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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중에서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않다. 다만 간택을 꺼릴뿐이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좋고 싫음 마저 없다면 (지도至道가) 통연히 명백해진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호리유차 천지현격)
털끝 만큼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진다.
欲得現前 莫存順逆 (욕득현전 막존순역)
지금 바로 체득하고 싶다면 순과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해설>
‘지도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다만 분별, 취사(取捨)를 꺼릴 뿐이다. 분별, 증애조차 없으면 (지도는)통연하게 명백해진다.’
분별이 사라지고 증애를 품지 않는다면 본래의 ‘지극한 도’(일신강충심)가 통연히(물흐르듯 자연히) 밝고 환해지겠지만, 털끝만큼의 차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 아득히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를 바로 지금 체득하고 싶다면 분별을 일으켜, ‘순리’에 맞다든지 ‘어긋남’ 이 있는지 여부 등을 따지거나 문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회사같은 조직 내에서, 우리 팀장은 문제가 많고 어느 팀장은 제대로 된 팀장이라는 식으로 불만을 제기하거나 왈가왈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리 거역,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상대의 두 견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지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도 즉 ‘지극한 도’가 현전(현재 목전)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공심 상태, 즉 자아가 ‘공’하여 무아(無我)의 아가 실현할 때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를 자아 앞(前)에 지도가 나타난다(現)라고 하면 크게 잘못된 이해다. 말하자면 자아와 지도를 둘로 보는데서 오는 착각이다. 무난의 지도, 하늘과 땅 그대로가 청정이다.
해설: 혜원스님 (동국대 선학과 교수)
-요점 정리-
지극한 도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닌 일상의 생활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나 분별, 차별, 시시비비가 장애이다.
사람들은 분별로 살아가나 다만 좋고 싫음의 분별과 시시비비의 가림을 내려 놓는다면 모든 장애가 사라져 지도가 통연하게 명백해진다.
분별이 사라지고 증애 조차 품지 않고 벗어나면 본래의 청정심이 자연히 나타나겠지만 털끝 만큼이라도 차이가 난다면 하늘과 땅 사이 벌어진 만큼 도를 이룸이 아득히 멀어진다 .
따라서 바로 지금 도를 체득하고 싶다면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지어다.
예컨대 범죄자 수준이 아니라면 회원 가입 승인절차를 두거나 가입 거절 따위 같은 짓은 하지 말지어다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도는) 통연히 명백해진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도 우리 마음의 일반적인 작용이므로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마음을 얻어 지도(至道)가 통연하게 명백해지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간하는 것, 즉 가려내는 것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적인 마음의 작용이고,
택하는 것, 즉 뽑아내는 것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하니 ‘간택하는 마음의 작용을 꺼려한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가려내거나 택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분별심이 없는 마음이라 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하는데, 무분별지에 이르면 지도(至道)가 환하게 보인다는 말씀이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다.
■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지극한 도란 곧 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 즉 변견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 但莫憎愛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洞然明白 통연히 명백하리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탁 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네 귀절이 바로 신심명의 근본 골자입니다.
임제 정맥으로 낭야각 선사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를 내려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낭야각 선사가 답하기를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 첫 구절만 큼직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뒷 구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쓰서 주해로 붙여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요?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구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다른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의 주해일 뿐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낭야각 선사가 앞 네 구절만 크게 쓰고 뒷 구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써,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구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뒷 구절들은 더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낭야각 선사의 말씀처럼 뒷 구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간택(揀擇)함이 없는 마음이나 증애(憎愛)함이 없는 마음바탕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리고 택하는 차별심이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남아 있으면 이 차별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져 있는 상태가 우리들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앞 세 구절을 종합해보면,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며, 욕심은 구하는 마음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만스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구하지 않는 것도 있게 되니 자연히 좋고 나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구하던 것이 구해지면, 더 좋은 것을 구하려 하게 되고, 또 점점 더 좋은 것을 구하려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언젠가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또 이렇게 구하고 모아서 쌓아놓은 자기 것을 잃게 되었을 때도 역시 불만스럽게 되고, 그 불만이 커지면 원한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원한(怨恨)은 복수(復讐)로 이어질 수 있으니,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발단은 간택하는 분별심과 증애(憎愛)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오직 간택(揀擇)하는 마음을 싫어하면 지도(至道)에 무난히 이를 수 있고, 증애(憎愛) 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하는 길이 통연(洞然)하고 명백(明白)해진다고 한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택하는 마음이나 증애하는 마음은 이기심(利己心)의 근본인 오온심(五蘊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오온심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인데, 물질은 몸이고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은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감각작용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말이나 행동, 즉 간택 및 증애하는 느낌, 생각, 언행의 근본이 되는데 식(識)에서 일어난다.
이 의식은 전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나 금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지배하는 나의 생각이다.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택하거나 버리는 생각의 요인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되고 행하는 것이지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 미운 털이 박혀있어서 미운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미운 털이 박혀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 물건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된다.
