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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 들녘 내려보는 마을에 어머니 눈웃음 닮은 돌각담 길 조붓조붓 나 있습니다. 보리밭 실개천 지나 앵두가지마다 불 밝힌 오롯한 풍경을 보셨는지요. 돌각담 길에 들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저렇게 예쁜 돌각담 길 내어주며 끊어진 세상의 길을 잇는 듯 싶습니다. 슬픔과 절망도 약으로 달여 쓸 것 같은 봄바람 한 줄기 앵두꽃 등 켜진 돌각담 들어 섭니다.
-------- 민병일 <평사리에서>
섬진강을 옆구리에 끼고 평사리에 왔습니다. 벗꽃과 배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대신 매화와 산수유가 맞이합니다. 월선이 주막에서 섬진강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애달픈 마음 하나 잡아 보려 평사리로 왔습니다.
섬진강 국도 19호선, 평사리 초입부터 상춘객으로 시끌벅적합니다. 원래 상평마을과 하평마을을 합쳐서 평사리라 했습니다. 세트장으로 번잡한 상평마을을 그대로 지나쳐 하평마을로 갔습니다. 고요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람소리조차 바람에 묻혀 버립니다.
마을길로 들어서니 예의 돌담길이 잊지 않고 맞이해 줍니다. 10여 년 전 평사리는 한적한 여행지였습니다. '토지'의 동경심을 안고 이곳으로 찾아온 몇몇의 사람들만이 돌담길을 가만히 거닐 뿐 온톤 마을을 쑤셔대는 열병은 아니었습니다.
조붓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가니 우리네 어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낙네와 처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듯 해질녁 마을 우물은 돌담에 안겨 있었습니다.
소여물을 자르는 기계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평사리의 집집마다에는 '공루'가 있습니다. 허공에 정자 하나 올린 이 공루는 이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양반댁의 화려한 정자가 아니라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 온 조금은 초라한 정자인 셈입니다. 곡식과 건초를 보관하기도 하고 날이 더워지면 시원한 바람을 쐬기도 하는 민초들의 소박한 정자로 소용됩니다.
마을길을 벗어나니 초록 빛깔의 봄풀들과 하얀 매화, 푸른 대나무가 바람에 가만가만 흔들립니다. 김개주와 윤씨부인, 구천과 별당아씨, 강포수와 귀녀, 용이와 월선의 모습들이 지나가고 서희와 길상이 마지막에 또렷이 다가 왔다 사라집니다.
소설의 배경인 구한말만 하더라도 이곳 악양벌판과 맞닿은 섬진강까지 배가 들어 왔다 하니 상상은 더욱 현실에 가까워집니다. 그저 평사리를 지나쳤을 뿐 소설을 쓰기 전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다던 박경리 선생님. 지리산과 섬진강의 역사의 흔적들, 인근지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드넓은 악양 벌판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소설의 시작이었습니다. 큰 부잣집이 인근에 있었는데, 역병으로 가솔을 잃어 추수도 못한 채 곡식을 들판에 버려두었다는 이야기가 작품 구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봄의 가운데에 서 있는 오늘은 '토지'의 풍부한 이야기거리보다 사랑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김개주에게 겁탈당하고 아들을 버린 윤씨부인은 사생아의 밤도망을 도와, 버린 아들에게 마지막 사랑을 보여 줍니다. 최참판댁 머슴으로 들어가 형수뻘인 별당아씨와 도망을 간 구천이, 그들의 사랑은 전국을 헤매다가 묘향산 근처에서 별당아씨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종이라는 신분과 양반에 대한 증오에 최치수를 살해한 귀녀, 옥중에서 강포수의 지순한 사랑에 자신의 죄를 참회합니다. 귀녀가 옥중에서 낳은 강두메의 출생 비밀을 지키기 위해 결국 강포수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평사리에서 제일 인물 좋은 용이와 무당의 딸인 월선의 사랑은 가장 숭고하며 애틋합니다. 이상현과의 은밀한 사랑을 정리하는 냉정한 여인 최서희, 한때 옥이네라는 과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끝내 서희의 곁을 그늘처럼 지키던 길상. 그들의 사랑이 오늘 여행자의 마음을 후리고 갑니다.
이런저런 상상들이 과거의 현실이 되어가려 하자 평사리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엿습니다.. 멀리 사람들과 차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어두워 한산해진 상평마을 옆을 돌아 고소산성 가는 길에 들어 섰습니다. 갑오농민군들의 서러운 함성 소리가 어디선가에서 들려 옵니다.
발아래로 드넓은 악양벌판과 저문 섬진강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하얀 목련꽃과 백사장, 저녁의 푸른 안개, 삭막하니 아직은 겨울인 산과 푸른 보리 들녘, 간간이 섞인 녹차밭과 노오란 산수유, 매화나무에 둘러싸인 소나무 두 그루, 저무는 보라빛 섬진강을 아이는 말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풋고추 열무쌈 불땀나게 먹고 누런 똥 싼다. 돌각담 틈새 비집고 들어온 바람 애호박 꽃망울 흔드는데 이쁘구나 힘주어 누런 똥 싸다보면 해지는 섬진강 보인다. 사는 일 바라거니 이만 같거라. 땀나고 꽃피고 새 거름 되거라.
-------- 곽재구의 <누런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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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느 지난날의 한시절에 아이의 모습은 바로 저의 모습이었죠. 강을 바라보는 마음. 나무와
을. 풀. 벌레. 가축들까지도 나와같은 느낌으로 보았던 어느 한 소녀가 지금 또 저곳에 선다면 그 마음으로 볼수 있을런지...흐름이 마음을 막아 버렸을지...생각해 봅니다...
아련한 지난날의 추억에 잠기게 하는 고운 덧글이네요...추...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