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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
출 12: 13. 히 10: 19-22
보혈의 능력은 생명력입니다. 피는 인간의 심장과 관련하여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레17:11). 피는 생명의 근본입니다. 피가 쏟아지면 생명은 끝납니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삼하1:16)라는 말은 사람을 죽인 죄는 자기가 죽는 것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피를 생명과 죽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피가 있으면 생명이 있고, 피가 없으면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이란 구약에서는 양의 피를 말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피를 말합니다. 양의 피는 문지방과 문설주에 뿌려져 죽음을 면하게 하여 생명을 보호하였고,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에 흘러 내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영혼자체로 간주됩니다. 피 속에 생명과 영혼이 잠복해 있습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피가 없이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속죄의 능력입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속죄(카페르)란 ‘덮다’는 뜻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죄를 덮겠습니까? 죄가 덮여지지 않는다 죄를 덮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상징적으로 죄 자체는 그대로 있으나 죄를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 것은 죄를 가리워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12:10) 예수의 보혈은 죄인을 숨겨줍니다. 리브가가 이삭을 만날 때 얼굴을 면박으로 가렸습니다(창24:65). 구약시대 여성들은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이 얼굴을 가렸습니다. 덮거나 가리면 보이지 않습니다. 보혈은 죄를 덮고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는 능력입니다.
재앙을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내가 애굽왕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유월절을 영어로 passover라고 합니다.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상한 명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백성들의 집은 장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팥죽을 문에 뿌리고 칼로 십자를 그립니다. 팥죽은 붉은 색입니다. 귀신이 두려워하는 색으로 귀신을 물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양의 피를 본 죽음의 사자는 그 집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 두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숨겨 주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안다.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라”(수2:9,13)고 했습니다. 두 정탐꾼이 말하기를 “우리의 일을 누설치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이 땅을 주실 때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희를 대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창에 붉은 줄을 달아 내려 표시를 내면 그 집을 보호하게 했습니다.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이 모두 보호를 받았습니다(수6:25). 붉은 줄은 라합의 집이라는 사인sign이고,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sign이었습니다. 피로 보인 표적이 재앙을 막았습니다.
성소에 들어 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식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예수님은 내가 길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갈 길을 내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길은 피 길입니다. 예수님의 흘린 피의 희생을 통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입니다. 담력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피의 힘입니다. 생각에 피가 있을 때, 마음에 피가 있을 때 담력이 나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구속의 능력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구속이란 ‘풀어놓다’ ‘구해내다’라는 뜻입니다. 잃은 권리를 찾아 주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를 가르킵니다. 노예로 팔린 자를 자유인이 되게 하려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의 보배로운 피가 구속의 대가였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 피납된 사람을 데려올 때 엄청난 값을 지불했습니다. 얼마나 줬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2,000만달러, 우리 돈으로 200억을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속은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그의 몸을 주고 내놓으신 것입니다. 성도가 존귀한 것은 우리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지불한 예수님 때문에 존귀합니다.
독생자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의 종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자존감을 가지고 가치 있는 존재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죄를 씻는 능력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다윗은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2)라고 했습니다.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도말’은 ‘닦아내다’ ‘제거하다’라는 뜻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시체를 만진 사람은 잿물로 씻으라 그러면 정하리라고 했습니다(민19:11-12). 예수의 피가 죄를 씻는 비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주홍이란 중동지방의 참나무에서 서식하는 곤충의 알로 만든 물감인데, 물들이면 잘 지워지지 않는 색깔입니다. 진홍은 짙은 붉은 색으로 죄악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주홍 같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씻어주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양털같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의 은혜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잿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주님의 보혈이 깨끗케 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입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사함이란 용서(forgive)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죄는 예수의 생애가 가르침이나 부활이 아니라 그의 피에 있습니다. 이 죄 없다는 판결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정결케 하셨기 때문에 무죄판결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잔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9-10) 하셨습니다. 그는 죄없는 자였는데 죽였습니다.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죄 없이 돌아가신 예수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피의 호소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게 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그리스도의 보혈은 화평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복을 받게 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하나님과 화목하고 받은 복은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주의 보혈로 사하심을 받은 성도는 그 피로 화평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복을 받게 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롬5:10)
옛날 어떤 목사님이 상처를 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산아제한이 없는 때라 자녀가 많았습니다. 새로 얻은 아내로부터 또 아이들이 태어나다 보니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여보! 목사의 집에서 날마다 큰소리가 나서 되겠소! 내가 당신에게 ‘화(和)’ 할테니 당신은 ‘평(平)’ 하시오.” 그때부터 화-평했답니다. 어느 날 아들 때문에 화가 난 부인을 보고 화! 화! 화! 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화가 나서 ‘화!’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왜 소리 소리를 질러요?” “내가 언제 소리 질렀어? 약속대로 ‘화’ 했지!” 살면서 싸울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화목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화’ 할테니 여러분은 ‘평’ 해 봅시다. ‘화!’ ‘평!’ “할렐루야!”
