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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건너뛰는가 싶은 날씨를 지냈습니다. 아침과 낮의 기온 차가 15도를 넘었습니다. 아침에는 점퍼를 입고 나섰다가도 한낮에는 벗어두어야 했습니다. 이런 이상기후를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걱정보다는 느긋함이 훨씬 크게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변화는 없습니다. 그저 당하면 당하지 뭐, 그런 태도입니다. 하기야 수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수년 사이에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빨리 빨리’ 민족이 그런 일에 얼마나 신경을 쓸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아마도 서울의 반 정도가 물에 잠긴다면 그 때에나 뭔 대책이 나오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주말 지나면 잠깐 추위가 닥친다는 예보가 있습니다. 그래봤자, 하루 이틀일 것입니다. 어차피 이제 3월도 중순입니다. 한 주 정도 지나면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이미 싹은 텄고 곧 터뜨리면 됩니다. 우리 모두 꽃길을 걷게 되는 날이 다가옵니다. 우리 발밑이 어두울지라도 빛이 나타나 그림자를 지워가겠지요. 생명은 희망을 생성합니다.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합니다. 어제를 딛고 내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겨울을 지나왔고 이제 봄을 맞이합니다. 가스 비 올랐어도 그 걱정도 끝납니다. 그렇다고 내년 걱정 미리 할 필요는 없겠지요. 자유는 멀지만 해방입니다. 그 기분으로 꽃구경 갈 차비나 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이 어수선해도 봄은 봄입니다. 몸은 고달파도 맘은 꽃바람을 타기 바랍니다. 건강하고 복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3월 1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기 10 : 5 - 7)
<카운트>
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것을 벗어나는 일은 대단히 힘듭니다. 문제는 그 낙인이 자신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피해를 혼자서 기나긴 시간을 당해야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겠습니까? 더 힘든 것은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 누구도 해결하려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냥 잊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싶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주변에는 몇 안 되는 내 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삶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는 잘 아물지 않습니다. 소위 트라우마로 남아서 언제고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편파 판정은 경기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올림픽 펜싱 경기에서 길고도 긴 1초의 시간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편파판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뻔한 거짓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경기규칙 또한 분통을 배가시킵니다. 그런가 하면 확실한 편파판정을 기억합니다. 잘 아는 김연아 선수의 동계올림픽 은메달입니다. 소련을 두호하던 심판들의 편파판정입니다. 아마 금메달을 받던 선수 본인도 머쓱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관중 대부분이 야유를 보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누가 보아도 올림픽 개최국의 자국 편애에 따른 편파판정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김연아 선수의 묵묵히 응한 태도가 더욱 성숙해보여 칭송을 들었습니다.
‘박시헌’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는 애매한 상황에서 편파판정의 시비에 희생됩니다. 차라리 은메달을 받았더라면 다시 기회를 바라볼 수 있었겠지만 억지 금메달은 그의 장래를 어둡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운동을 포기하고 은퇴해버립니다. 그 후 고향 진해에서 체육선생으로 일하며 살아갑니다. 주변의 시선이 아직 곱지 않은 것을 느끼며 학생들에게는 오로지 옳은 길만을 고집하고 밀어붙입니다. 그 괴팍한 고집으로 ‘미친 개’소리까지 듣습니다. 누가 뭐라든 자기 길을 고집하며 갈 길을 가는 겁니다. 교장도 학부모도 못 말리는 괴짜 선생님, 학생들에게는 막가파 규율반장입니다. 지난날의 불미스러운(?) 경기로 그러려니 생각들 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강자의 불공정에 당해야만 하는 약자, 어쩌면 자신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습니다. 저들은 돈과 권력으로 실력이 있어도 힘없는 사람을 제물로 하여 자기 길을 닦고 창창한 미래를 만듭니다.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했어도 이런 개 같은 환경은 뜯어고쳐야 하겠다는 의협심이 발동합니다. 경험한바 말로 아무리 항의해도 전혀 통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력으로 보여주는 길만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입니다. 해체했던 복싱부를 부활시킵니다. 언제는 죽어도 안 하겠다 하더니 이제 아무 지원도 후원도 없는데 다시 복싱부를 일으키겠다니 무슨 힘으로 합니까? 그 어려운 때 아내가 기꺼이 협조해줍니다.
