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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시일까 너무 나쁜 시일까? - 김창완(시인)
국립국어원은 지난해(2015년)에 부정적인 내용과 어울려 쓰는 부사 ‘너무’를 긍정적인 내용과도
어울려 쓸 수 있게 《표준국어대사전》의 내용을 수정했다.
‘너무’는 원래 ‘너무 작다’ ‘너무 힘들다’ ‘너무 고르다 눈먼 사위 얻는다’처럼 부정적인 내용과 어울려 쓰는 부사로서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고맙다’ ‘너무 사랑한다’ 같이 긍정적인 말과 어울려 쓰면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쓰지 않지만 그래도 써야 한다면 긍정적인 말들 뒤에는 반드시 부정적인
내용이 와서 ‘너무 좋아서 잠을 자지 못했다’
‘너무 예뻐서 도화살이 보인다’ ‘너무 고마워서 마음의 짐이 됐다’
‘너무 사랑해서 헤어지기로 했다’처럼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져야 말의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너무’를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를 이르는 말’이라고 수정하여 긍정적인 내용과도 어울려 쓸 수 있게 함으로써 말의 논리를 허물어 버렸다.
‘너무’를 감탄사처럼 써서 긍정적인 내용을 더욱 긍정적으로 강조해서 ‘너무 좋아요’ ‘너무 예뻐요’ ‘너무 고마워요’처럼 쓰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지만, 그것이 잘못된 말인 걸 알고 쓰지 않는 사람도 많고, 잘못된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고쳐 주려 애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렇게 내용을 잘 알기 때문에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무시해 버리고 잘못이 잘못인 줄조차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써 대는 사람들 편을 들어 줌으로써 지금까지 국립국어원이 정의한 대로 열심히 전도사 역할을 하던 국어 교사, 잡지 신문 기자, 방송 아나운서, 문인을 비롯한 ‘우리말 지킴이’ 자원봉사자 역을 해 오던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어쨌든 부정적 의미에 써야 하는 말을 인제는 긍정적인 의미에도 써도 된다고 하니 이 사회가 부정과 긍정의 가치관이나 기준이 뒤섞여 버리는 혼란을 겪지 않을까 지레 겁이 난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고의 집이니까.
이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따지며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언어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이쪽에 붙기도 하고 저쪽에 붙기도 하면서 적당히
살라고 부추기는 쪽으로 가고, 국립국어원은 잘못 쓰는 언어를 바르게 쓰도록 계도하는
일을 포기해 버린 채 대중의 언어 현실만 따라다니면서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고
오히려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규칙에서 벗어난 말을 자꾸 인정하다 보면 우
리말은 언젠가는 마구잡이로 써도 되는, 그래서 오히려 혼란스러워 배우기 힘든 말이 되고 말는지도 모른다.
부정과 긍정의 울타리가 무너진 가치관의 혼란은 벌써 문학 작품들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갈라진 교육>(심지현)이 그 좋은 예이다. 시 부문 당선작이라고 하는데 화자가 어린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어린이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동시로 분류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장르의 장벽을 만들어 놓고 공모하는 신춘문예에서는 자기 장르가 아닌 다른 장르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 심사위원이 작품의 장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까막눈으로 작품을 심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빠 내가 화장실 가다가 들었거든, 내일 아줌마가 우릴 갖다 버릴 거래. 그 전에 아줌마를 찢어발기자.
우리가 죽인 토끼들 옆에 무덤 정도는 만들어 줄 생각이야. 토끼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건
오빠의 즐거움이잖아. 아줌마는 가슴이 크니까 그건 따로 잘라서 넣어야겠다.
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 여긴 아줌마가 오기 전부터 우리 집이었어, 난 절대 쫓겨나지 않을 거야.
너 시들지 않는 새엄마를 시기하고 있구나. 아버지가 무능해서 고생하는 예쁜 나의 새엄마. 그녀가 나를 버려도 괜찮아. 개처럼 기어가서 굶겠다고 말하면 그만인걸. 그게 안 먹히면 그녀의 가슴을 빨고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 잠 설치는 아이를 달래는 척 밤마다 날 찾을지도 몰라. 자꾸 커지는 나를 본다면 오히려 그녀는 아이가 되겠지. 아, 못생긴 엄마가 떠나면서 주고 간 선물. 예쁜 우리 새엄마!
심사위원(황현산, 김사인)은 심사평에 이렇게 썼다.