보혈의 능력으로 화평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복된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절기는 그리스도의 길
출 12: 13-14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주제로 금번 주간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본 주제의 첫 번째 시리즈에서 유월절 양은 후일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여준 것이고 또한 이 양을 잡는 날을 정월 십사일로 정하도록 하였는데 성경에 말했던 그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날짜에 예수 그리스도 오셔서 정월 십사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까지도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구약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고 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을 어김없이 다 이루신 것을 우리는 알고 또한 믿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실로 미루어서 유월절 그 양이 죽던 날 정월 십사일 그 첫 양이 죽던 날 그 밤에 있었던 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시는 날 역시 같은 위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이 말하여주는 그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꼭 같으시니 그 위력을 우리는 오늘 생각하면서 오늘 이 밤에 그 위력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위력 되게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양이 죽을 때에 나타났던 위력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혹 그 양이 대단한 위력을 가졌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양의 피는 역시 죽음을 물리치고 또 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함께 그 집안에서 먹게되면 참 자유가 있는 것이다 라는 정도로 그 양의 위력을 대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양에게 위력이 있었다면 매년 정월 십사일에 잡는 양 그 날 저녁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야 될텐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양을 잡으면 애굽의 장자가 다 죽고 이스라엘의 끊어져가던 장자의 대가 이어지는 이런 놀라운 일 홍해를 가르고 자유할 수 있는 그러한 일 그런 일이 양 잡는 날마다 있어야 되겠으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괴롭히던 자들의 장자가 죽고 괴롭힘을 당하던 자들에게 자유가 오는 이 엄청난 능력은 양 그에게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양이 말하여주고 있는 예수에게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양 자체에 양의 살에 혹은 양의 피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 라고 한다면 매년 양을 잡을 때마다 그 양 잡은 일로 인하여 그 같은 일이 늘 나타나야 될 것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정월 십사일을 기억하고 심지어 예수님 오시는 그때까지도 이 날에 양을 잡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지금까지도 양을 잡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누구에게 억압받고 있었습니까? 처음 유월절을 지킬 때에는 애굽에 억압을 받고 있었으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에 억압당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그때에도 이 유대인들은 역시 양을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양을 잡아서 피를 그들의 문설주와 인방에 여전한 방법으로 발랐다면 그날 밤에 로마의 장자들은 다 죽고 자기들의 장자들은 죽어가다가도 살아나서 홍해를 건너듯이 자유와 해방을 가졌어야할 것이지만 양에게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리거니와 유월절 때부터 잡았던 이 양은 이 양이 위력은 것이 아니라 이 죽어가는 양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에게 위력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채택해 읽었습니다만 출애굽기 12장 13절의 말씀도 자세히 살펴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 이 내가 라고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양이 재앙을 면케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피가 재앙을 면하게 할 재앙을 없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재앙은 누가 내린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내린다는 겁니다. 당시의 세상은 모두 죄악 가운데 있었으므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대를 끊어버리는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할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끝내는 참고 참으시다가 이제는 재앙을 가지고 이 땅 전역에 역사하시며 지나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죄가 없어서도 아니다. 너희가 애굽 사람들보다 좀 훌륭하게 살았다 라고 해서도 아니고 다만 너희는 백성이니 너희가 이 밤에 집안에 들어 있으면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이 양은 후일 나타날 하나님의 어린 양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양을 잡게 될 테니 금년에만 잡을 것이 아니라 주 오실 때까지 너희는 지켜야 될 것이라." 그렇게 말씀하시고서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러니까 넘어간 것은 피가 재앙을 넘겨보냈습니까? 하나님이 피를 보고 넘어갔습니까? 하나님이 피를 보시고 넘어간 겁니다. 재앙을 내리거나 내리지 아니하신 이는 하나님이시지 그 양의 피의 위력은 아니었습니다. 그 피는 다만 하나님이 보는 표식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 피를 바른 집안 사람들은 누구들입니까? 애굽의 민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백성입니까?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 하나님 백성 집안에는 이스라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노비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라고 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되었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되었거나 내 말을 듣고 나를 인정하고 이 양이 가리키는 바 훗날 메시야를 기다리고 나를 믿는 자들에게는 내가 재앙을 가지고 그 집에 들지 아니하고 그 집을 넘어갈 터인데 너희는 표식을 해야 되겠느니라. 표식은 무엇이냐?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내가 재앙을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각 집집마다 다 들어가서 처음 난 초태생은 다 죽일 것이로되 피를 바른 집에는 내가 넘어가리니…" 했으니 재앙을 내리시고 안 내리신 이는 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피는 무엇입니까? 