<타고난 실력은 최고지만 불공평한 세상에 일찌감치 희망을 접은 복싱 유망주 '윤우', 양아치가 되기 싫어 복싱을 시작하는 '환주', 소심한 성격의 '복안', 그리고 문제적 3인방 '가오', '조디', '복코'까지 우연한 기회로 복싱부가 된 이들이 선생 '시헌'>과 한 팀을 이루어 복싱부를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소위 지옥훈련에 돌입합니다. 모든 운동경기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기본 체력 아니겠습니까? 마음이나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가는 그 끝은 좌절과 포기입니다. 자존심도 내려놓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기를 쓰며 묵묵히 전진해야 합니다. 이기는 것은 내 감정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인정해주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함께 식사하고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하며 이겨내는 시간을 가짐으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오해도 하고 손가락질도 주고받고 아픔도 주고받으며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따라오는 제자나 부하들 또는 팀원들의 각자의 특성을 고려해서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어렵지요. 그러나 그래야 신뢰를 얻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신뢰는 철벽같은 장애물도 뛰어넘게 해줍니다. 사실 사람은 옳기 때문에 움직이는 특별한 사명감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감동이 올 때 움직입니다. 마음에 불을 지르면 가만두어도 내달립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에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쪽이 이깁니다.
조금은 애매하다 싶은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사실 선수 본인이 원하였던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국가가 자기 위신을 생각하여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누구도 뇌물을 주고받거나 심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국제적 판결이 나와서 한참 후에는 다시 공개 활동을 하였다는 설명이 부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당해야 했던 수모를 무엇으로 보상해줍니까? 보상해주는 사람도 기관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넘어간 줄 압니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뻔한 스포츠 영화의 결과를 알면서도 나름의 감동이 따라오는 것은 아마도 열정을 담은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카운트’를 보았습니다.
뭘 보고 믿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누구를 기다립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태 누구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약속하셨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우리는 마땅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근 2천년 세월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실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습니까? 초림 때처럼 육신을 가지고 오실까요? 그 때 그 모습으로 오실까요? 그럴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오실까요? 예컨대 타국에서 대통령이 방문한다 하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맞이합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겠지요. 미리 알아두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나 그런 일이 있다면 사진이나 그림이라도 준비해서 얼굴과 모습을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알고서 기다려야지 그렇지 않다면 행여 다른 사람을 보낸다 해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지요? 오신다 한들 어떻게 알아보지요? 이 문제를 고민해본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냥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니, 오시려니, 오시겠지 하는 믿음입니다. 사실은 오시든지 마시든지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2천년이나 별 문제 없이 지나왔는데 설마 내 시대에 오실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내 시대에는 그저 나나 편안하게 살면 되는 거지,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닙니까? 주님이 오신다는데 내가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봤습니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경을 봅니다. 살전 4 : 16 -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십니다. 내가 몰라도 오실 때가 되면 오실 것이고 나는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텐데 무슨 걱정이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뭣 하려 깨어 근신하라고 하십니까? 마 24 : 37 - 44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을 보면 오시는 그 순간까지 압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그러니 자기네 할 일을 그대로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자기네 할 일을 다 합니다. 그래서 멸망당하기까지 깨닫지 못한답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 아무래도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듯합니다.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예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신답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비하라는 거지요?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실 것이니 예비하라 하십니다. 무엇을 어떻게 예비하지요? 주님이 예비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예비해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예비합니까? 아십니까?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았습니까? 어느 신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면 알아보겠습니까? 그랬더니 아주 간단하게 답이 왔습니다. 성경에 다 나와 있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데 어느 학생의 답안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답은 교과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 학생에게 점수를 줘요, 말아요? 그건 답이 아닙니다. 성경에 다 나와 있다고요? 그건 답이 아닙니다. 모르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일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눅 24 : 15 - 16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무덤에 갔던 여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 20 :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아무튼 그 후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전부터 다시 오마 약속하셨습니다. 요 14 :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8절에도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분명 다시 오십니다. 문제는 어떻게 오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신자들이 알아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재림을 이야기할 뿐 관심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에 계십니다. 영계에 계십니다. 우리와 같이 육계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으로 계십니다. 다시 오시면 영으로 오십니다. 육으로 오시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오실 때의 모습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마 24 :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육체를 가지고는 이렇게 오실 수가 없습니다.그러면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육의 눈으로 보겠습니까 못 보겠습니까? 볼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깨달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눅 24 : 30 - 31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소위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32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아멘! 성경을 말씀해주실 때 마음에 감동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안이 열린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신 것을 어떻게 압니까? 영은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이 누구 이름으로 온답니까? 예수 이름으로 온답니다. 이제 한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름으로 오셨습니까? 요 5 :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는 자의 형상이 자기네들의 입에 맞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는 자가 어찌 겨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냐 이겁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왜 하필이면 당신이냐? 그겁니다. 왜 당신입니까? 당신 같은 사람을 우리는 결코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기에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찰떡같이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동떨어진 믿음인가 말입니다. 문제는 지금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확고한 믿음 그런데 엉뚱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렇습니다. 