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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에게 눈을 뜨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이 보고 싶냐’ 는 질문에 그는 아침에 일어나 방 위 천장을 보고 싶다는 대답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 소박한 대답 속에서 간절한 그 마음이 가득 배어있음을 예전엔 미처 몰랐지만 이제 와 실감이 나는 건 왜 일까?
성진은 지금 조용히 눈을 껌뻑이며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 댄 채 있는 병실의 생동감 없어 보이는 하얀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이 그리도 그립고 아득 하다는 느낌은 처음 인 것 같았다.언제나 당연히 특권 같이 부여 받았던 삶, 그 고단함이 그리워지는 건.
성진은 주위를 둘러보다 닝겔 바늘이 꽂혀 있는 손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다 아직도 생동하며 펄떡이는 왼쪽가슴 한켠에 가만히 그의 손이 머물렀다.
경이로웠다. 이 움직임이, 이 살아 솟구치는 느낌이 그가 홀로 깊은 상념 [想念]에 빠져 있는 사이 병실 문이 달칵 열렸다.
그는 깨어나 자신의 살아있음에 감격해 있는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뜻 미소가 어렸던 것도 같고 .
“꼬박 하루 만에야 다시 보게 되는 구나.”
성진은 이 낮익은 음성이 자신의 묵상을 방해해서인지 잠시 이맛살을 구겼다.
“의식을 되찾았다 해도 절대 안정이야. 음식도 절대 안 되고.”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갓 입대한 훈련병에게 주의를 주는 교관 같은 자세는 어디 간 게 아니었다.
“사장님 곧 오실거야. 간호실에 너 깨어났다 얘기하기 전 먼저 통화 했거든”
성진은 말없이 태형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미안 하다는 말 니 녀석에게 안 어울리는 거 알고 있지?”
태형은 그 말을 남겨 두고 황급히 뒤돌아 등을 보였다. 제 생각에도 뭔가 끈적이는 느낌 이였던 모양이다.
푸훗 하는 웃음소리가 성진으로부터 먼저 흘러나왔다.
간결한 두 번의 노크 소리 정말 그 다운 기척이다.
“다행이다.”
말없이 성진을 내려다 본 뒤 나온 그 시니컬한 대답에 성진도 냉소로 응수 했다.
성진과 그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혀 상쇄했다.
성진은 처음에 태형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도 자신의 존재를 끔찍해 하던 그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피를 나누었다는 말에 성진은 한참을 멍해 있었다.
성진은 이제 자신의 몸속에도 그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음에 어딘지 모르게 몸의 온기가 전해져 옴을 느꼈다.
“너도 알다시피 당분간 절대금식 이어서 대신 이걸 가져왔어. 아마 음식 따위 보다는 그게 더 니 치유에 도움이 되라 생각한다.”
성훈은 아깝부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 백을 성진의 곁에 두었고 그 안엔 낯설지 않은 핸드폰하나가 산산이 부서져 놓여 있었다.
“이건!”
“그래, 너도 알고 있지.”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태수 놈이 그렇게 순순히 경찰의 손에 넘겨지진 못했을 거야.”
막 모터사이클에서 튕기듯 뛰어내려 곧장 가게 안으로 걸어 내려가 입구에 다다르는데 옆으로 난 복도 우측에서 먼저 선 빵을 날리던 녀석의 헛스윙을 살짝 피해 녀석의 면상에 바로 왼 발굽을 먹여주고 난 뒤 출구 문을 열자 안은 이미 태형의 정리로 거의 마무리 되어 가던 참인데 마침 태형의 뒤로 깨진 맥주병을 들이대려는 녀석이 시선에 들어 와 우선 놈부터 처단하고 태형과 등을 맞댄 채 진열을 가다듬고 보니 그 사이 쥐새끼 같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계획과 틀어짐을 간파한 태수가 빠져 나가려 출구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어느 틈엔가 어둠에 휩싸여 있어 미쳐 보지 못한 좌석사이에서 검은 벽돌 하나가 난대 없이 날아오더니 그대로 태수의 뒤통수에 가 그대로 꽂혔고, 태수가 그것을 맞고 잠시 휘청이는 사이 태형이 달려가 녀석의 팔을 비틀어 포박해 버렸고 조금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태수 무리는 넘겨졌다.
.............................
“왜 그랬어?”
“!”
성훈은 아직도 자신의 팔뚝에 단단히 꽂혀 있던 바늘을 내려다보는 성진을 바라보며 그의 침대 끝에 같이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몰랐는데, 막상 그렇게 보낸 다는 건 어쩐지 억울하더라고.”
“?”
“내내 두고두고 복수해야 하는데 지금 보내긴 아쉽더라고, 가끔 스트레스 쌓일 때 애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끝까지 자신의 편리대로 이용하기 위해 날 살려두셨단 말이지, 당신 마음대로!”
“왜? 기분 나쁜가?”
푸훗~
성훈의 그 대답이 결코 싫지 않아 얼떨결에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곧장 일그러진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쓴 신음소리를 뱉어내고 쓰러지자.
얼른 성훈이 달려와 호출버튼을 누르려했지만 성진이 그 의 팔을 붙잡아 내렸다.