표식으로 바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같이 그날에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를 집안에서 먹고 그리고 누룩이 들지 아니하는 무교병을 그날에 먹고 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먹는 그런 절기를 지키게 되었는데 그 첫날에 있었던 사건 역시도 양을 잡아서 피를 발랐더니 피가 위력을 발휘해 가지고서 재앙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갖고 가시기 전에 미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표시하라고 하였으니 표가 될지라고 했으니 그 표를 볼 때에 하나님이 넘어가시겠다고 하였으니 그날에 있었던 엄청난 역사 즉 애굽의 장자는 다 죽고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어가다가 다시 대를 잇게 되는 이 엄청난 사건은 누가 행하셨느냐?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누가 보호를 받고 누가 이 재앙을 당했느냐? 하나님의 뜻대로 양을 잡은 자, 양을 모시는 자, 양을 통하여 오실 이를 기다리는 자, 그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이 큰 역사 속에 보호를 받게 될 것인데 이 보호받는 사람들은 양의 핏방울 때문에 아니고 양의 살코기 때문에 아니고 이 양으로써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밤 우리가 주의 성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로 32절 사이에 보면 주께서 전하여주신 것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했습니다. 그 앞 부분만 생각하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는 그 구절만 딱 잘라서 생각하면 '아 오늘 받는 이 떡은 주님의 몸이구나. 주님의 몸이 우리 속에 들어오니 어떻게 우리가 평상시에 떡을 먹듯이 꾹꾹 씹어먹겠느냐? 그렇 수는 없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서 입에서 절로 녹게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그 조그마한 양의 포도주이지만 굉장히 경건한 마음으로 먹게되는데 혹 여러분 중에 그 떡이 그 잔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바로 그것이 믿음 가진 자에게서 변하여 예수님의 실제적인 몸이 되고 예수님의 실제적인 피가 되는가 그쯤으로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어떤 종파에서는 그래서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성찬에 올려진 그 떡과 그 포도주는 믿는 자가 받게되면 그 순간에 주님의 몸으로 변한다 합니다. 주님의 피로서 변한다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같이 이 몸이 거룩되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그 말씀을 통해서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내 피니 이것을 기념하여 행하라고 한 것이지, 너희 속에 들어가면 바로 이 떡이 내 몸 되고 이 포도주가 내 피된다 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유월절 때에 있었던 그 첫째 날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을 때에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억압하던 애굽 사람들은 대가 끊어져버렸습니다. 억압을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백성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 이 백성들은 대가 끊어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아들을 주로 많이 낳았습니다. 산파가 가기 전에 아들을 다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명령하여 산파들에게 지시하기를 딸아이가 나면 그냥 생산하게 두지만 아들이 나게되면 나올 때 목을 눌러서 숨막히게 해서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세의 사건이 생겼던 겁니다. 아이를 담아 가지고서 강에 던져놓고 갈대 숲 속에 끼워놓고 강에 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젖을 먹이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끌려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던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대가 끊어져가고 있고 애굽의 사람들은 그 머리 좋은 유대인들 그 일 잘하는 유대인들 기술 좋은 재능 있는 유대인들을 전부 활용해 가지고서 그의 나라가 부강할대로 부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대는 풍성히 이어져가고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의 대는 끊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부요도 끊어지고 저들의 기술도 끊어지고 소망도 끊어지고 어쩌면 영혼의 영적 생활도 끊어지고 육신의 하나님의 백성의 대도 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첫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 피가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재앙을 가지고 이 벌받을만한 사람 집집마다 들어가서 예외 없이 모두 다 초태생을 죽일 것인데 대를 끊어놓고 말 것인데 너희인들 무슨 특별난 대우를 받아야 될만한 일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를 믿으면 그리고 이 양이 말하는 장차 나타날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그 죽음을 너희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대속물인 것을 믿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너희가 그 표로 기다린다는 뜻으로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내가 재앙을 가지고 지나가다가 피를 볼 때에 그것을 표식으로 여겨서 너희를 넘어가리니…" 하시더니
그날 밤 피를 받아들인 백성들 그 고기를 먹은 백성들 무교병을 먹고 집안에 있었던 백성들 그 백성들은 그 밤에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이 지나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니 이게 웬일입니까? 온 애굽에 곡성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웬일인가, 웬일인가' 하여 고개를 내어서 알아보았더니 집집마다 초태생이 다 죽었습니다. 당당하던 사람들의 집의 대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나와라 나와라.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간다. 홍해를 건넌다.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한다 나와라." 해서 나가보니 그동안에 억압하던 바로의 군사들이 얼마까지는 따라왔습니다. 홍해까지는 따라와서 전에 하던 버릇으로 잡아보려고 했지만 대가 끊어져버린 애굽 병정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대가 끊어져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날 밤 양의 피를 발랐더니 그날 밤 양의 고기를 먹었더니 그날 밤 무교 떡을 먹었더니 그날 밤 이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끊어져가던 저들의 대가 확실하게 이어졌습니다.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던 저들에게 자유가 왔습니다. 가난의 대가 끊어지고 오히려 부요의 대가 오기 시작합니다. 