“심지현의 당돌함 앞에서 우리는 불편한 동시에 낯설다. 독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시들은 어딘가 불균형한 듯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새롭고 생생한 발화로서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정면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을 삶과 세계의 잔혹과 비극성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 슬픔과 상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의 언어들은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노련과 안정감보다 심지현의 이 용기와 젊은 당당함 쪽을 선택했다.”
남다르기만 하면 그것이 새로운 발화이고,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내뱉기만 하면 그것이 용기이고, 젊기만 하면 그것이 당당함일까? 새로운 발화, 용기, 젊음의 당당함 같은 지엽적인 데 한눈팔다 시가 시이어야 하는 본질을 망각해 버렸다. 마치 소설의 한 장면을 발췌해 놓은 듯 산문적 수사로 이루어진 이 글은 기본부터 시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시를 고를 때는 먼저 시가 되는지 시가 안 되는지부터 살펴보고 나서 다른 지엽적인 장점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시란 한마디로 말해서 사무사(思無邪)’라고 말한 공자의 말을 틀린 말이라고 부정하는 시각을 가지고 ‘시란 사유사(思有邪)’라고 우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시가 아닌 것을 시라고 착각하고 있는, 좀 더 아프게 말하자면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심사위원이라는 권력을 휘둘러, 분노와 증오에 차서 내뱉은 저주를, 딸은 계모를 죽이자고 제의하고 아들은 계모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비윤리적이다 못해 패륜적이기까지 한 막돼먹은 낙서를 ‘이게 좋은 시야’ 하고 당선작으로 뽑아서 선양했다. 부정적인 가치관이 긍정적인 가치관을 제압한 가치의 혼동을 ‘너무’ 극렬하게 보여 준 심사 결과이다.
이 글에 동원된 언어들을 보면 아직 시로 승화되지 못한 직설적 배설물들이다. 중국 청나라 때의 문인 오교(吳喬)는 “산문과 시가 나타내는 뜻을 쌀에 비유한다면, 산문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이요 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이라고 했다. 똑같은 쌀(단어)을 재료로 만든 음식(작품)이라 해도 밥(산문)은 쌀알이 그대로 남아 화학적 변화를 거치지 않은 것임에 비해 술(시)은 쌀알이 삭아서 없어지고 온전히 다른 형태의 음식으로 거듭 난 것이다. 밥은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만 술은 우리를 취하게 한다.
심사평을 읽어 보면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시를 왜곡하고, 시가 지녀야 할 모든 전통적 기준과 품격을 낡아서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 최소한의 가치마저 버린 채 동물이 되기를 권하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무시해 버렸는지 알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격리 정책에 반대해 만델라와 함께 평생을 싸운 시인 오스월드 무샬리는 “시는 우리를 선량한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시는 악을 배척하고 선을 옹호한다. 악에 바탕을 둔 악의 마음은 새로움, 용기 같은 말로 아무리 치장해도 시가 될 수 없다. 애초에 시가 아닌 것을 시라고 우겨대는 위록지마(爲鹿指馬)에 속으면 안 된다. 이른바 심사위원이 위록지마에 속아 말을 사슴이라고 우기면서 시가 아닌 잡설을 당선작으로 뽑은 웃지 못할 ‘사건’을 만들어 냈다.
오세영 시인도 “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기여해야지 인간의 존재를 해체하고 감수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건강한 정서는 시의 아름다운 덕목이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토인비는 “시란 광부가 갱도에 갇혀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해 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는 희망과 같은 것”이라 했고, 셀리는 “시는 가장 좋고 가장 훌륭한 순간의 기록”이라 했고, 아폴리네르는 “시는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으로 이끈다.”고 했고, 위렌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라 했고, 보들레르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속에 이상을 좇는 신이 있다.”고 했고,
또 “시는 어디에서나 부정(不正)을 부정(否定)한다.”고 했다. 부정(不正)을
부정(否定)하지 않고 부정(不正) 긍정하고 찬양하는 비시(非詩)를 시라고 보는
사시(斜視)로 심사했음에 틀림없다.
<갈라진 교육>과 같은 시로 위장한 배설의 언어가 끼치는 해악이 인간의 정서에 미치는 악마적 영향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그런 악마적인 막말이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정서의 감동을 고양시키는 참된 시를 몰아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무섭다.
