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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859년부터 1860년까지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를 도와주었다. 또 1861년 1월에는 왕국을 선포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1866년에는 베네치아의 합병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후에 맞닥뜨리게 된 로마 문제 때문에 오히려 이날리아가 통일을 이룩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프랑스 원정군을 통해 교홍의 절대적인 지상권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탈리아인들은 1870년, 프랑스의 패배를 이용하여로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두나라는 이후 계속해서 서로 멀어졌다.
1877년 4월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1878년 1월부터 러시아인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1877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콘스탄티토플과 곤든 혼은 우리 것이어야 한다...."
산스테파노자약(1878)은 러시아의 승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다른 열강들은 그 결과(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의 완전한 독립, 불가리아의 탄생)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영국은 도중에 술탄으로 하여금 키프로스를 자신들에게 양보하게 만들었다)의 압력에 따라 베를린에서의 국제회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주재로 열린 그 회의에서는 불가리아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것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이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영토를 보장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교리와도 같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갖는 위력은 운하의 개방 이후 축소되었다. 인도 항로를지키는 데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가 이스탄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주의가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08년, 러시아의 입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을 결정했다. 그때 이탈리아는 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친교를 맺었다.(1909년의 비밀협약). 모두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분할을 바라고 있던 터라그 자리에 참석했다.
독립국이면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이탈리아의 보호를 받은 알바니아가 탄생했다.
1908년 오스만투르크제국 의회는 민족적인 단체들로 구성되었다.즉 아랍인 60명, 알바니아인 27명, 그리스인 26명, 아르메니아인 14명, 슬라브족 10명, 유대인 14명이 투르크인 하원의원 147명과 함께 의회를 구성한것이다.
지중해의 대규모 항구들에 있었던 세파라딤 공동체들은 대다수가 시오니즘(유대민족주의)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914년 8월 , 3대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중립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의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괴벤과 브레스라우라는 독일 순양함 두 척이 8월 3일, 알제리의 본과 필리브빌을 공격했다. 이 순양함들은 알제리와 프랑스 사이의 소통을 방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스트리아 함대에 합류하려던 것이었다. 그들은 지중해에서 분할 방식을 취하고 있던 영국 함대를 교묘히 피할 수 있었으며, 8월 10일에는 다르다넬스 해협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오스만투르크 정부는 그들을 격퇴하기는 커녕 배들을 사서 이름을 바꾸었다. 함대를 지휘했던 조우콘 제독은 흑해의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조우콘 파샤가 되었다.
9월 8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수상은 거류민에 대한 치외법권의 폐지를 선포했다. 그리고 9월 27일, 해협이 봉쇄되었다.
10월 말, 조우콘 제독은 흑해의 오데사에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11월 초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었다.
이스탄불 정부의 결정은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의 3국 연합에는 심각한 것이었다. 해협이 봉쇄됨으로써 러시아 연합군에 군수품을 공급할수 있는 가장 편리한 길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 군대와 식료품 공급에 필요 불가결한 수에즈 운하도 위협에 처해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은 동지중해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해상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줄곧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독일의 잠수함과 전투함을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할 수 없었다.
먼저 중립 국가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은 뒤늦게 중립적인 위치에서 벗어났다. 그리스 왕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는데, 왕 자신이 빌헬름 2세와 맺고 있던 인척관계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전쟁에 가담하자고 부치기는 베니젤로스의 주장에 반대했다.
루마니아는 1916년 러시아 장군 브루실로프의 공세 때 러시아가 승리할 것을 믿고 러시아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다.
러시아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의혹을 산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투크르정부에게 쓰라린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그들은 1915년 봄부터 대량으로 강제 수용되거나 학살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살로니카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의 지휘 아래 세르비아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 징집되어 온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세를 폐위시킨 베니젤로스가 1917년 6월 자신의 나라에서 전투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다국적 군대는 1918년 도나우 강에 이르는 길이 개방되면서 독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국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참여했다.
시리아에서 아랍인들의 이탈을 두려워한 투르크인들은 배신의 혐의가 있는 자치주의자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맥마흔은 1915년, 후사인에게 '아랍인들의 독립'을 약속했다.이때 맥마흔은 해안지역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제외하고 있었던 것 같다.
러시아는 이미 콘스타티노플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1917년 12월 2일, 영국 수상인아서 벨푸어는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정부는 유대민족국가를 창설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한편 후사인은 1916년에 반란을 선동하여 '아랍 국가의 왕'을 자칭했다.
휴전협정은 무드로스(렘노스 섬)에 정바해 있던 아가멤논호 선상에서 10월 30일 조인되었다.
1918년 11월 13일, 영국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함 54척이 이스탄불 항에 들어왔다. 그리고 여기에 그리스 전함이 가세했다. 1919년 2월 18일, 프랑셰 데스페레는 장엄하게 백마를 탄채 다국적 점령군을 이끌고 이스탄불에 들어왔다.
