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까지는 주제의식이 선명한 영화, 이를테면 <리바이어던>, <내부자들>, <사도> 같은 영화를 주로 소개하셨는데, 오늘은 무협영화를 들고 오셨군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락이나 시간 때우기로 영화를 대할 수도 있고, 감독이 제기하는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사유할 수도 있습니다. 김동환 감독의 기록영화 <송환>이나 박기복 감독의 <영매>처럼 한국사회의 단면을 성찰하도록 인도하는 영화도 있지요. 공포나 누아르 같은 장르에 관심 있는 관객도 적잖을 터이고요. 또는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캐롤>이나 <대니쉬 걸> 같은 동성애 관련 영화에 주목하는 분도 있습니다.
무협영화는 본디 홍콩이 대표하는 장르였는데,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대만과 중국 등 중화권 전역으로 확산되었지요. 창술, 검술, 권법과 함께 소림파, 무당파, 아미파, 개방파, 곤륜파, 화산파 등 6대문파의 비기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극의 <소오강호>나 <동방불패>에 공상과학 요소가 개입되면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조류는 얼마 가지 않아 시들해지지만요. 한국 남성관객 가운데 무협영화 좋아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분들과 무협영화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자객 섭은낭>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2) 후효현 (허우샤오시엔) 감독을 알고 가는 것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후효현 감독은 1947년생이니까 올해 우리 나이로 고희를 맞았군요. 1980년 <귀여운 여인>으로 데뷔해서 지금까지 21편의 영화를 감독했습니다. (1990년에 나온 리차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인>과 다른 영홥니다.) 후효현 감독은 에드워드 양 감독과 함께 대만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입니다.
그는 대만역사 3부작으로 이름을 떨치는데, <비정성시> (1989), <희몽인생> (1993), <호남호녀> (1995)가 그것입니다. <비정성시>로 1989년 베네치아 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희몽인생>은 199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그에게 안겨준 작품입니다. 대만의 과거와 현재를 중국본토와 관련지어 사유하는 후효현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자객 섭은낭>은 상당히 이질적인 성격의 무협영화입니다.
3) 아까 말씀하신 서극 감독처럼 무협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무협과는 거리를 둔 감독들도 있지 않습니까?!
<붉은 수수밭>이나 <홍등>, <귀주 이야기>와 <인생>,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 장예모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2002년 <영웅>과 2004년 <연인> 같은 무협영화를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영웅>은 영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국가주의로 전환된 첫 번째 영홥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자객 ‘형가’ 이야기를 손질한 것인데, 천하통일을 위해서 개인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국가주의, 대국주의, 전체주의 시각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연인>은 사랑하는 여인 하나를 두고 벌이는 호쾌한 무협이 펼쳐지는데, 이 작품 역시 그 동안 장예모의 영화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반적인 무협영화와 성격이 판이한 영화는 왕가위의 1994년 작 <동사서독>과 이안의 2000년 작 <와호장룡>일 겁니다. 대개 무협은 가문이나 국가, 혹은 복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주인공이 그것을 완수하거나 혹은 비장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동사서독>은 엇갈린 사랑과 운명으로 괴로워하는 남녀의 내면풍경을 담아냅니다. <와호장룡> 역시 특별한 선악대결 없이 사랑으로 엇갈린 주인공들의 우수에 찬 흉중을 수채화 풀어놓듯 전개해 나갑니다. 상당히 독특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4) 그렇다면 후효현 감독의 <자객 섭은낭>도 앞서 얘기하신 왕가위의 <동사서독>이나 이안의 <와호장룡> 같은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자객 섭은낭>은 말씀하신 두 영화보다 무협이 훨씬 덜 중요합니다. 화려한 중국무협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안 보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섭은낭이 바라보는 인생과 관계와 인연입니다. 어릴 적에 두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정혼이 외부적인 간섭으로 깨지는 바람에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 섭은낭과 전계안에게 밀려옵니다. 그들은 13년 동안 각자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섭은낭은 그동안 최고의 살수이자 자객으로 성장하고, 전계안은 위박 번진의 수장으로 아내와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5) 영화의 설정이 흥미롭다고 들었습니다. 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살짝만 알려주시죠!
섭은낭의 아버지는 전계안의 고모부입니다. 그는 전계안의 어머니 가성공주의 오빠인 거죠. 사촌들의 혼인이 일반적이었던 8세기 중국 당나라가 시대배경입니다. 가성공주는 섭은낭과 전계안에게 정혼의 증표를 주었지만, 권력 강화를 위해 전계안을 전원씨라는 여인과 혼인하도록 합니다. 가성공주의 쌍둥이 동생 가신공주가 섭은낭을 거두어 자객으로 길러냅니다.
섭은낭은 정의롭지 않은 자들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한칼에 벨 수 있을 정도의 고수로 성장합니다. 영화 첫머리에 나오는 흑백화면은 그것을 웅변합니다. 그런데 가신공주는 섭은낭에게 예전의 정인이었던 전계안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제는 남남이 되었지만 과연 섭은낭이 전계안에게 칼을 들이댈 것인지, 그것이 관심사가 됩니다.
6) <자객 섭은낭>에서 관객들이 유심히 들여다보고 생각할만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최고의 살수로 길러진 섭은낭의 내면세계가 화면에서 여러 각도로 출렁거립니다. 전계안이 아내와 자식들과 있을 때 혹은 애첩과 사랑을 속삭일 때 커튼 너머로 섭은낭은 풍경처럼 고요하게 서 있습니다. 그녀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다단할 것인지,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화는 절제된 음향효과에 주력합니다. 작은 북과 피리로 섭은낭의 심리상태를 포착합니다. (이것은 <와호장룡>의 속도감 있는 큰북과 대조됩니다.) 사랑 때문에 자객이 되지 못한 섭은낭의 구원과 희망은 어디 있을까, 그 점을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