경향신문 심사위원들과 같은, 가치 기준이 전도되어 시의 본질조차 거꾸로 보는 어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초등학생 어린이가 2015년에 동시집을 펴내 말썽이 되었는데, 이 동시집에 실린 이른바 ‘잔혹 동시’로 알려진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읽어 보면 <갈라진 교육>과 그 정신세계가 놀랄 만큼 닮았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 파먹어
이빨을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이런 폭언을 어떻게 동시라고 할 수 있을까. 사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를 수는 있겠지만 떠오르는 생각이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토해 내는 폭언은 시가 될 수 없다. 시는 생각을 갈고 다듬은 다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까지도 갈고 다듬은 보석이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는 자연일 뿐 예술이 아니다. 사람의 동작을 갈고 다듬어 새로운 몸짓으로 표현한 것이 무용이고, 사람의 목소리를 갈고 다듬어 새로운 소리로 표현한 것이 음악이고,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갈고 다듬어 새로운 형태와 색으로 표현한 것이 미술이고, 사람의 생각을 갈고 다듬어 새로운 언어로 표현한 것이 문학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에는 시정신이라는 숭고한 가치가 핵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시정신의 농도에 따라 예술성의 수준도 정해진다.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초등학생이 마치 식인종이나 된 듯이(식인종도 동족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하물며 가족임에랴) 엄마를 씹어 먹고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눈깔을 파먹고 심지어는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겠다는 둥 뼛속 깊이 증오와 저주에 가득 찬 끔찍한 생각을 감히 동시라고 부르다니.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글로 써서 동시라는 탈을 씌워 발표하고 그것을 책으로 펴내다니. 엄마라는 사람이 이런 자식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여기며 영재라는 착각에 빠지다니. 혹 <학원 가기 싫은 날>의 내용은 아이의 진심이 아니라 ‘동시’로서 썼을 뿐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시란 ‘허위’ 또는 ‘거짓’이라는 말인가? 진실의 가장 순수한 결정체여야 할 시는 낡은 시일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된다고 했으니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악마 같은 행동을 저지르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잖아도 우리 사회에는 부모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패륜아가 넘쳐나고, 사람을 죽여 토막 내서 유기하는 흉악범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인육을 캡슐에 담아 판매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한 사건이 빈발하는, 공포 영화보다 더 무시무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회를 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시일까, 이런 무시무시한 사회를 더 무시무시하게 하자고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이 시일까?
두 글이 도긴개긴이긴 하지만 <학원 가기 싫은 날>이 <갈라진 교육>보다 더 위험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갈라진 교육>을 쓴 사람은 성인이지만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쓴 사람은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다. 성인은 정신과 영혼이 오염되어 삿된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어린이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로서 소중한 존재이다.
둘째, <갈라진 교육>은 계모를 저주하지만 <학원 가기 싫은 날>은 친엄마를 저주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계모는 악의 표본일 수 있지만 친엄마는 선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계모를 저주할 수는 있지만 친엄마를 저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건강한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셋째, <갈라진 교육>은 저주하는 이유가 ‘우릴 갖다 버릴’ 거라는 절박함 때문인 데 비해 <학원 가기 싫은 날>은 ‘학원에 가라’고 잔소리하는 사소함 때문이다. 이런 사소함에 저렇듯 분노에 찬 저주를 퍼붓는 것을 보면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모르는, 또는 분노의 수준을 어느 정도에서 조절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상식적 판단력에 장애가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넷째, <갈라진 교육>은 찢어발기더라도 ‘무덤을 만들어 주자’는 일말의 양심을 보여 준 데 비해 <학원 가기 싫은 날>은 무덤은커녕 잔인함의 극치인 눈깔을 파먹고 삶아먹고 구워먹겠다는 둥 훨씬 더 강도 높은 행위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구체적으로 써서 양심이라고는 아예 싹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조절장애를 솔직한 것으로 착각하고 박수쳐 주는 어른들이 더 큰 문제이다.
다섯째, 출판사까지도 상업주의에 눈이 멀어 이런 어린아이의 글을 책으로 펴내 돈벌이할 생각이나 하는 한심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변명이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
이런 표현의 자유는 너무 좋은 자유일까 너무 나쁜 자유일까, 아니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나쁜 자유일까 너무 나빠서 오히려 좋은 자유일까?
이런 시는 너무 좋은 시일까 너무 나쁜 시일까, 아니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나쁜 시일까 너무 나빠서 오히려 좋은 시일까?
‘너무’가 너무 헷갈리게 해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가치관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가치관인지 아리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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