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수도회] 받아들임이 낳은 사랑의 절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3,9-15.20
† 제2독서 에페 1,3-6.11-12
† 복음 루카 1,26-38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믿음은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면서 요셉 성인을
공동 수호자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요셉 성인과 함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신 성모님의 전구는 한국 교회가
기나긴 박해의 아픔을 이겨 내고 꿋꿋하게 순례의 길을 걸어올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유혹과 위험을 만나고 있는 우리 교회가
세속의 가치관과 방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알려 주신 복음의 길을 따르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 인간의 죄와 벌에 관한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어
축복하셨으나, 사람은 주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죄를 짓는다.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사람들 서로의 관계가
깨진다(제1독서).
★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이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녀가
되도록 안배하신 것이다(제2독서).
★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예고이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자, 마리아는
이에 순종한다. 하와의 불순종과는 대조적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내게 알려 다오. 먼동이 트기 전에 떠올라, 낙원에 아침 여명으로 서 계신
저 여인이 누구신가?/ 그분은 먼 곳에서 나타나, 달과 별로 치장하시고
태양 광채 속에 높이 올리시는 분./ 그분은 고귀한 장미, 더없이
아름다우시며 간택되신 분이며, 주님과 혼인하신 흠 없으신 주님의 종./
(중략) // 성모 마리아님, 당신은 태양 속에 빛나시며, 환하고 정결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드님에게서 당신의 모든 빛이 옵니다./
이 은총의 광채로써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참된 빛을 향해 가나이다.”
‘말하여라, 이 여인이 누구이신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시는 독일의
요하네스 쿠엔의 작품입니다. ‘30년 전쟁’, 곧 1618년에서 1648년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 사이에 일어난 종교 전쟁의 참극 속에서
나온 시입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것 같은 아름다운 성모
성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일어권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가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사를 음미하며 절망 중에도 성모님에게서 드러난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러르며 희망을 찾고, 성모님의 전구와 보호를 간구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우리를 성모님께서 세상에 보여 주시는 희망의 원천으로
인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둠과 고통이 짙은 지상의 삶 속에 먼동이 트듯
다가오시는 성모님과 일치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기쁨과 희망을 주는 이 확신의 길을 꿋꿋이 걸을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 1,26-38
끊임없이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씨가 잘 써지지 않으면
펜이 나빠서라고 합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부모님을 닮아서라고
합니다. 수능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너무 쉽게 나와서 변별력이
없어서라고 합니다. 취직이 안 되는 것은 회사가 나의 능력을 알아 보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은 대화가 되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진 것은 재수가 없어서라고 합니다. 투자를
잘못해서 손해를 본 것은 시기가 안 좋아서라고 합니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은
그래서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말을 합니다.
작년에 신학교 지원자 중에 11명만이 합격을 했습니다. 적은 인원을 뽑은
신학교 측이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는 선발 기준이 있었고,
선발 기준에 해당되는 학생들만 뽑았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올해는
신학교의 선발 기준을 통과하는 학생들이 작년보다 많았습니다. 신학교를
탓하고, 원망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의 선발기준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을 하였고, 매 주 한 번씩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신학교의 선발 기준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고, 학생들이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작년보다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듯이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다만 나에게 주어진 시련, 고통, 아픔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여겼습니다. 남의 탓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은 나의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나의
허물과 잘못은 없었는지를 살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당당하게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을 함께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는 대들보가 있어야 하고, 창문도 있어야 하고,
지붕과 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떠한 위치이든지
모두가 아름다운 집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도, 부는 바람도, 차가운 겨울도, 떨어지는 나뭇잎도 소중하고
아름답게 바라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성모님께 아픔이 없으신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께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십시오.’ 그러기에 성모님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하지만 체질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혈압이 높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고, 치아가 약한 것입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어도, 저는 부모님께로부터 이런 모습들을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제가 성장하면서
바꾸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저는 공부하고 노력하여 저만의 것들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부모님과는 다른 모습을 살기도 합니다. 특히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은 부모님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통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오늘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가져야하겠습니다. 또한 주어진 현실에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합시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받아들임이 낳은 사랑의 절정/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루카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받아들임이 낳은 사랑의 절정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사실은, 구원의 신비
속에서 인류가 고대하던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시기에 앞서, 그분을
담으신 그릇을 준비하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신다!” 하는 것이,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는 중대한 목적이라면, 죄에
물든 자가 죄를 구속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부와 같으신 분을 죄
있다고 할 수 없고, 더구나 원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처럼 하느님과 같이 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를 몸에 배어
품으신 분을, 또한 죄에 물들었고 죄 있다고 할 수 없다고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육화, 태중에서 세례자 요한이 기뻐 뛰놀음, 마리아의 찬가와
목자들의 기쁨, 동방박사들의 빛, 시메온과 한나의 위로 등 이 모든
사건들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준다. 이 모든 것은
‘천지창조 이전부터’(에페 1,4) 준비된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자유
안에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셨다. 처녀의
몸으로 돌에 쳐죽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됨에도 말이다. 또한 성모님은
예수님처럼 ‘순명’으로 인한 고난을 겪었다(히브 5,8; 필리 2,8 참조).