홍해를 건너가 하나님을 만나 놀라운 이적적인 밤이 그날 밤이었으니 그날 잡았던 양의 위력이 아니라 양으로써 기다리면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력이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그날 밤 그 백성들이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무교병을 집안에서 먹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주께서 베풀어주신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떡을 받게 됩니다. 주님의 피를 기념하는 포도주를 받아서 우리의 입에 적십니다. 우리의 몸 안에 들게 합니다. 우리 온 몸에 떡이 스미고 온 몸에 포도주가 스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는 백성이 이 떡 조각이 이 포도주 한잔이 굉장한 위력을 낼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그때부터 매년 양을 잡았어도 매년 양 때문에 똑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떡을 믿는다면 그 잔을 믿는다면 희망은 가질지 모르나 역사는 없을 것이로되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피를 발랐으되 양의 피가 위력을 나타낸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이것을 볼 때에 넘어간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 떡을 받고 이 잔을 받을 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피를 바라본다면,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는 주의 떡을 받고 주의 잔을 받을 것인데 주의 떡이요 주의 잔입니다. 주의 떡이요 주의 잔이면 떡이 주인입니까? 주님이 주인입니까? 떡의 주인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놓여진 우리에게 올 이 떡과 잔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 떡과 잔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함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 떡을 우리 안에 넣으며 그 잔을 우리 안에 스미게 하면 주께서 우리의 입술에 묻었던 포도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든 이 떡을 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구원받을 자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아시고 재앙은 우리 집안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악한 세력의 대를 끊기 위하여 큰 역사를 오늘 밤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유월절 그 밤에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 밤에 일어났던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억압당하여 있었고 그들의 대는 끊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밤 그 양을 통하여 하나님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무교병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찢으실 살을 기다렸던 그 백성들 그들에게는 끊어져가던 대가 이어지는 밤이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애굽의 사람들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를 끊어가면서 이스라엘의 재능을 빼앗았습니다. 부요를 빼앗았습니다. 천국 가는 길마저 빼앗았습니다. 신앙까지 빼앗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날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을 믿고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떡을 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날 밤 어떻게 되었느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의 장자들은 다 대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밤 주께서 주신 이 떡과 포도주가 유월절 양의 피와 그 떡과 같이 바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인즉 전에는 양으로서 오실 주님을 믿고 기다렸고 지금 우리는 떡과 포도주로서 오셔서 십자가에 이미 죽으시고 구원하신 주님을 보면서 오늘 기념하며 이 떡을 먹게 될 것입니다. 이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이 밤에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러분의 건강을 괴롭히던 악한 세력의 대가 끊어질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가난을 갖다주고 부요를 끊어버리던 그 악한 세력의 대는 끊어지는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불신앙을 갖다주고 여러분에게 신앙생활을 어렵게 마들고 여러분에게 행복을 끊어버리려고 하던 그 악한 세력과 환경들은 그 위력의 대가 오늘밤 끊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게 되느냐? 건강이 끊어져가다가 다시 건강의 마디로 이어질 것이며 신앙이 낮아져 가다가 신앙의 두꺼운 줄로 다시 연결될 것이며 끊어져가던 여러분의 모든 행복의 대가 오늘밤 다시 이어지는 밤이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오늘밤 지나고 내일 아침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같은 있은 후에 홍해를 향하여 건너갔을 때에 애굽 병정들은 저들의 대가 끊어진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홍해 가운데에까지 따라왔지만 대 끊긴 백성들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대가 끊기고 나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를 이어주셨다면 죽을 것 같으나 다시 살려주셨다면 그 길은 길 것이요 그날은 장구할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의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를 괴롭히던 대가 끊어지는 밤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장 내일 당장 무슨 표가 나지 아니할지 몰라도 오늘 영적으로 확실히 대가 끊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대는 이어지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든 주님을 기념하는 우리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았던 나다나엘을 주님께서 헤아리시고 "네 속에 간사가 없도다. 네가 나를 기다렸도다. 나는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네 마음을 보았노라." 하듯이 하나님의 눈으로 오늘 믿음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 이 성찬의 떡과 이 성찬의 포도주가 여러분 속에 스며있는 것을 아무도 못 봐도 상관없습니다. 재앙과 복을 갖고 오신 하나님만 보시면 되는 것이니 믿음을 가지고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떡을 받으시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잔을 받으시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그 피를 기억하십시오. 그러한 기억함으로 여러분이 먹고 마시게 되면 여러분 속에 있을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옵시고 재앙은 여러분 집을 지나가게 하시고 여러분을 괴롭히던 악한 것들의 대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이 밤에 성찬과 동시에 일어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찬송합시다. 281장 찬송합니다.