성훈은 고통스러워하는 성진을 내려다보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했지만 이 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성진의 뜻을 인정했다.
“ㅅ, 성진아”
아픔 가운데서도 성진의 귀엔 또렷이 그 음성이 각인되어 박혔고, 그의 이름을 자신의 입으로 불렀다는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마른 헛기침을 하며 성훈도 은근히 시선을 돌려 물었다.
“괜찮은 거야?”
“난, 괜찮아. 형.”
처음이었다.
그가 나를 불러 주는 것도, 그리고 내가 그를 형이라 불러 주는 것도 이후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흐르진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그 어떤 말보다 더 깊은 확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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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렬하던 한 여름의 열기를 머금던 초록빛 잎사귀들이 이젠 하나하나 붉고 노란 빛으로 탐스럽게 익어 간다. 너와 함께 했던 다시 오지 않을 내 스무살의 사계도 그렇게 영글어 가는 구나.
지금 시안의 머릿속에는 성진과 함께 했던 결코 길지도 짧지만도 않은 시간들이 차곡이 정리 되어 떠올라 시안을 미소 짓게 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시안은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등 뒤로 고개를 저었다.
“다 돌고 왔어. 나 잘했지?”
“그래 잘했어.”
엄마에게 확인 받고 좋아라하는 아들처럼 성진은 해맑게 웃었다.
아직은 거동이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보고 시안이 급히 주스를 따라 건네며 많이 힘들어? 라고 묻는 물음에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요놈이 예쁘게 아물어 가고 있다니까 재활훈련만 열심히 받으면 드디어 만나러 갈 수 있는 거다.
성진은 자신의 목표를 상기하며 눈을 빛냈다.
“뭐해 전화 안 받고 ”
“응?”
“아직도 니 벨소리를 구별 못하냐? 그건 신 폰에 대한 예우가 아니지 그거 최신형이라 키패드, 디카 맞먹는 화소에 넷 검색, 영상통화, 블루투스,VOD재생까지 된다며 ”
“내 꺼보다 좋잖아. 너 사실 공짜로 생겨서 더 좋지?”
“아, 끊어졌다. 근데 이거 누구지? 모르는 번혼데. 그럼 다시 해봐.”
“무슨 소리! 요새 보이스피싱이 얼마나 활개를 치는데. 아쉬우면 지가 다시 하겠지.”
“
“으~ 짠순이 안되겠다. 줘봐!”
“응?”
시안이 머뭇거리자 성진이 잽싸게 시안 폰을 빼앗아 쥐었다.
“뭐야? 뺀질이?”
성진이 눈을 부라리며 시안을 쏘아 보았지만 따끔거리는 뒤통수를 무시한 채 시안이 거드름을 폈다.
“오홋~ 그래도 1번이네. 봐줬다.”
그게 무슨 큰 아량이라고 으~ 눈꼴셔
“나 씻는다.”
윽~ 시안이 있든 말든 그 앞에서 마구 탈의 하는 녀석을 보며 시안이 기겁을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자. 성진의 한 쪽 입 꼬리가 슬쩍 말렸다.
“근데 왜 고갠 안 돌리냐? 이거 손가락 사이로 훔 춰 보는 거 아니야?”
“제, 제발 빨리 욕실 안으로 들어 가.”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눈을 바로 뜬 시안은 단촐하기 그지 없는 병실구조에 무료했던지 캐비넷 서랍을 살그머니 들춰 보았고 시안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성진의 폰을 뒤적였다.
“둔탱이? 이씨, 뭐야 ”
그 뒤 시안의 눈에 들어 온 성진의 디카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환자복을 걸친 귀여운 빡빡머리 꼬마가 한쪽 눈꺼풀을 뒤집어 까고 메롱하는 모습에 ( 이 인간 찍어도 꼭 지 같은 것만 찍어요), 귀여운 외모의 눈웃음이 매력적인 간호사, 문병 온 팀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성진과 머리를 맞대고 둘이 나란히 붙어 연인마냥 정희와 같이 얼굴 맞대고 찍은 사진(뭐냐, 세상에 그래도 남자인데 정희보다 더 작아 보이네) 등을 차례대로 넘겨보던 시안의 손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凸 -_- 凸
뭐야! 이건 축제 때 정희의 록키호러픽쳐쇼 분장이 아니었담 감히 얼굴 들고 학교 못 다니게 했었을 그거잖아!
“야 너 이거 뭐야!”
억 소리도 안 나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던 욕실 안 모습을 모두 봐버린 시안은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앞뒤가리지도 않고 순간 모든 이성을 잃어 손잡이를 비튼 자신의 손을 원망하고 있었다.
“야! 너 여자변태지!”
“너 아직 모르나 본데 나 아직 환자거든!”
욕실 안에서 녀석의 고래고래 질러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너무나도 참담한 녀석의 수술 자국을 봐 버린 시안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윽고 욕실 문이 열리기 전 시안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부리나케 밖으로 내빼려 했지만 바로 나온 성진의 손에 붙들려버렸다.
“가지마.”