“그녀는 순명으로써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다.”(성 이레네오,
Adversus haereses, III, 22,4) 그 결과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하느님의 죄 없음 곧, 선(善)을 모든 이에게 나르기 위한
예수님의 구원 여정에 늘 함께 하셨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본보기이다. “마리아는 성부의 뜻을
완전히 행하였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일은 그리스도의 모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에서 나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한 자유 안에서 따르며, 어떤 고통이 뒤따른다 해도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성모 마리아께서는 새로운 하와로서 ‘이 세상의 유일하고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낳음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 성모님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인 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측하면서도 자신의 인간적
나약성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함으로써 구원을 향한 엄청난 역설들을
철저히 받아들인다. 이 역설 가운데서 성모님께서 받아들인 극단적인
희생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불러온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
하고 말한다. 바로 이 말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무상성(無償性)이 가장 철저하게 드러나고 있다. 성모님을 통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자비의 절정이 바로 ‘하느님의 육화’(예수님의 성탄)
이다.
‘은총이 가득한’이란 표현은 그리스어 현재완료 수동태 분사형의 번역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앞서 오직 마리아에게 이루어주신 그 사랑, 특별한 은혜,
아름다움, 거룩함 등의 상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
사실이 마리아가 처음 몹시 당황하였을 때 천사가 그녀에게 한 응답에 잘
나타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1,30) 하느님의 창조적인 ‘무상성’에 인간의 응답과 협조가 더해짐으로써
하느님의 그 철저한 무상적 선물이 더욱 더 고양되고 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마리아는 이렇게 천사에게
응답함으로써 ‘은총’을 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였고 ‘인간성’이 새롭게
창조되게끔 하였으며, 그녀 자신이 그 ‘인간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범이
되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한없는 사랑에 나의
온 마음과 혼을 더해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며
사랑이신 분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너 어디 있느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뉴튼수도원 28일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창세3,9-15.20 에페1,3-6.11-12 루카1,26-38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 1,26-38
"너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정신 번쩍 나게하는 말마디가 '너 어디 있느냐?'
라는 하느님의 물음입니다. 하여 지체없이 강론 제목은 '늘 어디 있느냐?'
라고 정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 사람인 우리 모두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이라 하지 않고 그냥 '사람'이라 쓰는 명칭에 주의를 요합니다.
바로 우리 보편적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과연 제 자리에서 제 정신으로 제대로 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인지 묻습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거나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밖의 외적 환경에 있는 게 아니라 안의 내적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가난하고 거친 환경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 하느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에 있다면 천국의 행복이요,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불편한 관계로 자유롭지 못하다면 지옥의 불행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사람'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립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면 이는 유령입니다. 제대로의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불순종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아내인
여자와의 관계도 무너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먹었습니다.“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인 하느님'과 '여자'에 있다는,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란 말입니다. 적반하장,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뉘우치는
용기가 전무합니다. 여자 역시 책임을 지지 않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둘다 변명과 핑계에 급급합니다.