1920년 러시아 백군이 남아 있던 랭겔의 군대와 함께 도시에 침입하여 수만 명의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정복자들은 이탈이아인들이 1919년 3월 안탈리아에 상륙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1919년 5월 스미르나에 상륙하는 것도 허락했다. 프랑스는 실리시아를 지키는 데 집착하고 있었다. 한편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요구했다.
곧이어 투르크인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저항에는 무스타파 케말 장군의 역할이 컸다.
그가 '대국민회의'를 소집한 것은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는 앙카라에서였다. 세브르조약(1920)을 무시한 그는 실리시아에서 프랑스인들과 싸우고, 1920년 6월부터 1922년 9월까지는 그리스인들과 대결했다. 투르크인들이 스미르나를 점령하자 그리스이들은 소아시아를 비워주어야 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프랑스에 접근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불화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상황도 이용했다. 터키가 아르메니아를 놓고 협상을 벌인 상대도, 1921년 3월 협정에 조인한 상대도 소비에트 였다. 소비에트와의 접촉은 열강들로 하여금 새로운 국가 터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세브르조약의 내용이 로잔에서 수정되었다(1923년 7월). 100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를 떠났으며 트라키아에 살고 있던 40만 명의 투르크인들이 터키에 다시 합류했다.
1912년에 독립을 이룬 알바니아는 주변 국가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에 국가 질서를 세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열강들 중 이탈리아가 맨 먼저 알바니아를 욕심냈다. 알바니아는 봉건 구주와 같은 일개 대지주가 1928년에 조그 1세라는 이름 아래 왕을 자처했으나 시민항쟁이 끊이질 않았다. 1918년 12월에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 구성된 새로운 연합왕국이 선포되었는데, 그 역시 굳건하게 버티지 못했다. 알렉산다르 1세의 통치 아래서 세르비아는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내보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1930년에 왕국의 이름을 유고슬라비아로 바꾸었다. 그에 따라 크로아티아의 부리주의가 거세어졌다.
편 이탈이아는 피우메(지금의 리예카)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유고슬라비아와 대립했다. 피우메는 이스트리아에 있는 작은 항구로, 인구 대다수가 이탈리아인 이민자였고 슬로베니아 영토에 속해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피우메를 이탈리아에게 주는 데 반대했다. 그런데 검은 셔츠를 입은 '행동대원' 2만 5000명의 지도자인 가브리엘 단눈치오가 1919년 9월에 피우메를 점령했다. 그리고 1921년 1월까지, 그러니까 이탈리아 정규군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그곳에서 분열 행진을 계속했다.
1934년 알렉산드르 1세가 마르세유에서 크로아티아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된다.
그리스에서도 장군이었던 메타사스가 1936년 8월 4일 권력을 장악했다.
이탈이아는 1926년에서 1927년부터 알바니아를 준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와 사이가 나빴으며, 크로아티아의 테러리스트들을 지지했다. 그런데 아드리아 해안 발칸 반도에서의 확장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소협상(제1차 세계대전 후 맺어진 체코슬로바키아 , 유고슬라라비아 , 루마니아 3국의 우호관계를 뜻함)에 부딪혔다.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의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으로서는이탈리아를 제제하는 데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제는 상징적인 것에 그친다.
이미 에스파냐 반란군에게 지브롤터 해협을 넘는 것을 허용한 이탈리아는수천 명의 '자발적인' 파시스트들을 동원했다. 독일 나치스는 콘도르라는 외인부대를 동원하여 주로 공중전에서 프랑코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었다. 소련은 인민전선을 도와주었다.
이탈이아가 지중해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사랑을 내세웠으며, 사부아와 니스와 코르시카뿐만 아니라 투니지까지 요구했다. 무솔리는 1939년 알바니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필 위원회의 1939년 백서에서느 팔레스타인을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한다는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즉 "그 국가에서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정부에 참여하여 두 공동체의 중요한이해관계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국가는 "10년 이내" 자리를 잡게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백서에는 유대인의 이민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토지 구매를 통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그 계획은 아랍인만큼이나 유대인에게도 배척당했다.
