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꽃이 필 무렵
하루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시간.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들판 앞에 거짓말처럼 발걸음이 멎었다. 초록의 파도 위로 연보랏빛과 하얀빛의 거품이 일제히 부서져 내리는 듯한 장관. 가까이 다가가 뷰파인더 너머로 그 여린 얼굴들을 들여다보니, 네 장의 꽃잎이 십자가 모양으로 단정하게 피어난 ‘무꽃’들의 군락이다.
흔히 밥상 위에 오르는 투박한 채소의 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맑은 수채화 물감을 엷게 풀어놓은 듯 청초하고도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길을 걷다 마음에 들어오는 풍경을 낚아채어 사진으로 담고 문장으로 엮어내는 일은, 이렇듯 무심코 지나쳤던 생명들의 숨겨진 진가를 호명하는 참으로 가슴 벅찬 의식이다.
농부의 입장에서 무꽃이 만발한 밭은 곧 수확을 포기한, 실패한 농사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취하고자 하는 것은 희고 단단하며 물이 오른 무의 뿌리이지, 그 위에 피어나는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는 제 꽃을 피울 틈도 없이 일찌감치 뽑혀 누군가의 식탁 위로 올라가야만 제 몫을 다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때를 놓쳐 밭에 그대로 남겨진 무는, 캄캄한 흙속에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그예 질긴 꽃대를 허공으로 밀어 올린다.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땅속의 뿌리는 수분을 잃고 바람이 들며 억센 심이 박혀 더 이상 식재료로서의 쓸모를 잃고 만다. 제 몸을 거칠고 딱딱하게 비워내는 뼈아픈 희생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저토록 황홀한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쓸모를 잃어버린 뿌리의 무덤 위에서 이토록 눈부신 보랏빛 구름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서늘하고도 숭고한 역설이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치를 상실한 것들이,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토록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抒情詩)가 되어 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다.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와 기어이 자신의 우주를 펼쳐 보이는 무꽃의 생명력 앞에서, 렌즈를 쥔 손끝에 뭉클한 전율이 일어난다. 꽃잎 하나하나에 맺힌 저녁 햇살은 버려진 것들이 피워낸 환희의 눈물 같기도 하고, 끝끝내 자신만의 색깔을 세상에 내보이고야 만 생명의 짙은 안도감 같기도 하다.
바람결에 파르르 떨리는 연보라색 꽃잎을 가만히 쓸어보노라니, 오래전 아득한 기억의 갈피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당신의 한평생은 척박한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모진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밭고랑의 무와 같았다. 자식들 행여 배곯을까 노심초사하며,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에 따뜻한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싸주시던 그 투박하고도 다정했던 손길. 어머니의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발뒤꿈치와 마디마디 굵어진 굽은 손가락은, 자식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진액을 다 짜내고 텅 빈 바람만 남은 무의 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식들이 세상이라는 밝은 곳에서 환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어머니는 평생 당신의 이름 석 자마저 흙먼지 속에 묻고 사셨다. 화려한 외출복 대신 늘 물 빠진 수수한 옷을 입으셨고, 자신의 쉼보다는 가족의 안위를 먼저 살피셨다. 저 무꽃의 아련한 연보랏빛을 보고 있자니, 명절날에나 이따금 꺼내 입으시던 어머니의 낡은 치맛자락 색깔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진다. 세상의 잣대로는 그저 이름 없는 여인의 고단한 삶이었을지 모르나, 당신이 온몸을 바쳐 길러낸 숭고한 희생은 내 삶의 가장 든든한 밑동이 되어 지금의 나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다.
세월의 강물은 무심히도 흘러,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걷던 소녀는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황혼의 언덕배기에 서 있다. 삶이라는 길고 험난한 밭고랑을 지나오며, 나 역시 서리 내린 아침을 견디고 뙤약볕 아래서 묵묵히 버텨내려 애썼다. 숱한 희로애락의 계절이 지나가고 이제는 육신 곳곳에 세월의 바람이 스며드는 나이가 되었지만, 지나온 굽이진 시간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길 위의 동무들과 어울려 유랑하며, 세상의 맑은 풍경들을 낚아채어 렌즈에 담고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애 가장 평온하고 눈부신 개화기임을 깨닫는다. 치열했던 젊은 날의 무거웠던 짐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오롯한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산그림자가 밭고랑을 덮으며 무꽃밭 위로 저녁노을이 붉고 깊게 스며든다. 하얗고 연보랏빛이던 꽃잎들이 황혼의 빛을 받아 한층 더 신비롭고 아득한 색으로 물들어간다. 나는 이 고요하고 웅장한 들판의 교향곡 앞에 서서 오래도록 셔터를 누른다. 비록 화려한 장미의 정열이나 백합의 짙은 향기는 아닐지언정, 척박한 대지 위에서 제 모든 것을 비워내고 끝끝내 피워낸 저 무꽃의 단아한 자태를 나의 문장 속에 고스란히 옮겨 심고 싶다.
내 남은 생의 여정도 저 밭에 남겨진 무꽃 같기를 소망해 본다. 세상이 정해놓은 유용함을 넘어, 묵묵히 내 안의 맑은 풍경을 길어 올리며 걷는 길. 오늘 길 위에서 주운 이 연보랏빛 위로가, 팍팍한 세상을 걷고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 작으나마 다정한 쉼터로 피어나기를 기도하며 가만히 카메라를 품에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