관계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에 대해 즉시 용서를 청하는
마음입니다. 관계의 파괴로 마침내 에덴 낙원을 상실한 사람과 여자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사람과 여자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즉각 응답할 수 있겠는지요?
창세기 사람과 여자에 대척점에 있는 분이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종'의 신원에 충실했던 마리아의 겸손한 응답입니다.
창세기의 사람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종으로서 제자리에 충실할 때 성모 마리아처럼 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신뢰와 총애를 받는 삶입니다.
뉴튼수도원에서 은혜로이 실감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육신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제 자리의 공동식사 시간이요,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제 자리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 자리'에서 형제들의 '제 얼굴'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이요
위로입니다. 우리의 축복 받은 신원을 알 때 저절로 주님의 종으로서
충실한 삶입니다.
우리의 제 자리는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의 제 자리에 있을 때 죄로 인해 잃었던
품위를 회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복된 제 자리이며 신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유일한 제 자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 할 때 잃었던 낙원의 회복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세상에 하느님 찬양의 기쁨보다 큰 기쁨도 없고, 하느님 찬양의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적 일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영원한 제 자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함으로 우리 모두 온갖 영적 축복을 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찬미 받으소서.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다니3,5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청주] 불가능한 일이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루카1,26-38)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 1,26-38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으니 하느님을 갈망하지 않게 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고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1,38).
마리아는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 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선한 열매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을 요구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합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 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발 씻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 성모님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 1,26-38
발 씻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 성모님
어떤 한 수녀님의 묵상을 통해 저 또한 토비트서가 이해가 되게 되어
토비야가 물고기를 잡는 장면만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토비트의 아들 토비야는 아자르야로 변장한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과
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토비아가 발을 씻겠다고 티그리스
강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고기가 뛰어올라 토비야의 발을
물려고 합니다. 토비야는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만 가브리엘 천사는 그
물고기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물고기를 잡아 배를 갈라 쓸개와 염통과 간을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구워먹고 나머지는 저려서 놓습니다. 천사는 염통과 간은 마귀와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 앞에서 태워 연기를 피우면 그 시달림에서
자유로워지게 되고, 쓸개는 하얀 막이 생긴 사람의 눈에 바르고 입김을
불면 눈이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토비야는 쓸개로는 눈이 먼 아버지를
고쳐주고, 염통과 간으로는 자신의 아내가 될 사라에게서 악귀를 쫒는데
쓰게 됩니다.
우선은 성경에서 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위 이야기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발은 영원한 유혹자인 뱀을 상징합니다. 뱀은 세상
창조 때부터 사람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뱀은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어야하는 벌을 받았기에 인간의 발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도 여자의 후손과 뱀과의 싸움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뱀은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발에 상처를 입히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발에 머리가 밟힐 것입니다. 그런데 뱀이 언제 머리가 밟혔을까요? 바로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가장 정확히 말하자면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뱀의 머리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는 안 된다고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각자의 자아가 곧 뱀이고, 각자의 뜻이 곧 뱀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뱀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세가 장대에 높이 들어 올린 구리뱀처럼 인류의
구원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신다는 것이 바로 당신의
피로써 발을 씻어주신다는 것, 혹은 뱀의 머리를 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의 이야기에서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익투스’라고 불리는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물고기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는 발만 보면 물려고 합니다.
