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되돌아보며
일제 36년 강점기에서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는 독립되었다.
하지만 통일된 조국이 아니고 남북으로 갈라졌다.
우리 국민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결과였다.
북에는 소련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이 입성하여 공산 화 국가를 세우고 남침을 하여 적화 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국력을 모으고 있을 때,
남한은 좌 우익으로 갈라져 매일 피투성이로 싸우기만 하고 국력을 살필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그간 국가를 위해 일하시던 많은 분들이 북과 협상하여 통일을 해야 한다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적화통일을 향해 남침을 강행한 것이 6.25다.
6.25가 터져 엄청난 희생을 하고 국가가 초토화 된 지 74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에서 6.25동란은
남침이다 북침이었다고 논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내가 5학년 때다. 당시 우리 면(面)에 초등학교가 하나 밖에 없었는데. 내가 다니던 곳은 간이학교
로서 주곡, 서포, 부곡리 3개 리(里)의 5학년 아이들만 따로 나와 교육 받던 곳으로 오전 수업 중이
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쿵 하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 학생들이 우왕좌왕하고 소란 떨고 있는데,
선생님이 잠시 나갔다 오시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전쟁이 났단다. 저 소리는 목천 포 다리를 북한
비행기가 와서 파괴하는 소리란다’ 하시면서 놀래있는 우리를 안심 시키고 계셨다.
나는 그렇게 6.25를 만났다.
나는 가끔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하여 ‘헤어짐’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이 있고 내가 선택 당한 채로 사는 경우도 있다.
내가 북한의 지배 하에 3개월 남짓 살았지만 내가 두메 산골 그 깊은 곳에서 태어난 것이며, 내 나이
어렸을 때이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나 싶기도 한다.
우리 군에는 6 개면(面)이 있었다. 그중 미면, 옥구면, 회현면은 호남 평야 속에 있는 곳이었기에
지주와 머슴의 관계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6.25로 인해 적의 지배 하에 들면서 맨 처음 시작된
것이 지주를 죽이는 일이었다. 머슴으로 살던 사람 또는 해방 소용돌이 속에서 남노 당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부르조아(bourgeois)에게 착취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며 살았다고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면서
그간 자기의 주인이었던 사람들 및 군 경 가족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 군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곳이 미면이었고 옥구면 회현면 순이었다.
그런데 내가 살던 우리 면 특히 우리 동네는 30 여 호가 모여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기에
그런 처참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촌 형님이 대한 청년단 단장을 했던 것이 우익이라 하여 하루하루 숨죽이고
도망 다니면서 숨어 사셔야 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는 심(沈)씨 하고 박(朴)씨가 주로 사셨는데 우리 큰 댁하고 우리 집 그리고
심 복동 씨 등 3 가족이 우익으로 찍혀 남보다는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결국 사촌 형님이 서포 리(西浦里)에 사는 조(趙)가 들에게 잡혀
가려는 일이 생겼다.
한 여름이었다. 도망해서 사시던 형님이 잠시 집에 들르셨다가 잡히신 거다. 그런데 이런 운명의
도움이 있을 수 있었을까?
우리 큰집에서는 난리가 났고 어떻게든 시간을 지체하려고 온갖 장만을 해서 술을 먹이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 면 민청위원장이신 심 재복이라는 분이 의용군에 지원했다가 불합격을 받고 되돌아 오셨다.
그래서 우리 큰댁에서는 그분을 붙잡고 우리 아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그분이 ‘아니 내가 결재도 안 했는데 네놈들 누구 명령으로 최 길영이 잡으러 왔느냐’며 때리자
코피가 터지고 매만 맞고 되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형님은 살아나셨다. 당시는 붙잡혀 가면 거의 죽임을 당하던 때였다.
또 큰 아버지도 잡혀가셨다. 반동 분자 아들 최 길영이 어디 숨겼느냐며 잡혀가셔 주재소에 갇히셨다.
