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꺾이지 말고 영성체 예식 중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에 사제가 ‘…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면 회중은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화답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고, 주님을 마주 뵙고 만나는 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세상 마지막 날이고, 내가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뵙는 날은 내 인생 마지막 날이다. 대림 기간은 그걸 더 실감 나게 수련하는 시간이다. 대림 기간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성탄절의 기쁨은 우리가 왜 잘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시련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시련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러는 가운데에 내 신앙이 받는 도전,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드는 의심, 내 마음에 스며드는 나태함이겠다. 그것들에서 신앙을 잃지 않게 보호해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거다. 도전과 의심을 견디고 나태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 이 세상에서는 선하고 의로운 이들이 고통을 많이 받고,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이들에게 상보다는 더 많은 십자가를 짊어지게 한다. 의인들은 부당하고 불의한 권력의 남용과 횡포로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도전은 불의한 제도에 침묵하고, 양심에서 흘러나오는 가늘지만 분명한 목소리에 귀를 막고 싶은 유혹이다.
그런 유혹의 본모습은 돈인 거 같다. 이윤 극대화를 위하여 인권이 유린된다. 우리는 그 때문에 희생된 몇몇 우리 청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운 이주노동자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인권주일 담화문은 기업이 비용을 줄이려고 소위 ‘위험의 외주화’에서 이제는 ‘위험의 이주화’가 되어 가고 있다 지적한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리고 공사장에서 안전 장비 없이 일하는 근로자들을 볼 때마다 ‘왜 사람이 사람한테 이렇게 모진가?’ 하며 한숨짓곤 한다. 100층짜리 건물인들 내 목숨과 바꿀 수 있겠나? 그리고 그 건물이 정해진 내 날 수에 단 1분이라도 더해줄 수 있나?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그것이 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증언할지 생각해 봤나?
하느님의 심판은 단심제이고 그 심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영원히. 이것이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배우고 믿은 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고통과 의심과 나태함으로 인해 하느님을 향한 내 마음이 꺾이지 말게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시며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하신다. 하지만 평소 하지 않은 걸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갔던 운 좋았던 죄수가 있었다(루카 23,42-43).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신다는 메시지이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평소 마음에 있던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법이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
예수님, 주님은 저를 언제나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저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믿음이 시련을 겪을 때 마음이 꺾이지 말게 해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