처음엔 베드로가 발을 씻으려고 하시는 그리스도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버리기를 원치 않기에 그분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과
눈을 뜨게 하는 힘을 얻습니다. 즉, ‘피와 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피는 죄를 씻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는 것은 당신의 사랑을 믿고 이젠 자신들의 뜻을 죽이라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은 바로 성령을 상징하는데 바오로가 안수를
받았을 때 눈에서 비늘에 제거된 것과 토비트가 그 물고기의 쓸개로 눈이
치유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피와 물은 한 마디로 ‘성사’를 의미하는데,
그리스도를 꼭 붙드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일 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먼지가 묻는 발, 즉 영원한 원수인 뱀을 죽여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뱀이 발을 물었다면 더 이상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인
그리스도의 희생 외에는 깨끗해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예들이 그 뱀에 물려 독이 스며든 상태로 자녀를 낳기 때문에 그
원초적인 죄가 유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뱀에 물린 모든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그리스도를 낳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독을 지니고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까지도 그 독에 감염이 되어 태어났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한 죄인으로 태어날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그분을 태어나게
하실 분은 뱀에 물리지 않은 분, 사탄의 교만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류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성모님도 미리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성모님은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
물리기 이전에 계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모님이나 그리스도
또한 죄에 물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앞서지만
인류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성모님께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아버지의 가장 사랑받는 딸이며 성령의 궁전이시다. 그런
특별한 은총으로 모든 천상 지상의 피조물들을 훨씬 앞서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또한 아담의 후손이 되시어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과
하나가 되셨다.”(교회헌장, 53)
교회에서 이렇게 명백하게 가르치는데도 굳이 성모님을 첫 번째 피조물로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을 사랑한다면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을 위해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뱀의 독에 물들지 않기 위해 그분을
낳으신 어머니 또한 뱀에게 물리지 않으신 분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도록 자아에게 단 한 번도 물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종으로서만 사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당신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때문이기도 했고 결국 인류 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놀라운 상황이지만 의심하지 않습니다.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 1,26-38
머리를 많이 쓰면 머리가 좋아집니다. 또 주먹을 많이 쓰면 주먹이
강해집니다. 목소리를 많이 쓰면 목소리가 아름다워지며, 많이 웃으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아름다워집니다. 마음을 많이 쓰면 마음이
아름다워지며, 좋은 말을 많이 하면 입이 아름다워집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 무엇을 많이 쓰고 있습니까? 내가 집중해서 많이 쓰고 있는 것을
통해 분명히 그 부분에 나의 강점이 생깁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강점이 될 수 있는 것을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말과 생각, 다른 이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단죄, 미움과 다툼의 생활 등등....
어떤 순간에서도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즉 나의 장점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을 때, 나의 장점은 더욱 더 배가 될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주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느냐?’고 의문을
품으시더군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몸을 직접 보여주시지도 않고,
또 직접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참견하는 것만이 사랑일까요?
어쩌면 사랑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구나.’하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정말로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같이
있자고 보채지도 않습니다. 대신 말없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주고 계실 뿐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그분께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문제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일 때 들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처녀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을 했다고 해서 공개처형을 당하는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잉태 소식은 기쁨의 소식 이전에 걱정과 불안을 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발 내게만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상황이지만 의심하지 않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말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사실을 늘
가슴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상황이어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나의 단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점만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주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면서 나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들을 반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라.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해내는 사람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항상 노력한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아는가?(토머스 제퍼슨)
의미 있는 삶(호아킴 데 포사다, ‘바보 빅터’ 중에서)
제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은 지옥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수감자들은 자살을 하거나 병에 걸려 하나둘씩 죽어갔다. 프랭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진티푸스에 걸리고 만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나치에게 빼앗긴 원고를 되찾아 연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병마를 이겨낸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가치 있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 살아남은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실존분석적 심리치료를 개발함으로써 심리치료 발전에 기여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인생을 바쳐서라도 진정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자연엔 출입금지 장치가 없습니다.
2014년 나해 12월8일 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 1,26-38
자연엔 출입금지 장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상식을 벗어나는 예외라는 일들이 간혹 있는 게 정상입니다.
사람의 과학 의학 여타 기술이 자연계를 완전 파악 정립하진 못합니다.
인간 속성상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자연계의 막중한 크기를 소화 못합니다.
신이나 영들의 세계가 세상에 개입할 때 과학은 오히려 놀라서 물러섭니다.
과학자들이 자연 안에서 늘 새로운 것에 감탄하며 새로운 발견을 하니까요.
자연엔 신령들이 못 들어오게 할 출입금지 장치가 없다는 걸 인정하며
삽시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3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