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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_진리가 인기가 없는 이유
진리는 예수님 시대에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현시대에도 인기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고, 들으면 불편하기도 한 진리에 사람들이 가까이 오거나 받아들이기를 머뭇거린다. 그것은 진리가 요구하는 조건이, 진리가 이루어 낼 역사가,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 초래될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진리가 제시해주는 길은 사람의 본성과 대치된다. 그러나 받아들이기만 하면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을 보장해 주는 지름길이 된다. 진리가 그렇게 인기가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1) 아부하지 않고 드러내기 때문에
진리는 아부하지 않는다. 진리는 달래주지 않는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노출시킨다. 유대 백성이 메시야되신 예수님의 진리를 거절한 이유도 그랬다. 그분의 진리는 그들에게 아부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상태가 양호하다고 달래주거나 그들의 형편이 괜찮다고 위로해 주지도 않았다. 그 대신 진리는 영적 교만에 가득 차 있는 유대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위선을 드러내었다. 선민사상의 우월감과 거짓 경건의 기만을 탄핵했으며 그것들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진리가 드러내는 자신들의 진정한 상태를 인정할 수도 없었고, 인정하기도 싫어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고 그들의 처참한 영적 형편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진리에 그렇게 대항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나사렛에서 메사야에 대한 첫거절이 일어난 이래로 이런 현상은 세상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진리가 가진 환한 빛이 영혼의 구석 구석을 살피고 버려야 할 것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리는 항상 인기가 없으며 자신들의 형편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람들은 진리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만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학식과 경건을 칭찬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를 기쁨으로 환영했을 것이다. 그 당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욕망은 성전 봉사에서까지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였고,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들의 칭호가 불려지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 손님들은 신분에 따라 좌석에 앉았는데,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제일 주목을 받고 특권을 누렸다. 이런 명예를 얻으려고 늘 계획을 세우며 경건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의 전부인 그들의 삶을 예수께서는 견책하셨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5). 예수님의 분명한 진리는, 마음은 탐욕과 질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거짓된 겸손을 나타내며 지위와 권세를 얻으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이기적 야망을 드러내었다. 순결의 화신인 그리스도의 생애는 부정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생애와 대비되었으며, 흠 없고 완전한 그분의 생애는 죄악적인 동기로 점철된 그들의 생애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진리가 내리는 진단과 선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그렇게 크신 하늘의 치료자가 그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치유를 받지 못했다.
** 오늘의 적용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애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진리에 가까이 오기를 꺼리는가!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말해주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복하기를 얼마나 머뭇거리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완전한 생애가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를 풀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진리가 내리는 진단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예수께서 유대 백성들의 영적 곤고함과 불신과 헐벗음을 말씀시자 자신의 상태가 그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한 그들이 화를 낸 것처럼, 오늘 날에도 진리가 다가와 우리 자신들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기보다 화를 낸다. 영적인 교만이 진리와 싸운다. 진리가 진언하는 그 사항은 다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치료하는 진리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헛되게 흘러 떠내려 가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이방인 과부와 나아만보다도 못하고,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메시야의 선고를 듣고 분노했던 유대인들의 마음이 오늘 날의 우리의 마음은 아닌가? 진리가 내리는 선고가 내 자신에게 해당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마음은 겸손할까? 그리하여 진리의 날카로운 칼로 육신의 가죽을 베고 부드러운 새 살 같은 새 마음으로 진리 앞에서 배우기 위해 무릎을 꿇을까? 아부하지 않는 진리가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진리는 인기가 있는가?
2) 고정관념과 유전을 깨뜨리기 때문에
유대 백성들이 메시야를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진리가 그들이 가진 유전, 곧 잘못된 메시야관, 인간이 세운 교리와 관습과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육을 받은 유대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누리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잘못된 메시야관을, 그들이 만든 고정관념ㅇ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증오의 대상인 로마를 지배하고 세계 대 제국의 부귀영화를 누릴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의 초라한 가옥과 빈약한 양식과 보잘껏없는 의복을 윤택한 저택과 편안한 세월과 정복자들의 것같은 호사스럽고 값진 의복으로 바꿔주시기를 바랬다.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이 미구에 주의 택하신 백성으로 열방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고 예루살렘은 전 세계 왕국의 머리로 높임을 받게 되리라는 의기양양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과 교훈은 그들의 고정관념을 산산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완고한 유전을 고수하는 사람들이었다. 외형적 의식에 엄격하였고 씻고 금식하고 긴 기도를 드리는데 부지런하였으며 구제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헛되이 경배한다고 선언하셨다. 유대 백성들은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전과 성경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이 그것을 가려 참 진리를 보지 못했다. 표상과 상징 속에 위대한 구속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 제사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메시야가 이 땅에 왔을 때에 그분이 바로 이 표상들이 가리키는 실체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증거가 그렇게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진리가 그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유전을 버리는 단호한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처세법과 유전과 이기적이고 불경건한 습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변의 진리,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는 큰 희생이 필요했다.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회개해야 할 것을 알고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지만 그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그들의 야망에 맞지 않았다.