성진의 눈빛은 간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상처 나 때문이잖아. 나 때문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시안의 목소리에 성진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고 시안의 그 미소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니 잘못이 아니야. 언젠가 꼭 한번은 지나가야 겪고 지나가야 하는 문제였을 뿐이야.”
“하지만, 미안해.”
시안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픔 가운데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그의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보여 눈물로 눈가가 촉촉이 젖어가고 있었다.
성진은 눈물로 젖어드는 시안과 눈을 마주하며 자신의 양손으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감싸 안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이어지듯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시안의 두 눈은 그를 바라보며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에 와 닿은 부드럽고 따듯한 성진의 입맞춤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고 그녀의 눈이 내려감기자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굵은 방울이 되어 흘려 내렸다.
짧고도 긴 듯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성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주위를 돌아보다 곁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에 손을 뻗었지만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손이 빗나가자 휴지는 바닥을 구르며 돌돌돌 저만치 풀려 나갔고 성진은 망연히 뻗어 있던 손을 거두며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주을께 걱정 마.”
시안은 서둘러 손으로 눈물을 지워내고 흘러간 휴지 뭉치를 따라 걸어 나가 다시 말아 들이며 성진이 소 있던 곳까지 천천히 다가가 왔고 그러자 품안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가 도르르 그녀의 목선을 타고 안에서 흘러 내렸다.
“하고 있었네.”
성진은 휴지 다 감아와 자신의 한발 앞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시안의 목걸이와 그녀를 동시에 바라보며 희미하게 보일 듯 말듯 숨은 미소를 보였다.
시안은 그의 시선이 머문 목걸이를 가만히 손으로 쥐어보며 그때를 떠올렸다.
성진을 쫒아 오기 바로 전에 나타나 차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던 오빠의 그리움이었던 그녀, 집에 오기 전 이미 카페에서 전해들은 웨이터의 뒷 중얼거림 속에서 섞여 있던 낫선 여자의 이름에 충분이 지금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시안은 준영의 진심을 듣기 전 시안은 아까 술집 마담이 전해준 핸드폰으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비발디 사계 중 겨울 2악장이 지나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참 고왔다.
몇 마디 나누지 못한 시안의 일방적 통화 이긴 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속에 그녀의 간결함과 차분한 성품이 느껴졌고 지금 준영을 측은히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도 시안이 목소리로만 떠올렸던 이미지와 그녀는 참 많이 비슷해 보였다.
그랬던 거구나.
그래서 였어.
그때...
MT에서 날 안았던 것도, 아직도 입술에 불꽃처럼 남은 짧았던 입맞춤도, 모두 그녀의 몫이었구나.
시안은 예전 준영에게 입학 선물로 받은 것과 같은 머리핀이 그녀의 길고 탐스러워 보이는 웨이브 머릿결 위에 단정하게 꽂힌 것을 보고 난 순간 마구 뒤엉켜져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정리 되는 것을 느꼈다.
그랬구나.
시안은 자신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그들이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뒤 창틈으로 핀을 놓아두고
그들을 떠나왔다.
“나도 언제부터 시작 된지는 몰라 하지만 어느 때 부터인가 준영오빠의 몸짓과 웃음보다 네 목소리와 네 미소가 슬퍼 보여 네 아픔이 내 아픔처럼 다가 와 더 내 가슴에 걸렸어.”
시안은 성진의 손을 다신 잡아 올렸다.
“이제는 이 손 내가 대신 잡아 줄 테니까 더 이 상 혼자 아파하지 마.”
마주 잡은 두 손이 곱게 포개어 지듯이 그들도 이제는 함께였다.
..............................
드디어 비상구를 찾았구나. 형.
귓가를 돌아 흐르는 땀방울이 거친 숨소리 속에 묻혔고 세준은 폐부가 터질 듯 숨을 몰아 내쉬면 서도 뿌듯하면서도 한편 서운함이 묻은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었다.
#58
“축하해 줄 거지.”
성훈은 단정하게 밀봉된 하얀 초대장과 그를 번갈아보고 의미 섞인 미소를 대답대신 건네었다.
“이루었구나.”
“그래, 내가 괴물을 이기다니,”
그야말로 이루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처음이다. 내가 괴물을 이겨본 건.”
“그런가?”
성훈은 자신을 지칭하는 그 말이 과히 나쁘지 않은지 언뜻 미소까지 보이며 편안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준영의 들뜬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인정하지 축하한다.”
“그럼, 이제 내가 소원을 들어 줄 차례인 가 본데”
성훈은 손에 깍지를 껴 앞으로 세워 모으고 턱을 괴며 언뜻 미소를 건네었다.
“설마, 인사 청탁을 필요로 하는 건가?”
역시 녀석은 괴물임에 틀림없다
준영은 녀석의 정확한 타구에 완전히 포석당한 듯 한 심정이 되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 길진 않다 해도 그간 사회생활에서 익힌 그 만의 최선책이었다.
“이젠 네 차례야”
준영의 눈빛은 간절히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을 얘기 했듯이 너도 니 마음을 얘기 해 그렇게 묻어 두려고만 하지 말고, 문이 언젠가 열리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용기 없는 자만의 착각이야. 네가 먼저 문을 열어두면 그는 자연히 네 안에 들어와 춤을 추게 될 거야. 이성은 차갑게 흐르지만 가슴은 따스한 곳을 찾게 마련이니까.”