축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임하여 교통하심이 진실로 오늘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죽으심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큰복을 주시며 우리를 괴롭히던 존재들에게는 어떤 벌을 가하시는 것을 알고 이 성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님들께 이제로부터 이제 이후 영원까지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유월절 어린양
출 12: 14-19
Ⅰ. 서 론
우리나라의 몇 몇 젊은이들 가운데는 편지를 쓸 때나 글을 쓸 때, 분단조국 51년 그렇게 쓰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잊지 말자고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 통일이 되고 나면 또 통일 조국 몇 년 뭐 그렇게 쓰겠지요. 그들에게는 통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는 것이 좀 의미있게 보이니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연도표시를 할 때 그렇게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별로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2001년이라고 하는 년도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2001년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원후 2001년이다. 서기 2001년이다. 그런 식으로 표시를 하지만 본래 년도를 정할 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준으로 해서 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지 2001년째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연대를 BC와 AD표기해서 나누었습니다. 주님 오시기 이전과 주님 오신 이후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탄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연대를 바꾸어 써야 할 만큼 중요한 한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12:2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때가 본래는 4월이었는데, 이 날을 다시 1월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애굽에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을 따라 애굽에 들어갔을 때는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들어갔지만 세월이 흐르고 애굽의 정권이 바뀌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애굽이 벌여놓은 여러 가지 공사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한 사람을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런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이끌어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예로 살아가던 한 민족 전부를 그 나라에서 이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수는 장정만 60만 명이라고 했으니 애굽이 이렇게 엄청난 노예들을 한꺼번에 다 보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모세도 이런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셔도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진노하시면서 까지 모세를 설득하셔서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 모세를 통하여 여러 가지 재앙들을 애굽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재앙, 개구리가 애굽의 전역을 뒤덮는 재앙, 이가 들끓는 재앙, 파리로 뒤덮이는 기적, 우박과 역병과 메뚜기, 그리고 흑암의 재앙까지.
애굽은 이런 여러가지 재앙들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첫째는 애굽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재앙들은 단순한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이 재앙들은 하나 하나가 다 애굽사람들이 자기들을 지켜주리라고 믿었던 바로 그 우상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밝혀 준 것이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여 죽음의 강이 됨으로서 나일강의 신이 얼마나 헛된가를 보여주었듯이 다른 모든 기적들도 애굽이 의지하던 우상들의 헛됨을 밝혀 주었습니다. 애굽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의지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인들은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을 보았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시기에 나일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개구리, 이, 파리, 역병들과 우박, 특별히 메뚜기때의 습격 때문에 애굽의 모든 동식물들이 피해를 입고 황무지가 되다 시피 했습니다. 애굽은 처음에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못했는데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을 보내는 것 보다 더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잠시 손해로 여겨질 지라도 따르는 것이 더 복된 일인 것입니다.
애굽의 왕은 재앙을 받을 때마다 그 때는이스라엘을 보내 줄테니 이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사라지고 나면 번번히 약속을 어겼습니다. 재앙을 받을 때는 급한 마음에 약속을 했지만, 재앙이 그치고 나면 다시 현실의 이해 타산을 따지는 것입니다.
바로가 아홉 번째의 재앙을 받고 난 뒤를 보십시오. 재앙이 끝나고 난 뒤에도 바로는 이스라엘을 보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변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 모든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애굽을 떠나되 이스라엘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던 육축들은 이미 여러 가지 재앙 때문에 죽거나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애굽의 왕은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내 준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육축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거라도 건져야 겠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이해 타산만 생각하고 있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그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바로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타협과 절충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 가지 더 큰 재앙을 애굽에게 내리실 것인데 그 재앙을 내리고 나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되 제발 좀 나가달라고 쫓아 내면서 보낼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인들에게 은, 금 패물을 얻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육축들을 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패물들 까지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를 처음 만나서 이스라엘을 보내달라고 하였을 때 바로는 이스라엘에게 더 큰 짐들을 맡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바로가 이스라엘에게 육축만은 남겨놓고 가라고 했다가 결국에는 은,금 패물까지 내주면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나 애굽의 사람들이 이렇게 쫒아 내듯이 이스라엘을 보내고, 자신들이 가진 은,금 패물을 주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 밖에 없없던 결정적인 재앙이 어떤 것입니까?
