 일본 천왕의 항복 선언이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제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기쁨에 삼천만 동포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뛰쳐나와 거리에서 서로 얼싸안고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짖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 목격해야 했던 것은 한반도를 분단하고 겨레를 갈라놓은 3.8선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적대적으로 상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로인해 해방된지 5년만에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지요. 그러고도 아직 우리 민족은 분단이라는 질곡을 지고 허리가 묶인 불구의 상태로 80년 넘게 참혹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분단된 것은 미소냉전의 산물이지만, 전적으로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외세의 이념 대결이나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충돌 같은 외부 작용이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그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민족 내부 세력이 외세가 짠 분단의 구도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분열하여 분단에 편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냉전시대는 강대국들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이념으로 세계를 가르고 진영을 구축하던 시대였지요. 두 진영의 맹주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를 나누어 차지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하였지요. 그것을 당시에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이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약소민족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해방 국면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우리의 의지인 것이고, 민족 내부에서 일치 단결하여 통일독립을 추구하였더라면 외세가 일방적으로 우리 민족을 영구적으로 갈라놓는 분단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응에 따라 사태는 여러 모로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이미 건국 목표와 노선, 독립운동 방법 등을 놓고 분열이 막심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미‧소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진 각축 사이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이 이미 나라를 이념으로 가르고 겨레를 진영으로 갈라 분단은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분열을 막고 통일독립을 이루어내기 위해 혼신을 다했던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정국에서 통일을 지향하여 희생을 불사한 정치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남과 북에서 분단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정치적 실리를 계산한 세력이 미, 소 강대국을 등에 업고 끝내 분단을 확정지은 것입니다.
분단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의 삶은 구조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단순히 남과 북에 두 개의 정권이 선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이념에 의해 하나의 삶이 둘로 쪼개진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남과 북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로 조작되어 서로 배척하고 대결하는 분단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이 통일된 하나의 형상으로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면에서 자유와 평등이 합일되어야 하지요. 남과 북에서 자유와 평등이 각각 분열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조작되어 작동하니, 이러한 분단의 체제에서는 사람이 기형적으로 편향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기형적으로 편향된 삶을 강요당하니 삶이 정상적이지 못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고 중심이 잡힌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남과 북에서 오히려 악마화되어 배척당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는 가운데 서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막8:34) 십자가는 주님이 평생 지셨던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처형장까지 지셨던 나무형틀, 그것만이 아니지요. 어머니 마리아의 태에 수태되어 탄생하기까지도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을 가졌던 유년기의 삶도, 공생애를 준비했던 청년기의 삶도 십자가 행로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공생애는 그 전체가 불붙은 화살처럼 확연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행로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십자가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의 궤적이었습니다. 활시위에서 날아간 화살이 궤적을 벗어나지 않고 정확하게 날아가 과녁에 꽂힌 것과 같습니다. 생애의 마지막에 나무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의 처형장에 올라가 거기에 못박히고, 거기에 높이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타고 땅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요3:13)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화살과 같이 하나의 궤적을 그은 주님의 십자가 행로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 회당에 가셔서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공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20)
그리스도의 소명은 가난한 사람들, 포로된 사람들, 눈먼 사람들, 압제당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지는,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자유와 평등입니다. 소외되고 곤궁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불행을 겪는 근본적인 상태는 부자유와 불평등입니다. 불행한 사회에서 누군가는 자유하고 누군가는 부자유합니다. 자유의 불평등이 있는 것입니다. 부자유란 자유가 불평등한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부자유가 있는 것은 누군가 억압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불행한 사회란 누군가는 자유하고 누군가는 부자유한 것이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자유의 불평등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행한 사회란 개인이 노력해서 자신이 겪는 부자유와 불평등을 해소할 수가 없는 사회를 가리킵니다.
불행한 사회에서 가난은 개인의 문제로 돌릴 수 없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유의 문제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부자유하고, 부유한 사람은 부를 가진 만큼 경제적으로 자유를 많이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는 생존과 생활의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인격의 자유,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존엄의 자유까지 포함하는 많은 자유의 결정권자입니다.
빈부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불평등을 낳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결국 자유의 문제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한 자리에 머물도록 사회의 구조가 작동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질병에 걸려 질병에 속박되기 쉽고, 질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도 어렵습니다. 불행한 사회의 빈부 구조에 속박되고 짓눌린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고, 불평등의 골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불행한 사회에서 누군가가 가난한 이유에는 개인의 능력이 포함될 수 있지만, 사회의 부를 누군가가 많이 가져서인 이유도 있습니다.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부자들 곁에 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빈부의 구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구조 속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자유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만들어 가지고 그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가난의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한 몸으로 여기는 공동체의식을 멀리 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긍휼과 자비의 정신을 내던집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을 부의 우상 앞에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상숭배의 종교 체제를 무너뜨리고, 물신숭배의 제국을 철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삶의 행복을 회복시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유는 인간 생존을 위한 기본 정의입니다. 자유 없이 인격이 존재할 수 없고, 생명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존재를 위하여 자유가 필요합니다. 자유를 막아보십시오. 항우 장사라도 햇빛 들 창이 없는 감옥에 가두고 물과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죽습니다. 자유를 막으면 자연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위적으로 바람을 막고, 빛을 막고, 물의 흐름을 막으면 자연도 폐사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존재의 정의입니다.