‘가슴은 따스한 곳을 찾는다.’ 성훈은 준영의 청첩장을 고이 서랍에 넣어 두며 그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만약, 인사 청탁을 했어도 네 약속을 지켰을 텐데 후회하지 않겠어?”
사탕을 애원하도록 만든 뒤 권능을 베풀 듯 손을 내미는 녀석의 심리전은 이번에도 빗겨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을 빛나고 독보적이게 만드는 그만의 기술이기도 했다.
"글쎄, 한 십년 흘러 만년 과장으로 늙어가게 되면 마누라 잔소리에 이때가 두고두고 후회 될 런 지 몰라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 생각해. 고인 물은 언젠가 썩어 퇴적 되어가기 마련이니까.
순리대로 마음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제일 가장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법이라 믿어.”
“너 다운 대답이로군.”
“나 다운 거라.”
준영의 표정엔 약간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렇다 해도 방심은 금물이지. 지금의 나로서 널 따라잡는 다는 게 무리수이겠지만 가진 것이 없는 자로서 상대를 앞도하기 위해서는 병법을 쓰는 법이지. 아마, 하나 만큼은 확실히 김성훈이 죽었다 깨어도 날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거야.”
“이, 자식!”
역시 성훈은 눈치 빠르게 준영의 속뜻을 알아채고 고교 때 친구를 대하듯 준영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이제는 정원 나뭇가지에 남은 마지막 잎사귀마저 아스라이 달려 한 계절의 종국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렸다.
완연한 가을빛이 감도는 정원수들을 내려다보던 성진은 내일부터는 정확히 일상으로 돌아가 학교에 출석해야하고 접어 두어야 했던 팀에 합류해 공연 일정에 맞추어 안무도 새로이 작성해야만 하는 쫙 짜여진 스케줄을 확인해야했다.
‘너 빠지니까 애들이 기운 없어 한다. 종태 놈도 요새 통 안보이고 정희도 너 계속 안 나오면 바람 필 거 같아.’
태형의 죽는소리가 떠올라 성진은 피식 웃었다.
“성진 학생 밥 먹어요.”
“네.”
아주머니의 소리에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 성진은 무심히 가로질러 건너가던 거실 협탁 위 놓인 흰색 봉투에 시선이 머물렀다.
“차남 김준영!”
성진은 무심히 봉투에 적힌 이름을 읊조렸다.
.............................................
‘누구지, 이 시간에?’
밤 9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 울리는 벨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슬라이드를 밀어 올렸다.
“나와”
성진의 목소리였다.
다짜고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야 너 아직 근신해야 잖아.”
“내가 무슨 사고 쳤냐? 근신하고 있게, 암튼 나와라 10분 내로 데리러 간다.”
“야, 지금은....!”
툭.
끊겼다.
“으~ 이 막무가내 ”
피곤하다.
시안은 서둘러 남아 있던 집 정리를 하고 서둘러 거울 앞에 섰다.
빵~
정말 한 십분 쯤에 들려 온 오토바이 크랙션 소리에 시안은 서둘러 집 앞으로 달려 나갔고 그 앞엔 성진이 시동걸려있던 오토바이 위에 올라타고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이래도 돼?”
걱정 되어 묻는 시안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그녀에게 헬맷 씌워 주고는 뒷좌석을 가리켰다.
“빨리 타기나 해”
처음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되고 망설여졌으나 해가 진 뒤여서 인지 왠지 모를 앞도 되는 분위기에 우선 몸을 실어 성진의 허리를 꼬옥 붙들었고 성진은 말없이 달려가기만 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바다.”
“바다?”
“아, 한강? 난 또 어디라고.”
그러나 그들은 이미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기 위해 비교적 한산한 외각 도로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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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까지 다 내다려다 보인다는 동해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서해안 바닷가에 그들은 멈추어있었다.
검은빛의 밤바다는 또 다른 웅장함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아 이 바다 냄새 오랜만이다. 글치?”
어두움에 물든 성진의 웃음이 시안에게도 느껴졌다.
“그러게.”
흑단 같이 검게 파도치는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며 시안은 조용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괜찮냐?”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시안이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내일 모래잖아.”
시안은 아무 말이 없었고, 어둠에 깃든 그녀의 표정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성진은 그 마음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자”
“!”
성진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시안의 어깨를 자신의 한 팔로 감싸 안아 확 잡아 끌어안으며 그녀를 자신의 한쪽 어깨에 묻었다.
“맘껏 적셔도 돼. 오늘밤은 너에게 완전히 내어 줄께.”
시안은 그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조용히 흘리는 눈물로 오빠를 마음에서 지워내며 어둠에 물들어 달빛에 출렁이는 바다와 파도 소리를 들었다.
......................................
“왜 그랬어?”
시안은 자신을 집 앞에 데려다 놓고 가는 성진의 오토바이크에서 내려두기 전에 참아 왔던 궁금증을 풀어냈다.
“왜 준영오빠에게 고백하라고 했어?”