메시야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리라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언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사 53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얼마나 초라하게 별볼일없이 오시리라는 것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지를 못했든지 무시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다시 한 번 경계할 것은 예언의 말씀에 좀 더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천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봉한 책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 29 : 11-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묵시가 무엇입니까? 예언이지요. 유식하든 무식하든 그 예언을 알 턱이 없습니다.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하였으니 누군가 그 봉한 것을 열어주지 아니하면 그 속을 볼 수가 없고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유식하든 무식하든 상관없습니다. 오늘 식으로 말한다면 미안하지만 신학을 공부했다는 목사님도 모르고 성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허락한 자에게만 열릴 것입니다. 언제 열립니까? 합 2 :3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 정한 때가 언제입니까? 단 12 : 9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마지막 때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책이 열렸다는 것은 마지막 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비유가 풀렸다는 것은 마지막 때 곧 말세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장로 율법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무시했습니다. 메시야를 거부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육의 모습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던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요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너희 아비는 마귀다’ 하셨습니다.(요 8 : 44) 성경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또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귀 사단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거울 아닙니까?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영적 이스라엘 역사의 거울입니다. 신약의 말세에 일어날 예표입니다. 그래서 깨어 근신하라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자칭 하나님이라는 자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마귀가 직접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영은 육을 들어 사용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세워서 자기 말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겉은 하나님의 종이라 하지만 그 속에는 마귀의 영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보다 오히려 더 유명하고 더 잘나고 더 똑똑합니다. 배운 것도 많고 남다른 학위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은혜가 있고 권능도 행합니다. 여기저기서 교인들이 몰려옵니다. 위세가 당당해집니다. 그러니 더욱 겉치레까지 합니다. 설교강단에 목사 가운보다는 박사 가운을 입고 등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 누렸던 권세를 누립니다. 누가 의심을 하겠습니까? 본인들 자신도 자신이 마귀의 종노릇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을 깨닫는다면 당장 뛰쳐나오겠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이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였으니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영이 나타나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은 육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도 육으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 3 :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보시더니” 아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시니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12 : 44 - 45 “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당신을 하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 말씀에 유대인들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요? 그 뜻을 모르니까.
예수님은 그 육신 안에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은 열매입니다.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육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으니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직접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육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그 육이 누구인가요? 누가 성령이 함께 하는 육입니까?
예수님은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어찌 압니까? 그 하시는 말씀과 하시는 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10 - 11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도 답답하시니까 뭐라 하십니까? 그것을 못 믿겠으면 하는 일을 통해서라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성령이 함께 하는가 하는 것을 그 하는 말을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왔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마 11 :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4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렇습니다. 구약 말 4 : 5절에서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할 일이 있습니다. 6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보겠습니다. 눅 1 :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아멘!
세례 요한은 육신은 요한이었지만 엘리야의 이름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것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과연 그 영이 함께 하였을 때는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영이 떠나자 주님을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헤롯의 가정사에 간섭하다가 잡혀 죽습니다. 당시 율법에 매였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부름 받았는데 딴 짓하다가 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11 :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침노를 당합니다. 언제부터요? 세례 요한 때부터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장막 곧 성전을 맡은 자였는데 자기 사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에게 묻혀버렸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의 그늘에서 빼내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장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배도자가 되고 만 셈이지요. 그래서 세례 요한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이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비진리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과연 엘리야의 이름으로 왔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 하는 말을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엘리야를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전하는 말을 듣고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무도 메시야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는 말을 들어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오신 것을 압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 길 예비 사자가 옵니다. 초림 때 길 예비 사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가 하늘의 영이 함께 할 때는 제대로 그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려 물가로 내려오실 때 선포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 : 29) 그러므로 그 말을 믿으면 됩니다.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하는 말을 들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가 땅에서 육으로 있으나 성령이 함께 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질문합니다. 왜 당신입니까? 대답한들 믿겠습니까? 세례 요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면 그런 상황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본 자가 없으니까요. 마 11 : 4 - 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본 대로 들은 대로 말해줘라 그렇게 밖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말씀대로 풀어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들어보고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이 말한 대로 우리 또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와 보라”(요 1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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