날이 새면 불려나가 고문을 당하실 거고 잘못되면 죽임을 당하실 수 있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누군가 가 문을 열어주시고 도망치시도록 해 주셨다. 그렇게 해서 큰 아버지도 살아나
셨는데 그날 밤 문을 열어주신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당시에는 집집마다 개를 키울 수가 없었다.
염탐 꾼이 마을마다 있어서 밤에 몰래 와서 살피고 갔고 완장을 두른 놈들도 아무도 모르게 왔다 가는
그런 때였다.
우리 사돈 되시는 지(池)가라는 분이 염탐 꾼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집에 오시기만 하면 집에서 키우던 개가 짖어 대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좌익이라는 것을 아는지 신통한 일이었다. 다른 집 개였으면 벌써 잡아 죽였을 것인데 사돈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개가 우리 어머니를 포화 속에서 살리시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마을 옆 용천 산에 금강을 통해 패퇴 월북 하려던 인민 군과 대야에 있는 미군이 최후 결전을 하였다.
박격포가 날아오고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서 아버지, 누나 그리고 나는 마을을 벗어나 개울 물이
흐르는 언덕 뒤에 숨었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같이 피하지도 않으시고 집에 계셨다.
그런데 황구가 어머님 치마를 물고 짖어 대더란다. 그때 총탄이 집으로 날라 왔다.
어머니는 이상을 느껴 개가 끄는 대로 따라가 마을 맨 끝에 있는 논에 바짝 엎드리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그렇게 짖으며 어머니를 물고 끌어서 어머니는 이상함을 느껴 또 그 자리에서 떠났는데 이번에는 포탄이
떨어졌다. 만약 자리를 뜨시지 안 했다면 어머니는 어찌 되셨겠나?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개가 우리 어머니를 살리신 거다.
당시만 해도 농촌에서는 개를 키우다가 잡아먹던 시절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살린 은혜의 황구를 끝까지 키우다가 늙어 죽은 후 묻어줬다.
지금도 그 개가 눈에 선하다.
3개월 여 적의 통치 하에 있다가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적들이 패퇴 하던 중 그들이 금강을 건너려
패퇴 하다가 우리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온 마을이 심하게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인민군의
밥 50 명분을 해 놓으라고.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자이시고 가장 반동 분자 집으로 찍히신 심복동
씨 댁에서 부랴부랴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석양이 질 무렵 저들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군 비행기가 날아와서
기총 소사를 퍼붓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혼비 백산하여 해 놓은 밥도 먹지 못하고 어디론가 도망쳤다.
그들이 도망치지 안 했다면 우리 동네는 기총 소사에 쑥 밭이 되었을 거다.
그런데 다음 날 알고 보니 패퇴 하던 그들은 동네 옆 산 용천 산에 다 모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 대야에 있는 미군과 전쟁이 붙었다. 먼동이 트자마자 시작된 상호 교전은 반나절도 못되어
인민 군이 패퇴 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다 도망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동네에 일이 벌어졌다.
유 수종이라는 분 댁에 밤사이 밥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심 천택
씨가 논에 일을 보러 가시는데, 논에서 무엇을 먹는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보았더니
인민 군 2 명이었다. 가던 길 되돌아 황급히 돌아 와서 마을에 알리니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 동네에는 인민 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서 온 박 형순 씨와 그의 사촌 박 영순이 휴가 나와 있었
는데 그 소리를 듣고 마침 전쟁터에서 주어다가 반납 하려던 총으로 두 사촌이 총을 들고 가서 공포를 쏘니까
두 인민 군이 손을 들고 나와 잡혔다. 어제 밤 밥이 없어진 것도 그들의 소행이었다.
마을에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며 갑론을박 시끄러웠다.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간신히 살아 온 박 형순 아버지는 저들을 미군에게 넘기라 하고, 다른 마을 사람
들은 살려서 돌려보내자고 하였다.