“왜 그랬던 건데?”
“ 그냥 니가 행복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그렇게 어리석게 버려두는 짓은 하기 싫었으니까.”
“난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행복 정도는 지켜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난 아버지와는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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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디 가스나야. 니 그동안 잘살았나.”
오빠 결혼식으로 집에 엄마가 오자마자 텅빈 것 같이 적막이 가라앉아 있던 집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엄마 니는?”
“ 내?”
“내는 그냥 뭐 잘살았지.”
“ 그래도 제인이 이 가스나 덕분에 여름에 몸보신도 하고”
엄마는 그동안 제법 나온 배 두들기시며 푸근하게 웃었다.
“그래도 저 가스나 가 싹싹하고 사근사근해서 올여름에 휴가 온 손님들한테 횟감도 많이 팔았다 아이가.”
“ 우리 제인이 이제 곧 고3인데 고마 공부하기 싫으면 엄마 따라 내려가서 지금부터 엄마 밑에서 횟 뜨는 법도 배우고, 초장 만드는 기술하고, 꼼 장어 양념 만드는 법 일치감치 배워라.”
엄마는 장사가 잘됐던지 은근한 눈빛으로 제인에게 추파를 던지고 계셨고 제인의 얼굴에서 핏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헉~애가 핏기가 하나도 없네.
“내 미쳤나! 안 그래도 더운데 그 찜통에서 생선비린내에 코를 못 들었다. 아이가 내가 어떻게 이 서울 땅을 다시 밟은 긴데 내 그렇게는 못하지.”
“그럼 이 문디 가스나야 공부 좀 제대로 하면서 니 학교 다녀라 이게 모꼬? 이게.”
울 엄마 또 흥분하시면서 핏대 올리신다.
이럴 때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있어야 괜히 싸잡히지 않는 다
“니도 공부하기 싫으면 휴학기 내고 한 몇 년 엄마 밑에서 기술 배워서 나중에 다시 복학하던지
장학금도 못 받고서 학교 다닐 바엔”
가 안 통했다.
...........................
#59
“니 뭐하는데 그렇게 야지랑 떨고 밍기적 거리노 퍼뜩 가자. 엄마 나가간다.”
“니 어째 오늘 한 접시 밖에 안 돌았노? 어디 아프노?”
“그새 못 먹어서 엄마가 못 챙겨줬다고 밥 양이 확 줄은 것 같지도 않은데.”
“내? 아이다.”
시안은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엄마의 시선을 피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스나들 한 세 번은 돌아야지. 어차피 뷔펜데 내가 사노? 니가 사노? 그거 공짜 아이다 엄마가 축의금도 다 냈다 아이가.”
“엄마가 먹은 것만도 축으금 본전은 다 뽑았겠다. 오늘 언나가 와 그라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내는 딱 봐도 알겠던데~”
“언니가 왜 그런지 알겠네.”
제인은 시안과 엄마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엄마에게 팔짱을 끼고 살랑살랑 꼬리치듯 웃으며 제인은 애교떨며 시안 들으라고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근데 아까 그 머스마 어떻드 노? 잘 생겼재?”
“가스나 어디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사나?”
“그래도 내는 남자는 우선 잘나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매일 눈만 뜨면 보는 얼굴이 사람 같이는 생겼어야지 살맛이 나지 않컷나?”
“가스나.”
엄마가 제인의 등짝을 시장에서 생선 박스를 억척 같이 들고 나르던 그 무지막지한 손으로 후려친 소리가 등 뒤에서 퍽!? 들려 왔다.
“철없는 소리 , 남자는 두꺼비 같이 생겼어도 모름지기 처자식 먹여 살릴 밥벌이 하고 안 굶기고 가운뎃다리 다리 하나만 성하면 된다. 아이가, 안 그노?”
엄마는 살짝 시안의 팔짱을 끼었고 그 말의 의미를 내심 알고 있던 시안을 보며 엄마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니가 와 얼굴이 벌개지노’ 하며 묻자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몰라!’ 소리쳐 놓고는 서둘러 집을 향해 걸었다.
“하핫.”
엄마의 화통한 시장통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제 자식도 다 키웠나 보다. 사랑도 할 줄 알고”
엄마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오빠는 지금 서울 상공을 날아가고 있겠지?
시안은 3층 옥탑 마당 난간 위에 마시던 커피를 놓아두고 흑단 같이 검은 하늘 속 흐릿하게 빛나던 별을 올려다보았다.
“언니, 추운데 뭐해?”
빛을 내던 별빛을 올려보던 시안 곁으로 제인도 같이 머그잔에 을 양손에 따듯하게 감싸 안고 쥐고 섰다.
“오늘 준영 오빠 정말 멋있더라 언니 글치?”
“그래”
“지금은 아쉽고 쓰리겠지만 언니에겐 아직도 기회가 많이 남아 있어.”
“뭐?”
“ 언니 준영오빠 좋아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내가 눈치코치로 알아 마췄지.”
“오빠가 핀 선물 할 때부터 언니 표정만 봐도 알겠던데 뭘.”
“이제 잊고 훌훌 털고 털어 놓을 수 있지.”