1939녀, 시오니즘에 대항하여 일어난 투쟁은 아랍세계 공동의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히틀러에게 원조를 청하게 될 예루살렘 최고 무프티(이슬람 세게의 법체계에서 종교적 유권해석을 내리는 최고 권위자)에 의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영국이 느낀 최초의 불안은 프랑스 함대와 관련된것들이다. 휴정협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함대가 독일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래서 1940년 7월 3일 알렉산드리아에서 프랑스와 협약을 맺었다. 알렉산드리아에 함대를 계속 주둔시킬 수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무장을 헤제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이 알제리 오랑 근처의 메르스 엘 케비르에서 비극을 초래했다. 즉 해군 제독인 젠술이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1300명의 해병이 사망했다. 1대의 장갑함과 3대의 구축함만이 그곳을 피해 프랑스 툴롱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영국 함대는 1940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탈리아 함대에 대해 자신들의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영국 함대는 어떤 제제도 받지 않고 1941년 2월 제노바와 리보르노를 공격했다. 그럼으로써 영국은 서지중해를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잠수함을 이용하여 군대와 군수품을 시리아 쪽으로 이동시켜야 할 정도로 지중해에서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1941년 10월 앙다이에서 히틀러와 만나 협상을 벌인 프랑코 장군은 에스파냐가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라고 있었다. 사실 프랑코는 정복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미국에 접근하고 있었다. 터키에서도 아타투르크의 뒤를 이은 이스메트 이뇨뉴는 전쟁의 결말이 불투명했던 까닭에 양 진영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아랍인들이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 이탈리아 , 일본의 군사동맹)의 선전활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예루살렘의 최고 무프티가 피신해 있던 이라크에서 독일을 지지하는 정부를 몰아냈다(1941년 4~5월). 영국의 개입은 바그다드에서 심각한 폭동을 초래했고, 유대인 공동체가 그 최초의 희생양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대결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벤 구리온은 국가의 설립을요구하며, 유대인 이민을 금지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 역시 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더욱 확대되어 이웃 아랍 국가들, 특히 이라크에까지전해졌다. 독일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라크인들을 돕기 위해 프랑스의 비시 정부로투버 시리아의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냈다. 그것은 영국의 개입을 정당화해주었다. 영국의 개입에는 드골 장군이 협조했다. 그래서 '자유 프랑스' 세력이 전쟁에 다시 개입하게 되었다. 비시 정부군은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1941년 6월에 항복해야 했다. 드골 장군은 그때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프랑스의 존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드골은 영국이 이들 국가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더 터였다.
1943영 1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프랑스 대표가 빠진 자리에서 모로코의 술탄을 맞이했다. 무하마드 5세는 이스티크랄당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1944년 1월에는 민족주의 정당이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그들을 난폭하게 진압했다. 알제리에서도 그에 비견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연합군과도 관계를 맺고 있던 페르하트 아바스는 1943년「알제리 국민선언」에 알제리 온건파의 요구사랑을 정리했다. 1945년 5월, 희낵과 녹색의 독립 알제리 국기가 시위에 출연했다. 세티프 주변의 콩스탕틴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그리스는 1945년 얄타회담에서 체결된 조약에 따라 영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었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해주었다. 1974년에 채택된 헌번9티토 이후에 실시되기로 에정되어 있었다)에는 집단지도체제를 제도화하고 의장 자리를 각 세력의 대표자들이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맡기도 명시되었다. 그럼으로써 연방제를 철저히 실행할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1944~45년, 1946~49년 사이에 두 번의 격렬한 내전이 일어났다. 물론 거기에는 서구 진영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지지가 한몫했다. 그리스에서 반공산주의 전선이 우세를 차지하게 된 것은 두 번의 내전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결과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반공산주의 전선은 발칸 반도에서 영국이 한 발 물러섬에 따라 약화된다.
프랑코 장군의 독재정권은 뒤늦게야 추축국과 거리를 유지했으며, 국제연합(UN)의 비난을 샀다. 국제연합은 1946년, 회원국들에게 자국 대사들을 철수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1951년, 프랑코 장군의 체제를 인정한다. 영국과 미국에게 그 체제는 마지막 남은 파시스트 성향의 독재라기보다는 전략적인 반공산주의세력처럼 보였다. 프랑코 장군은 실제로 1953년, 자신의 영토에 군사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1955년 12월 국제연합에 가입하게 된다.
1945년에 결성된 아랍국가연맹은 처으에는 영국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점차 멀어졌으며, 나세르의 영향 아래 급진적인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과 골란 고원 지방과 가자 지구를 차지했다. 비좁은데다 끊임없이 위협이 가해지는 그 지역에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 사회를 만든 사람들은 유럽에서 온 아슈케나짐이었는데, 이후 아랍 세계의 세파라딤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및 소련에서 온 사람들이 합류했다.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을 만났다. 이듬해에는 캠프 대이비드 평화협정이 이루어졌다. 1981년 이슬람교도들은 사다트를 암살하였다.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이집트가 아랍국가연맹에서 축축될고 아랍국가연맹의 본부는 취니스로 옮겨갔다.
석유가 생산되는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군주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바로 그 군주제가 아랍의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시골이 아니라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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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는 7,8월에 강수량이 가장 낮다.
마르세유항구에 들어온 배는 1792년(아무튼 1790년대 초)에 급격히 적어진다.
튀니스에서 되산 노예 420명의 출신지별 현황(1681~1700)을 보면 이탈리아 노예가 339명 81퍼센트로 가장 많다.
연대기
기원전 2000년대 사르데냐의 누라기문화, 코르시카의 토리문화, 발레아레스 제도의 탈라요트문화, 그리스의 미케네문명.
기원전 600년 마르세유가 세워짐.
기원전 540년 포카이아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카르타고인 간에 알레리아해전이 벌어짐.
기원전 509년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협정체결. 로마공화국 탄생.
기원전 474년 쿠마이에서 에트루리아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