애굽이 받은 열 번째 재앙이란 것은 죽음의 재앙입니다.
11장 4-7을 보면 이 재앙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애굽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 가운데서 장자가 되는 것은 다 죽이시는데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해서 여종의 장자까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 죽이시겠다고 했습니다. 애굽에서는 바로와 바로의 아들들을 신처럼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처럼 섬기는 바로의 아들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생축의 처음난 것 까지 모두 다 죽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짐승은 손대지 않으시는데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지키시는 가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재앙입니다. 장자를 친다는 것은 그 민족의 멸망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다음 단계가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그러니 애굽의 바로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재앙을 끝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연도를 다시 고쳐야 할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던 출애굽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라서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일들은 반드시 이루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열 번째 재앙을 보면 이 재앙은 이전의 아홉 가지 재앙과 비교해 볼 때 다른 점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1. 이 열 번째 재앙은 어느 한 민족에게 해당하는 재앙이 아니라 애굽에 있는 모든 백성 모든 민족에게 다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실 때 까지는 하나님 스스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지경에는 재앙이 내려져도, 이스라엘의 지경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열 번째 재앙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은 개들도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시겠다 했지만,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믿고 따른 사람들의 집만 넘어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 집도 재앙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따르느냐, 아니면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느냐, 이것이 이 재앙을 피하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2. 이번 재앙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1) 먼저 각 가족의 수를 따라서 흠 없는 것으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야 했는데 수컷으로 일년된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야 했습니다.
눈이 멀었다거나 점이 있다거나 다리를 전다거나 하는, 그런 흠이 있는 것은 안됩니다. 깨끗한 것을 잡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려서 잡은 양은 그날 밤에 가족끼리 모여서 구워 먹는데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하고, 만약에 남은 것이 있다면 아침에 다 불로 태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잡은 양의 피는 버리지 말고 그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여금 애굽의 처음 난 모든 것을 멸하실 때 그 양의 피를 바른 집들은 넘어가시겠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넘어간다는 말이 바로 한자어로 '유월(逾越)'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본뜻이 그대로 살아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을 넘어가서 살아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월절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보다 의로워서 살아남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실은 애굽 사람과 똑 같이 죽어야 할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도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해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 밤에 얼마나 많은 양들이 희생되어졌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수가 200만 명이었다면 10명에 한 마리꼴로 계산을 해 봐도 그 밤에 죽은 양의 숫자는 적어도 20만 마리가 됩니다. 이 20만 마리의 양이 희생되어져서 이스라엘 민족을 살린 것입니다.
2) 그 밤에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되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교병이라는 것은 누룩이 없는 빵을 말합니다. 누룩을 넣어서 발효시키지 않은 빵은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누룩은 죄와 옛 생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고전5:5-7). 그러므로 이런 누룩없는 빵을 먹으라는 것은 과거에 달콤하게 여겨지던 그 모든 죄악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새 삶을 살아가리라는 다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쓴 나물을 먹으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왔던 그 쓰라린 지난 날들을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에는 이 때를 잊지 말고 살아야지 하다가도 좀 잘 풀려가면 어느새 자기가 어려웠던 시절은 잊어버리고 교만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에게 내가 과거에 어떠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 하는 그 은혜의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 밤에 음식을 먹을 때 편안한 자세로 먹는 것이 아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하였습니다. 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모습입니다. 애굽이라는 곳은 더 이상 머무를 곳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유월절 절기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지키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의 유월절 사건을 가만히 보면 이것은 분명히 어떤 하나의 모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모형입니까? 구원에 대한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영적 사실에 대한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죄악된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이 우리도 죄악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애굽은 재앙을 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고, 그대로 있자니 함께 멸망되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우리의 영적 현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살아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구원을 얻었듯이 주님께서는 스스로 유월절의 어린 양처럼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에게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요1:29을 보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문설주에 발려져 있는 그 피를 보고 넘어갔듯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며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월절의 사건이 우리에게 구원의 모형이 되기는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와는 비교될 수 없이 고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으로 장자 재앙을 면하게는 해 주었지만 근본적으로 죄를 없이하지는 못했습니다(히10: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해마다 어린 양을 잡아 희생의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재물은 너무나 완전해서 이제 더 이상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히9:12을 보면 예수님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어린 양이 되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내게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더 깊이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시적인 죽음을 면하고 출애굽을 하면서도 자기들의 년대를 다시 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죽음을 면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면하고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야 말로 우리의 연대를 다시 정하고 새 삶을 살아야 하는 민족이 아닙니까?