** 오늘의 적용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유전을 깨뜨린다.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알아온 기존의 가르침과 오류가 섞인 교리와 인간의 관습을 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 중에 나오는 사람이 땅 속에 감춰져 있는 보화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마 모든 것을 버리고 청산하는 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진리는 고정관념과 인간의 유전을 깨뜨리기 때문에, 전통과 혈연관계와 자신의 속한 사회를 떠나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진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팔고라도 소유할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피상적으로 믿는 것을 좋아하지, 자신의 믿는 바가 성경이 말하는 진짜 진리인지 알아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진리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관념, 교회의 고정관념, 또한 자신의 안일한 사회생활의 범주를 개뜨리는 것이 될 때에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짙다. 곧 진리를 원하되, 자신이 원하는 범주 내에서만, 그렇게 큰 변화와 개혁이 요구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진리를 부인하는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진리의 보화를 열심히 찾고 있다. 이기심과 야망으로 가득 찬 세속적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하늘의 보화를 찾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보다 처세술과 유전과 사람의 제안을 더욱 존중하고 있다. 우리은 어떤가? 진리가 하나님의 뜻과 맞지않는 우리의 관념과 개념을 부술 때에, 진리가 성경에 배치되는 오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줄 때에 그 참된 권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가?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그동안 내려오던 교회의 전통과 유전을 꺾어 버리고 진리가 제시하는 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말하는 곧바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를 거절한 사실과 똑같다. 현대 기독교는 인간이 바꾼 교리와 인간이 만든 유전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위에 놓았던 유대인들과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는 아직도 메시야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3) 쪼개고 잘라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진리, 성령의 검으로 표상된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는 진리로 거룩하게 성화 되는데, 그것은 진리의 칼이 인간의 죄된 속성을 다 쪼개고 잘라내기 때문이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새기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은 죄인의 마음을 파고들어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을 잘라낸다. 비록 그 과정이 아프지만 그런 진리의 역사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된다.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마치 누룩이 작용하듯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난다. 진리는 거룩하지 않은 욕망과 세속적인 욕심, 그리고 악한 성질을 복종시킨다. 거친 행동과 난폭한 기질이 부드럽고 온순하게 변하며, 교만과 경쟁심이 사라지게 된다. 진리는 인간의 죄된 본성에서 치밀어 오르는 모든 악한 정욕들을 베어낸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우상들과 정면으로 대치하여 그 우상들을 다 깨뜨린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거하시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몰아낸다. 진리는 인간의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배양된 품성과 생활습관과 자주 충돌하지만,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순복하게 될 때, 그 진리는 삶과 생활의 전반적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 아름다운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매일 진리의 말씀을 연구할 때에, 그 진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부정한 것들을 잘라내주고 죄를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진리로 자신을 개끗하게 하고 진리로 자신을 살피는 사람들은 그렇게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를 싫어하고 가까이 오지 않는 이유는, 진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내기 때문이다. 자아의 그루터기를 베어버리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의 역사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거절한다.
** 오늘의 적용
우리는 진리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살후 2:10). 진리의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는, 심령에 있는 모든 죄악적인 것들을 쪼개고 잘라내는 진리의 역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에 순복하여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자신을 꼴지우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표현했다. 진리는 영혼을 개끗하게 하는데, 더러운 모든 것들을 잘라내고 새로운 동기와 의욕을 갖게 하며, 영혼을 완전한 새 피조물로 탄생하게 한다. 당신은 그런 진리의 역사를 허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진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3~5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매일 섭취하고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와 살과 피를 이루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생활과 성품에 함께 짜여져야 한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과 동화되므로, 진리가 우리 생명의 한 부분이 되고 생애와 행동의 동기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명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경험이 매일의 경험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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