자유가 평등하지 않으면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정상적으로 관계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억누른다면, 둘 사이에는 정상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등은 관계의 정의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가 불평등할 때, 그 관계 속에서 약자인 쪽은 부자유합니다. 그러니 자유가 평등해야 둘 다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거꾸로도 진리입니다. 평등이 자유로워야 모두가 평등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평등이 자유로워야 사람들이 자유롭게 평등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은 갈라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와 평등이 일치되고 통일된 생명이십니다. 둘을 갈라놓는 것은 하나님을 갈라놓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한 세상에서는 누군가가 자유를 남보다 더 차지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자유와 평등을 자꾸 갈라칩니다.
자유가 불평등해서 불의한 세상, 평등이 부자유해서 불의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사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한 세상을 견디실 수 없으니 그런 사회는 무너뜨리시고야 맙니다. 자유롭기 위한 평등, 평등하기 위한 자유, 자유와 평등이 통일된 세상이 정의롭습니다. 그런 정의로운 세상이 하나님이 사시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그곳이 인간이 살아 마땅한 공동체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꼴이므로 하나님의 꼴인 공동체라야 거기가 인간이 평화롭게 살 곳이지요. 자유와 평등이 통일된 것이 평화이므로 자유와 평등이 통일된 공동체가 평화롭습니다. 이 하나님의 공동체가 인간이 살 생명의 공동체요, 평화의 공동체이지요.
그리스도께서 희년공동체, 곧 생명 평화의 공동체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공동체는 자유와 평등이 하나로 통일된 정의로운 평화와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의 손에 넘어간 땅을 되돌려 주고, 종 되었던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이 일어나는 희년, 곧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모든 불행한 사람들, 부자유로 신음하고 불평등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고 다시 모든 사람과 평등한 관계로 돌아와 생명과 평화를 온전히 누리는 정의로운 인간 세상이 회복되는 일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셨고, 이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 행로를 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행은 자유와 평등이 통일된 정의, 곧 생명과 평화의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자유와 평등이 갈라져 기울어진 세계를 바로세우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자유와 평등이 통일되는 운동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로 이루는 통일은 양극으로 갈라진 자유와 평등 사이의 중심을 잡는 운동입니다. 좌우와 남북, 위 아래로 분열된 두 가치를 중심을 향하여 수렴하는 운동입니다. 십자가의 통일운동은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순환하여 나선을 그리면서 중심을 향해 올라가는 상승운동이지요. 통일은 나선 순환의 중심, 곧 상승의 꼭지점까지 올라가는 연속된 과정입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역사는 나선순환이 중심에서 멀어지는 거꾸로 된 순환이었습니다. 악순환이지요. 순방향으로 순환하여 중심으로 수렴하는 상생의 선순환이 아니라 역방향으로 순환하는 분열과 상극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이 악순환과 역순환을 거꾸로 돌려 선순환과 순순환으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역사의 끝에 다다랐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민족과 한반도의 분단은 거의 역사의 끝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겨레가 인류의 역사에서 자유와 평등의 분열이라는 인간 분열의 원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남북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역사의 마지막 계단을 거의 내려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북한 당국이 한 국가 두 체제 연방이라는 김일성 이래의 통일론을 폐기하고, 남북을 두 국가 관계로 변경하는 헌법 개정을 하였지요. 이제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긴 특수 관계라고 하는 애매모호한 포장을 걷어내고 현실을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남과 북의 체제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엄연한 두 개의 현실 국가인데 그동안 실체를 모호하게 가려놓았던 포장을 걷어냈기 때문에 남북 관계가 앞으로 현실화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평화적 두 국가 관계로 바꾸고, 평화를 발전시켜서 국가 연합으로 가는 순서가 확실하게 정해졌습니다. 북의 당국이 남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면 통일에서 멀어진 역행인 것 같지만, 통일의 과정이 실질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계기가 열린 점에서는 분명한 진전일 것입니다. 분단 체제가 폐기되고 남과 북이 상호 수렴하여 하나로 일치하는 통일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행이란 무엇인가요? 자유와 평등의 중심을 잡고, 중심에 서는 일입니다. 죄악이 뿌리내린 세상의 밑바닥, 땅의 끝으로 내려가 분열의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겠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자유와 평등이 수렴하는 통일의 중심에서 부활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평화의 정의가 열매맺는 하늘의 중심, 하나님나라로 올라가는 일이겠요. 이것이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 행로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행로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