EX) 어떤 연세 드신 한 장로님에게 어떤 분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물었더니 20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새 삶을 산 지가 20년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그 대속의 죽음과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지셨듯이 나도 주님위해 내 십자가 지고 가리라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꼭 기억해야 할 일
출 12: 15-28
요즈음 근 한 달 넘게 교회에서 자며 기도하고 있는데 금요일 건축 중인 교회에 가서 성도님들과 기도하고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보안카드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낮에 교육관에서 일하다 놓아두고 온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꼭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어버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은 아내와 함께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고향에 가다오다 휴게소에서 아내가 화장실에 갔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홀로 차를 몰고 서울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몇 년 전 이슬람권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이 오셨는데 이슬람권이기 때문에 노트북 컴퓨터에 기독교 자료를 넣어드리기 위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 그런데 자료를 넣으려고 가방을 열어 보니 노트북은 빼놓고 가방만 가져온 것입니다. 월요일 새벽기도 설교를 하기 위해 강대상에 서니까 낯선 성경 찬송가가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주일 설교를 하시고 그냥 놓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꼭 기억해야할 것을 기념일로 만들어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의 포로에서 430년 만에 해방시키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의 한 매듭을 짓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전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대도 있고 한 편으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건축을 하고 있는 우리 교회와 비슷한 상황적 입장일 것입니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강조하는 지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날을 명절로 삼아 대대로 지키도록 하여라.” 유월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러한 사항들을 하나의 규정으로 삼아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이 영원히 지켜야 하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달까지 바꾸어 유월절과 무교절을 기념일로 만들어 기억하라고 하는데 만약 내가 모든 기억력을 잃어 버릴 지라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만 노년이 되어 자식의 이름도, 부모와 배우자의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다고 해도 꼭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까지 꼭 기억해야 할 것 세 가지만 말하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죽음에서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21-23).
하나님이 무엇을 꼭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합니까? 2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규례로 삼아”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죽지 않고 사는 방법입니다. 해방하는 날 그 날에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설텐데 죽는 방법이 아니라 사는 방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야 말로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비법을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 말씀합니다. 세부적으로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유월절 희생 제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21절).
둘째는 어린양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뿌리라는 것입니다.(22절)
셋째는 어린양의 피를 뿌리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22절 하반절)
이것이 바로 D-Day 날에 죽음에서 살아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의 대표인 장로들에게 말하고 백성의 대표인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소리입니다. 애굽사람들은 짐승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양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라는 것입니다. 단번에 애굽 사람들이 죽는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어린양 피로 자신들이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바로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 양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회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죽음을 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죄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살린다는 것입니다. (벧전1:18-19)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어린양의 피를 뿌린 집 안에 거하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역사적이고 객관적 사실입니다. 문제는 내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됩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함으로 육적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음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살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신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안에 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미모로도, 명예로도, 지식으로도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수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3대 문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인생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 "인생아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인생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누구나 한 가지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질문으로서 "인생아 너는 죽음의 길로 가고 있구나"입니다. 확실히 죽음의 길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만인 앞에 평등합니다. 죽음은 차별이 없고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 고하가 없습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24시간에 32만명이 출생하고 16만명이 사망을 한다 합니다. 매시간 7000명 매분 120명, 매초 2명씩 사망을 합니다. 누가 그 대상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가장 고귀한 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주님께서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피흘리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믿어야 합니다. 영생을 받는 길이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오직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보혈로 가능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능력 주의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보혈 능력있도다 주의피 믿으오 주의보혈 그어린양의 매우 귀중한피로다 (202장 1절)”
2.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이 땅에서 천국 시민으로 거룩하게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15-20)
하나님이 무엇을 꼭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하십니까?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사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지 못하면 가나안의 축복과 권리를 얻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끊어지면 안됩니다. 어떻게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기억하고 지키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스라엘에서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19절 보십시오. 타국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이든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든지 이스라엘에서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제거당한다는 말은(19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추방 곧 출교(黜敎)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각종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민9:13) 죽음에서 살아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권리를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왕자가 되었는데 거지처럼 살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거되지 않기 위해 무교절을 어떻게 지키라고 말씀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져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누룩은 집에 있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1) 기간은 아비월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입니다. 유월절에 이어 바로 일주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2) 대상은 타국인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19절 보십시오. 민족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중다한 잡족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출생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된 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에 의해 형성되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이전의 혈통 위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언약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출애굽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3) 장소는 어디에서든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4) 어떻게 지키라는 것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첫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직업상의 일이나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말고 예배만 드리라는 것입니다.(레23:7) 각각 최소한의 식물만 갖추고 예배에 방해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 어느때까지 지키라는 것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홀로만 예수 믿지 말고 대대 손손 예수를 믿어 신앙의 가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6) 이렇게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힘없는 노예 집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정복하러 가는 막강한 군대, 곧 하나님을 대장으로 모신 여호와의 군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민1: 3)
무교절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교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구원원이 되어 예배의 특권을 누리고 사는 것은 무교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교병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겠습니까? 무교병은 누룩으로 발효되지 않은 빵입니다. 성경에 보면 누룩은 여러 가지 상징으로 나와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라는 말씀은 누룩을 하늘나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갈5:1-9에서는 거짓 교리를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마16:6-12에서는 외식 주의자들의 교훈을 말씀합니다.