그런데 두 명의 인민 군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었고 27세, 17세였는데 17세 먹은 어린 아이는 살려 달라고
울며 애원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가 불쌍하다며 하얀 옷을 갈아 입혀 너희들 재주껏 도망해서 살라고
보냈다. 그 후 한 번도 소식이 없었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고 지금도 싹싹 빌며 울던 어린아이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해서 6.25의 참화는 두메 산골에서 태어난 행운으로 별일 없이 지나가나 했다.
그런데 마을에 또 큰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가 사촌 형님을 죽인다는 쪽지를 써서 마을 담 틈 사이에 끼워 놓은
거였다. 발견하고 여론이 들끓을 때 마침 최 병선이라는 친척 아저씨가 휴가 나와 계셨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그렇지 안 해도 우리 사촌 형님 생사를 오가며 살다 목숨을 견지셨는데 누가 그 짓을 했으니
아저씨는 정신이 바짝 드셨다. 더구나 아저씨는 형님을 잡으러 왔던 서포 리에 사시는 분이셨다.
마을 사람들을 동네에서 제일 큰 집에 모이게 하고 (큰집, 우리 집, 심복동씨 집 3 가정은 제외) 모두를 엎드리게
하고, ‘내 조카 죽이겠다고 한 놈 나오라. 만일 나오지 않으면 너희들 모두 쏘아 죽이겠다’ 하시며 하늘에 공포를
쏘아댔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마을 사람들은 바들바들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누가 나오겠는가?
그렇게 6.25는 지나갔다.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상기 시키는 것은 이렇다.
해방된 지 79년이 지났고 6.25 사변이 지난 지도 74년이나 지났다.
해방이 되어서는 좌 우익으로 갈라져 싸웠다. 그러나 그때는 분명히 좌우가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좌우가 구분이 되는가?
월남 패망의 원인을 아는가?
티우 대통령 통치 하에 미국이 그리고 우리 국군이 목숨 바쳐 그렇게 싸웠는데 어찌 월남은 패망 하였던가?
부통령이 간첩이었고 대통령 실장이, 경찰 총장이, 야당 지도자, 종교 지도자, 학생 운동가, 언론 수뇌부가
모두 월맹의 첩자였으니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국민은 진정 모르는가?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 건가?
진정 적화통일이라도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가?
개구리가 솥에 갇혀 서서히 끓는 물에 죽어가듯이 나라가 서서히 개구리 꼴이 되어 가는 것 정녕 모르고 있단
말인가?
통일을 원하는가? 무슨 통일? 그리고 통일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는가?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면 참으로
한심한 국민이 아닌가?
자고 일어나면 ‘준다, 또 준다’는 소리에 제 살 깎아 먹고 결국은 뼈만 남는 것 모르는가?
이미 퍼주다가 나라가 폭 망하는 것 여러 나라에서 보지 않는가?
답답하다.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렇게 패망의 길로 가도록 한 단 말인가?
슬프다. 온 국민이여! 정신을 차리자. 그래서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자.
<끝>
첫댓글 평야지대인 미면 外 처음 접하는 소식이며,
용천산 전투는 조금 저로사는 뉸여겨볼 내용입니다.
구체적 내용은 이야기 할수 없고 어린나이에 뭐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귀" 동냥도 못해보았으니 저번 글도 약간 비쳤고
오늘글은 조금 느낄정도 입니다.
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뚝 배기님! 제가 5학년 때 일이고 다행히 저희 고향은 3개월만 공산 치하였기에 생생히 기억합니다.
글에도 있지만 인민군이 와서 패퇴할 때 금강을 넘으로 했었는데 인천 상륙작전으로 금강을 넘어도
그들이 더 이상 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 가지 못하고 용천산 인민군과 대야에 있던 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다음 날 그들이 도망 가면서 버리고 간 군수 물자를 저희 동네 어른들이
다 수습하여 지서에 갖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지리산으로 도망 가서 빨치산이 되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