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 (간증 33) 1986년 11월.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사무실을 저렴하게 제공해 주었던 원장집사님이 느닷없이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통보해 왔다.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
집사님께서는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되어 기쁜 마음에 본 교회목사님께 유흥가를 선교하는 단체에 사무실을 저렴하게 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그런 선교는 이단이라고 하시며 당장 쫓아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원장 집사님은 본 교회목사님께서 속히 내보내라고 하셨다며 쌀쌀맞은 표정으로 얼굴을 싹 바꿔버린다.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뻐하며 환한 얼굴로 대하던 모습과는 정 반대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냉대였다. 나는 세상에 살면서 어디를 가든 칭찬과 환영만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 믿고 처음으로 그런 마음을 겪어보았다.
“빨리 나가요! 나가요!”
원장은 나가라고 소리쳤다.
옮길 장소를 구할 때까지 한 달만 더 있게 해 달라고 아무리 사정과 간청을 해 보아도 원장은 매몰차게 뿌리치며 당장 나가라고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소리 질렀다.
아마도 목사님께 이단은 인정사정없이 바로 쫒아내라는 교육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교회에선 선교단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런데 하물며 일반선교도 아닌 유흥가 선교한다는 것은 그 당시 특수선교중에서도 특수 선교였기에 우리선교회를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사무실 짐을 어디로 옮겨야 할 지 황당했다.
원장님께서 그나마 저렴하게 주셔서 사무실 얻기가 가능했는데, 여기서 쫓겨나면 우리는 사무실 얻을 돈도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선교모임 예배를 인도하시던 강도사님께서도 갑자기 나가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를 쫒아내라고 하시던 목사님께서 우리 선교회를 돕고 있는 강도사님이 같은 교단이라는 것을 아시고 노회에 말해 그 선교회에서 나오지 않으면 제명시키겠다고 협박을 해 왔다며 강도사님도 너무 죄송하다며 선교회를 떠나셨다.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닥쳤다. 마음이 참으로 착잡했다.
고민하던 중 사무실 짐을 임시로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사촌 여동생이 여관을 하던 곳이었는데, 나는 사촌 여동생 가족 4식구를 모두 전도했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여동생 식구들은 여관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얻어 가면서 언니가 고생하는 것이 안스럽다며 우리에게 그 여관을 저렴하게 세를 주고 떠났다.
여관방은 모두 18개나 되었다.
나는 방들 중 두 칸만 우리가 쓰고, 나머지는 전도하기 위해 집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과 방 얻을 돈이 없는 신학생들에게 공짜로 살게 해 주었으며, 월세를 얻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저렴하게 50%만 받고 세를 주고 있었다.
관리는 어머니(회심 전부터 줄곧 어머니와 동생들 3명을 데리고 살았음)가 하셨는데 어머니는 당신이 수고 하는데 공짜로 왜 방을 다 주느냐며 투덜투덜 날마다 나를 힘들게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을 늘 반대 하셔서 사역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전도하기 위해 공짜로 방을 준 사람들에게까지 눈치를 주어 모두들 화가 난 어머니눈치를 보느라 슬슬 피해 다녔다.
그런 집이 있었기에 모양은 좀 그래도 사무실 짐을 옮기는 데는 다행한 일이었다.
우선, 급한 데로 집에 사무실 짐을 풀고 나서 그 뒷일을 차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늦가을 찬바람이 제법 옷깃을 여미게 했다.
마음이 추워서일까? 더욱 쌀쌀한 기운이 뼈 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자 혼자서 무거운 짐을 꾸리는 일들은 힘에 버거웠다.
사무실 물건이 다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원장집사님은 문을 쾅! 닫아 버린다.
너무도 놀란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차가운 표정을 뒤로 한 채, 그곳을 황급히 빠져 나왔다.
트럭을 불러 짐을 집으로 옮기고 나자 깜깜한 밤이 되었다
그렇게 짐을 겨우 옮겨놓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 버린다.
우리 집은 깜깜한 암흑천지가 되었다.
방방에 세든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가? 모두들 방에서 튀어 나왔다. 이 집안에는 나를 도와 휴즈 하나 끼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라고는 못 하나 못 박는 철없는 대학생 남동생과 5살 난 아들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자들만 살아가는 집안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척 힘들었다.
그날 전기가 나갔을 때 나는 힘들어 주저앉고 싶었다.
낮에 당한 충격으로 모든 힘이 다 빠져있는 상태에서 집안일까지 책임져야했다. 선교회와 가정의 주인으로써 감당해야 하는 내 짐은 그날따라 한없이 무거웠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머리와 돈으로 해결했다. 힘든 일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숙달되지 않는 힘으로 일을 해결해 나가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주여! 이 종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날 밤새도록 나는 주님께 매달렸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수모는 과거 저지른 죄의 댓가의 시작에 불과하리라...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께서 아시니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왔다.
수가선교회는 그렇게 집에서 다시 시작했다.
오해를 받으니 섣불리 타교회 집사님들과 전도 나가기가 겁이 났다. 모두 다 떠날지라도 나 혼자만은 유흥가 현장전도는 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은 한시가 급한 마음이었다.
그렇게도 추웠던 한해를 보내고 1987년의 어느 봄날,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CBS기독교 라디오방송 ‘새롭게 하소서’ 담당피디입니다.”라고 했다. 새롭게 하소서 프로에 출연해 달라는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보니 내 아프고 춥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주님의 은혜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싸주시는 듯 했다. 마음에 평화가 새롭게 피어올랐다.
주님은 슬퍼하는 나에게 위로를 주셨다. 염려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시는 싸인으로 들려졌다.
또한 바로 며칠 후 이단이라고 쫒아낸 교회 바로 옆 합동 측 큰 교회에서 새신자 초청잔치에 나를 간증강사로 불러주셨다. 많은 새신자들이 초대된 대예배 목사님 설교시간에 나는 간증설교를 하게 되었다.
큰 포스터가 교회 사방으로 붙여져 있어 이단이라 억울하게 만들었던 교회 목사님과 학원 원장님이 다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단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 주셨다.
대구에서 회원 4명과 함께 ‘새롭게 하소서’ 출연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1987년 8월, 고은아 권사님이 진행하는 ‘새롭게 하소서’ 방송을 통해 전국에 나의 간증과 수가선교회가 알려졌다. 그리고 CBS 다큐멘터리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도 방송되었다.
방송이 나가자 전국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곳곳에서 간증요청이 들어왔다.
또한 그곳에 종사하던 성도들의 고통 상담이 줄을 이었다.
대구 CBS기독교 대구방송에서도 연락이 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대구에서 사역하시는 분이 서울에 먼저 방송하고 오시다니.. 대구에 계신 줄도 몰랐네요. 대구 ‘새롭게 하소서’ 전도간증집회에 초청하겠습니다.”
나는 10월에 서현교회에서 가진 새롭게 하소서 전도간증집회에도 간증을 하게 되었다.
주님은 수가선교회가 사람들에게 멸시천대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전화위복이 되게 하셨다. 오히려 매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회임을 전국으로 홍보해 주셨다. 선교의 필요성을 전국에 알리시고 사라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주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0-12)더 보기
첫댓글 진실로 주님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수가선교회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