고전5:5-8에서는 오염되기 쉬운 죄악을 말씀합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6)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8)”
여기서 바로 무교절의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없는 떡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 22-29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 없는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성찬식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는 성찬식을 행함으로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교절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될 수 있습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 10:17)”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릴 수 있는 권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6대 권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자녀의 권세를 누립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둘째, 예배의 권세입니다. 아무라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세째, 기도의 권세를 누립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
넷째, 죄 용서함 받는 권세를 누립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다섯째, 귀신을 내어 쫓는 영적 권세를 누립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여섯째, 증인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이런 하나님 나라 백성의 권세를 누구를 통하여 누릴 수 있겠습니까? 무교절 누룩없는 떡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온다고 해도 무교적 누룩없는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권세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3.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상속하는 것입니다.(24-28)
하나님이 무엇을 꼭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하십니까?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을 받는 방법을 꼭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동일하게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교절을 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유월절도 마찬가지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지키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오고오는 세대에 영영히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허락한대로 가나안 땅에 이를 때 이 예식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잃어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세했다고 옛날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 이후에도 계속 지키라는 것입니다.
셋째, 의미를 후손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이 예식의 의미를 물어 봅니다. 그 때 무엇을 알려 주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힘있어서 애굽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있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집을 구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부요하게 해 주었으며,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풀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신앙 경험을 확실하게 자손들에게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둘째는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손들에게 가장 귀중하게 남겨줄 유산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의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부를 세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재산(4억9천2백만달러)으로 3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하고 자식에겐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는 미국의 철강와 카네기는 "상속은 자식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돈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좋은 청교도들은 자식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날린 사람은 록펠러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다 사기 당하고 빚 독촉에 시달려 자살을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의 한 때문에 미국 석유 90%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고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등으로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더 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석유 부자가 되었고 질병에서 치유받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 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한 명문대학입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돈이기 때문에 대학 교회 어디에도 내가 돈을 내어 지은 대학이나 교회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런데 유독 이름을 남긴 교회가 한 곳이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에 세워진 록펠러 처치입니다. 아내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아내를 천국에 보내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교회를 세우고 헌당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 경제부 기자가 록펠러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36년 동안 세계 제 일의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때 그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부자가 아닌 줄 알고 있는데요"
그 때 록펠러는 웃으면서 부모는 가난하게 사는 농부였지만 나에게 세계 제일을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유산 물려 주었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자신의 나이 8살 때 이제 너 혼자 주일학교에 가라고 보내면서 손에 일주일 쓸 용돈 20센트를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좋아하는 아들에게 단호하게 그 중 2센트는 너의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것이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그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는 십일조만 관리하는 직원 40명을 별도로 두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하도 이상하여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업가들은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해도 안 되는 데 선생님은 십분의 일을 헌금하고도 어떻게 잘 됩니까? 그 때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겨우 보는 것이 3-4년 밖에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30-4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인으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은 링컨이라고 합니다. 그는 켄터키 주 초라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동생, 아홉 살 때 어머니, 열여덟 살 때 여동생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두 아들은 그의 눈앞에서 죽어갔습니다. 아내는 거의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입니다.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몸이 허약했습니다. 잡화점을 차렸지만 빚만 지고 가게가 망하였습니다. 빚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불행한 결혼, 거듭되는 실패,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그의 어머님이 물려준 신앙이었습니다. 링컨이 가장 좋아했던 성경구절은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배웠던 이 성경 구절이 링컨의 평생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실패도 절망도, 좌절도 범죄도,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상이 링컨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에서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21-23). 우리가 함께 천국 시민으로 거룩하게 사는 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15-20)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상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