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소설 – 이광수
이광수(1892-1951)는 1917년에 소설 ‘무정’을 신문에 연재함으로 신소설을 근대소솔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듣는다. 3. 1 운동 이후에는 제대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그러나 3월에 귀국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배신자라는 말을 듣고 칩거해 있어야 했다.
1922년, 개벽 5월호에 ‘민족 개조론’을 발표했다. 우리의 민족성을 개조하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는 ‘민족허무주의’를 펼쳤다. 이 글은 일제에 대한 투쟁 의지를 약화시켰다고 하여 비난이 쏟아지자 자기의 이름으로는 글을 발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가실’‘거룩한 죽음(최재우를 다룬 소설이라고 함)’를 발표했다. 이 글도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동아일보에 전속되며너 동아일보에 소설을 구준히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근대주의라고 하는 사실주의를 담지 못하여서 근대소설로 평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한다.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전속되어서 글을 쓰는 만큼 신문사의 요구룰 따를 수밖애 없었다. 신문사의 수익과 관련되어서 통속적이어야 한다는 관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광수는 독자를 타락시켰다는(질은 떨우엇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흙은 수작이었다.
역사소설에도 눈에 돌려, ‘마의태자’ ‘단종애사’등을 발표하였다. 어쨌거나 독자의 요구를 따르다보니 그의 소설이 신소설을 벗어나 근ㄷ소설ㅇ 이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근대소설은 사실주의 기벚으로 서술해야 하는데, 이광소는 독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다 하니 장한몽처럼 신소설 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다.
이광수는 재능있는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자기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게 민족 지도자로 자처했다. 자기의 인기를 과신해서 작품 창작을 함부로 했다. 오래 동안 ‘동아일보’의 전속 작가로서 신문이 요구하는 이념 선전과 영리 타산을 한꺼번에 만족시켜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민족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간다고, 스스로를 높였다.
이러한 그의 착각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파탄을 몰고 왔다.
(*지금까지 이광수 연구를 발표한 여러 논문을 취합해보면 결론은 대략 위의 글입니다.)
첫댓글 신문소설-이광수
이광수는 1917년에 소설 "무정'을 연재했다.신소설을 근대소설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듣는다.그는 1922년 개벽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다. 우리의 민족성을 개조하지않고는 희망이 없다는' 식의 민족 허무주의'를 펼쳤다. 이 글은 일제에 대한 투쟁의지를 약화시켰다는 비난이 쏟아졌다.그는 동아일보에 전속되어 글을썼음으로 신문사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문사의 수익과 관계되어
통속적이어야 한다는 관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그래서 이광수는 독자를 타락시켰다는 평을 듣는다.그중에서도 흙은 수작이었다. "마의태자""단종애사"등 역사소설도 발표하였다.독자의 요구를 따르다보니 그의 소설이 신소설을 벗어나 근대소설로 이르기까진 문제가
있다고 한다.그러나 그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다.이광수는 재능있는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자기스스로 민족 지도자로 자처했다. 자기의 인기를 과신해서 작품 창작을 함부로 했다. 오래 동안 ‘동아일보’의 전속 작가로서 신문이 요구하는 이념 선전과 영리 타산을 한꺼번에 만족시켜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민족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간다고, 스스로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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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