절에 오면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중에는 자기 비위에 맞는 사람도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내 비위에 맞고, 그 사람 자체의 성격이 나빠서 내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신의 오온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만 있으면 그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다 하더라도 그를 간택하거나 증애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사람과 물건이 서로 어우러질 때 생(生)함이나 성장함이 일어나는 법이고 창조가 가능해 질 수 있지만,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할 때는 서로 쇠퇴해지고 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남을 상대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대열에서 소외되고 자기 성격의 개선(改善)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외골수로 빠지게 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간택하고 증애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남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씀한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思考)의 허물에 의해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관점(觀點)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오온심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소멸하기 위해 참회하고, 복을 짓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참회는 복(福)을 짓는 뿌리이고, 복을 짓는 행위는 수행을 위한 뿌리이다. 즉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 짓는 일부터 해야 하고, 복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거나 해(害)가 되는 일을 한 성품, 말, 행동 등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참회를 통해서 복(福) 짓는 일에 역행하였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서 복 짓는 일에 가속이 붙게 된다. 복을 짓고 수행하는 일에 근본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을 믿는 신심(信心)이다. 인과응보를 믿고 제행이 무상함을 믿으며, 제법이 무아하다는 가르침을 내려주신 불법승 삼보를 믿는 마음이다.
복 짓는 마음이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그 과보로 금생에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건강 복, 부모 복, 형제 복, 친구 복, 스승 복, 관록 복, 명예 복, 재복, 사업 복, 부인 복, 남편 복, 자식 복, 불교를 만나는 복, 노래를 잘 부르는 복, 그림을 잘 그리는 복, 총명한 복 등등 수 없이 많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복을 짓는 업이 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느 쪽으로 복 짓는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항상 남과 잘 사귀고 남에게 필요한 일, 좋은 일을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연을 많이 짓다보면 선한 도반을 많이 만나고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 또는 귀인을 만나 하는 일마다 잘 풀려가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 하는 언행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 때, 저 사람의 언행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되는 즉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택(揀擇)이 없고 증애(憎愛)가 없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낸 화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변명하려하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을 오히려 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난 것을 인지하는 즉시 마음 속 깊이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찾아 하면 화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택심과 증애심도 점차 해소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복 짓는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밖에 있는 일이 아니다. 절에 와서 신도님들이나 불사(佛事)를 위해 하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은 훌륭한 복 짓는 업이며, 예불에 참여하여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법문을 듣는 것 또한 좋은 복을 짓는 일이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곧 자기 마음을 가장 잘 다스리는 법이 되기 때문이다.
복을 잘 지어 부처님 법에 수순할 수 있을 때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 탐욕심을 비워 선정(禪定)을 이루고 무명을 밝히는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 욕득현전(欲得現前) 막존순역(莫存順逆)
(지극한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순(順)과 역(逆)이 있게 하지 말라.
이 구절을 바꾸어 보면, 순(順)과 역(逆)이 없을 때 도(道)가 나타난다. 라는 뜻이 된다. 즉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순조(順調)롭다고 기뻐하고, 어렵다고 실망하는 사람에게는 도(道)가 멀어진다. 즉 순조롭다 어렵다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이 없으려면 일이나 수행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속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여기에서 지극한 도라고 하면 부족함이 없고 불만도 없어 근심 걱정이 없는 극락세계인데 조급(早急)한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은 근심 걱정 불만을 떠날 수 없으니 극락세계에 이를 수 없다. 그러하므로 극락세계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내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필요한 일체가 이미 지금 이 자리에 주어져 있음을 보는 눈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거슬리는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순역(順逆)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순역(順逆)이 있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순역자체가 있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리로 되간다고 기뻐하는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역행(逆行)한다고 짜증내는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씀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을 일으키게 되면 현재의 상황(狀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을 감정으로 가려지게 하지 말고 현재의 사정을 자세히 바라보면 잘되는 사업은 더욱 잘되게 할 수 있는 법이 보이고, 안 되는 사업은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 눈앞에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요즈음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어려울 때일수록 어렵다는 감정이 쌓이게 되면 현재의 사정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그 감정에 의해 가려지게 되므로 현재의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는다. 감정은 현재의 상황 판단에 장애만 일으키므로 감정만 일으키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불성(佛性)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불성이 우리들에게 좋은 길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순역(順逆)에 당하여 일으키는 감정이 불성을 가리기 때문에 지도(至道), 즉 극락세계를 볼 수 없는 법이니, 가장 바른 길을 보고자 하면 순역이 있어도 그에 대한 좋고 나쁜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 순풍(順風)에는 순풍을 잘 이용하는 법을, 역풍(逆風)에는 역풍을 잘 이겨내고 또 그를 잘 이용해서 득을 볼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순(順)이나 역(逆)이 사람들의 착각에서 오는 수도 있다. 실제로는 자기를 거역하는 일인데 순(順)으로 보이거나 그 반대의 경우이다. 이러한 착각은 과거에서부터 쌓아온 경험에 의해 형성된 성격의 표출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고생하게 되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성격 형성과정을 잘 살펴서 고침으로서만이 착각에 의한 순역을 막을 수 있다.
이 말씀은 순역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씀도 아니다.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내 마음 속에서 순역(順逆)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으면 좋지만, 혹 일어나면 그 순역을 자각(自覺)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에 흔들리지 않고 물들지도 않으며 깨끗한 마음으로 그 대상을 바로보고 바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 열린다. 이것이 도를 구하는 사람의 청정한 마음이기 때문에 ‘지도(至道)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면 순(順)과 역(逆)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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