“그래.”
“별이다 오랜만이네.”
“저거 인공위성이야. 그렇지 않고는 이 지구의 대기 오염 속에서 저렇게 멋지게 반짝일 수 없을 거야.”
“그런가?”
“푸훗~ 언니 말투 지금 꼭 누구랑 비슷한 거 알아?”
“그래?”
해도 다 지기 전에 별이 보인다는 게 이상하잖아, 지구에서 그렇게 밝게 보이는 별이 있다면 그건 아마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일 거야.
맞아, 그때 녀석도 그렇게 말했었지.
시안은 예전 성진과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했던 그때의 대화를 떠올려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언니 곁에는 아직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남아 있음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삶이란 녀석은 그 세월을 견디어 온 보상을 하 듯 더 좋은 만남들로 언니에게 보답할거야.”
‘!’
시안은 어리다고만 생각한 제인의 말에 내색은 안 했어도 은근히 놀라워하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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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 드디어 가는 구나.”
“응.”
“어머니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뭐라고 할 거야?”
“글쎄.”
“비행기타고 가다 지겨우면 그런 것도 한번 생각해 보고 그래.”
“어머, 오빤 꼭 머리 아프게 만드는 것만 시키더라?”
“성진아~”
“응?”
“그냥 불러 봤어. 지금 실컷 불러 봐야지. 이제 누구 무서워서 제대로 네 이름이나 불러보겠니? 지금 보내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는데.”
“저 불 여시가 .”
정희는 그러며 시안과 옆에 선 제인 눈치를 보며 살살 웃음을 흘렸고 제인인 그런 정희를 보며
“힝힝~ 너 병원에서 나 온지 얼마나 됐다고, 너 보내고 난 어떻게 사니?”
“우리 헤어지기 전에 기념 촬영 한번 더하자.”
정희는 그러고는 은근슬쩍 보란 듯이 성진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얼굴을 맞대며 사진 찍기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시안은 정희가 붙든 팔짱에서 슬그머니 팔을 빼는 성진의 모습에 슬핏 웃음이 났다.
정희가 그새 울먹이며 콧김이 팍 들어간 코맹맹이 소리로 온 갓 애교를 다 떨고 있자.
옆에 서있던 민재가 옆구리를 살짝 후비며 언짓해 왔다.
‘저 지지배 남자 여럿 잡았을 폼샌데 너도 이번 참에 뭔가 보여줘.’
‘너도 이번 참에 뭔가 보여줘.’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는 성진을 바라보며 시안은 민재의 눈짓에 망설이면서도 무언가 결심 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건강히 잘 다녀와라.”
틀에 박힌 듯 성훈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 했지만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이미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여태껏 잘 참아 왔듯이 난 네가 이번일도 잘 이겨 내리라 믿는다.”
다짐을 받아 내 듯 양손으로 성진의 어깨를 짚으며 힘주어 건네는 대화에서,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며 그 모습을 담은 눈빛에서, 그리고 서로를 향해 있는 마음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들에게서 예전과 다른 온기가 느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서로를 향한 그들의 용서이기도 했다.
나 단 한 번도 당신 미워한 적 없어. 처음부터 좋았고 그 다음엔 닮고 싶었으니까
“갔다 올게.”
비행기 탑승을 요구하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마지막으로 세준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했다.
“아, 아직 안되지.”
세준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동글동글한 눈을 굴리며 여태 멀 치 감치 서서 이들을 바라보던 시안의 손을 단숨에 붙잡아 와 성진 정희 틈에 끼워 넣었다.
헉 드디어 때가 들이 닥친 거다
너도 뭔가 보여 줘야해!
시안은 속으로 그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뭐야, 할 말 없어? 인사도 없이 보낼 거야?”
언니 내일 성준이 지 엄마 보러 가지?
어?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언니 내일 가면 그 불여시가 분명 비장의 무기로 꼬리 아홉 개를 다 달고 나올 거야. 그러니까 이번 참에 언니가 뭔가 보여 줘야해.
뭔가를 보여줘?
그래 언니가 이번 참에 아예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그러며 목에 핏대를 세우던 제인은 시안을 붙들어 세웠다.
언니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데 언니 바보야?
뭐?
왜 말을 못해 그 지지배가 그렇게 눈 부라리고 있는데 왜말을 못하고 가만있냐고
내가 뭘? 무섭게 스리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너 지금 그거 파리의 연인 박신양 대사 아니니?)
그렇게12시 땡 울릴 때까지 제인의 특훈(?)을 받고 나온 시안이었고 그 순간 시안은 가슴을 조아리면서도 작은 용기를 내어 굽을 살짝 올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성진의 볼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생각지 않았던 입맞춤에 성진이 다른 일행들과 마찬 가지로 당황한 표정이 되어 시안을 바라보았고 시안은 서둘러 특훈(?)의 결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양 여자들이 겉보기만 그렇지 얼마나 우락부락한데. 그 여자들이 너 채가기 전에 내가 먼저 침 발라둔거야.”
“그래? 그럼 이걸로는 2% 부족 하지.”
엉뚱했고 어설픈 듯 했지만 결의에 찬 듯 야무진 투로 말하는 시안이 이 시간 너무너무 사랑스러워 성진은 사랑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자신의 팔 안에 시안을 가득 채워 그녀의 입술에 깊고도 짧은 입맞춤을 했고 시안의 기억 저편으로 당당히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던 민재의 만연한 미소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우리가 떨어져 있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그 사이 내가 머물었던 서울에서는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태형 선배와 기태 오빠가 예정대로 동반 입대를 했고, 선미 언니 이번엔 주위로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갓 입학식을 치른 아주 아주 새끈한 꽃미남 새내기들이 선미언니에게 붙어 다녔다.
민재는 내년 봄에 진규 오빠 군대 가서 고생 안하게 한파대비 뜨개질을 시작했고, 또한, 아~주 가끔은 성진에게 세줄짜리(잘 사냐? 난 잘 있다 잘 지내라 ) 이메일이 오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씩 바뀌는 녀석의 미니홈피 사진들과 그곳 거리 아이들과의 비보이 배틀을 연상케 하는 춤사위 동영상들을 보며 거기서도 잘 살고 있구나 싶었다.
그 사진들 가운데 시안을 한동안 모니터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진이 있었다.
네 시어머님이시다. 인사드려라
라는 제목의 푸른 색 타일로 곱게 장식된 십자가 모양의 묘비와 함께 찍은 성진의 사진 속 모습에서 그의 애심(哀心)을 그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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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야 나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이 밤에?”
제인은 예쁘장한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는 살살살 애교 썩인 미소로 시안의 동의를 구했다.
“ 정운이 만나러.”
“너 이제 고3이거든.”
“어휴~ 잔소리 쟁이 저 럴땐 꼭 엄마 같다니깐”
“걱정 마! 대학도 눈치코치로 갈 테니까.”
제인은 그길로 꼬리가 밟힐 듯 내뺐고 시안의 등 뒤에선 전화벨이 요란하게 그녀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누구지? 이 밤에?
“여보세요?”
“.....”
“여보세요?”
시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굳 이브닝, 마드 모아젤!”
어...
“어?”
“뭐냐, 서방님 전화 에 그 벙찐 목소리는.”
역시나 느끼한 버터에 빵 발라 먹었어도 살짝 까칠한놈의 말투는 여전한 듯 했다.
그런데 여전한 이 녀석의 목소리가 이렇게 친근하게 와 닫았던 적이 있었던가?
시안은 방금 들었던 녀석의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다시 새김질 하듯 떠올렸다.
“버선발로 나와 반기진 못하더라도 나한테 할 말이 그렇게 없냐?”
“어? 아~ 거기는 지금 몇 신데?”
“ 푸훗~ 졌다.”
“잘살았냐?”
“응, 나야 잘 지냈지 넌?”
“뭐 하냐?”
“그냥 있지 뭐.”
“거긴 지금 어때?”
“응?”
“여긴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밤이라서 거리에는 캐롤도 울리고 집집마다 트리장식도 해놓고 그랬는데
“그래?”
“여긴 지금 가로등 불빛이 잔잔하게 어둡고 구석진 비탈 골목을 비추고 있고, 옹기종기 모인 가옥들 창 커튼 틈사이로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불빛이 비집고 나와 어슴프레 밝히고 있어.
어디선가 컹컹 큰 개가 짓는 소리도 좀 들리는 것 같고, 저 멀리 줄지어 달아나는 차량 불빛이 줄지어 이어진 크리스마스트리 꼬마전구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 뿜 내.”
“와~ 거기도 그래? 역시 사람 사는 데는 지구촌 어디나 비슷한가 봐?!”
문득 그리웠던 그의 목소리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전화를 받으며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시안의 눈빛이 빠르게 젖어 들고 있었다.
잔잔히 불빛을 내는 가로등, 어두운 거릴 골목을 비추는 전봇대 위의 불빛 , 줄지어 달아나는 차량의 빨간 후광 등 불빛들이 시안의 눈 안에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너 아직도 거기 있니?”
시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왜?”
“너 지금 거기 있는 것 맞아?”
“.....”
시안은 서둘러 현관 앞으로 가 문을 열었고 그 앞에는 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들고 서있었다.
“성진아!”
“말귀를 이제야 알아들은 거야? 아유~우리 둔탱이.”
성진은 놀란 듯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시안의 이마에 살며시 자신을 부딪쳤다.
그를 올려다보던 시안의 눈은 그 동안 차곡이 쌓여 있던 그리움을 덜어내듯 젖어 들었지만 시야를 가리는 눈물에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것이 못마땅한지 그의 모습을 더 확인하고 싶은 맘에 이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춰 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 속에는 서로로 가득 차 있었고 성진은 팔을 뻗어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시안의 한쪽 뺨을 감쌌다.
“난 나 홀로 이 시간들을 견뎌내고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주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 기다림 속에 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어.”
시안은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잊고 있었나 봐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사람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걸.”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시안은 그의 손끝으로 그의 아파해야 했던 세월들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담기는 것을 느끼며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기대며 속삭였다.
“ 이젠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이제 더 이상 혼자 기다리지 않아도 돼.”
두 사람의 시선 속에는 이제 서로가 있었고, 그런 시안의 따듯하고 사랑이 깃든 부드러운 눈으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며시 시안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 왔고, 시안은 아직도 두터운 겨울 추위가 깃들어 서늘해 보이는 그의 목을 자신의 팔로 따스하게 감싸 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언젠가 제인이 얘기했던 대로 그가 이끄는 아주 깁고 달콤한 키스에 빠져 있었다.
-The END-
-Epilogue-
“그날 안 온다, 안 온다 하더니 늦게 라도 데리러 와줘서 고마웠다. 스케줄 펑크 안낸 덕에 다음 스케줄 바로 따낼 수 있었어.”
“주말에 스케줄 잡아 놨으니까 늦지 않게 와.”
“안돼!”
성진은 태형의 말을 딱 잘랐다.
“왜?”
“ 그날 어떤 바보가 밥 사주기로 했거든”
“그래?”
성진에게 ‘밥’ 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던 태형이 이맛살을 살짝 구기며 스케줄수첩 다시 뒤적거렸다.
“참, 근데 그날 그 애 뭐야?”
“뭐? 누구?”
“형한테 무식하게 대들었...!”
태형은 바로 성진의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구석으로 끌고 가며 속삭였다.
“야, 여기서 그 얘긴 뭣 하러 해. 쪽팔리게.”
“그게 쪽팔린 거야~?”
“으~ 그 쪼매난 계집애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내가.”
“왜?”
“뭐야?”
“뭔데 그래?”
“몰라, 우린 모르고 둘이 만 알고 있는 뭔가가 있나본데.”
성진이 태형의 돌발행동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들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정희와 종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입학식이었으니까 1학년인가?”
“뭐?”
“니가 그건 왜?”
평소 김 성진이 어떤 놈이란 걸 알고 있던 태형은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기억에 남아서 잊혀 지지가 않네.”
“제발 그냥 잊어줘라.”
태형은 거의 울듯 한 표정이었다.
“형한테 얼굴 보여주면 알 수 있나?”
“ 뭐?”
“그날 그 애 사진 찍었거든.”
“어디?, 어디 봐”
태형은 성진이가 건네는 디카를 얼른 뺏어 들려 했지만 그 사이 정희가 금방 낚아채 들었다.
“어머, 얘 뭐야? 표정이 완전 가관이다.”
자신이 뺏어든 디카의 사진을 들고 왈가왈부 하는 걸 보며 전의를 상실 한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태형을 보며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사태파악이 끝난 정희가 찰싹달라 붙었다.
“얘가 감히 오빨 물 먹인 거야?”
“오빠 걱정 마. 내가 딱 100배 복수 할 수 있는 방법 알려줄게.”
“정말?”
“어! 나도 이거 써먹어 봤거든 내가 이걸로 내 앞에서 꼬장 부린 것들 몇 보냈어. 이거 확실해.”
정희와 태형은 둘이 뭔가를 속닥속닥 거리며 지들끼리 신나 하고 있었다.
“좋았어! 너 아주 딱 걸렸어!”
“그래, 너도 그땐 오겠지 전교생 앞에서 완전 물 먹여 주겠어.”
“야 이거 하루만 빌려줘! ”
그러더니 태형은 갑자기 뛰어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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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말
안녕하세요 ‘내 마음늘받아줘’의 지은이 달콤샴푸입니다.
많이 부족하고 다듬어 지지 않은 서툰글을 꾸준히 지켜 읽어주셨던 분들께 이렇게라도 인사를 드리고 싶어 글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작가말을 올립니다.
제 첫 연재작 내 마음을 받아줘는 2003년에 시작해 2008년에 완결된 소설이에요.
뇌출혈로 쓰러져 요양을 하던 중 견디기가 힘이 들어 조금이라도 아픔을 잊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병상이었지만 틈틈이 글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덤벼들어 써오다 보니 어느 덧 완성을 해나가게 됐네요.
오랜 달리기를 마친 듯한 기분이네요 참요 낼 드디어CT검사를 한답니다.
머리상태가 어떻게 나올지...........
그래도 이렇게 맺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글 만큼 저의 삶에도 감사하고 행복 한 결말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처음에는 그냥 제 컴에만 올려두고 쓰고, 읽고 수정해가며 나중에 완성되면 기념으로 간직해야지 하다 소설을 연재 한다는 것을 알고 내 글도 누군가 보아 줄까 나 혼자 간직하는 것보다 함께 나누면 더 좋지 않을 까 싶어
천리안의 천일야화 라는 카페에 조금 연재하다
우연한 기회에 다음 카페의 인소닷을 알게 되 본격적으로 이곳에 연재 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써나가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없이 그저 저의 생각대로 써오다보니 좀 서두가 없고 많이 어리바리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어 주신 분들이 격려해주셨던 게 생각나 힘을 얻어 이글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
글을 마칠 수 있도록 건강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내공을 듬뿍 담은 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켜 봐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글에 대한 감상평에 대한 얘기는 쪽지나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달콤샴푸 올린 꾸뻑. [-.-] [_._ ]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 감사해요 즐거우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