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따라 수도권으로 올라온지도 어언 7년째에 접어드니 아마 8여 년쯤 전의 일이었으리라. 그땐 내가 부산 바로 옆에 붙은 양산에 거주할 때인데 거긴 신도시인 만큼 기반시설, 이를테면 공원, 도로, 공공시설 등이 잘 갖춰진 쾌적한 도시였다. 내가 살던 곳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 걸으면 워터파크가 있는데, 당시 매년 늦은 가을이면 국화축제가 열리고 축제에 곁들여 음악회나 전시회가 열리곤 했다.
어느 해 늦가을 국화 전시회 기간 중 음악회가 열린다 해서 저녁에 주인님이랑 워터파크를 찾았다. 야외 공연장에서 열리는 시립합창단의 공연을 보는데 지휘자가 엄정행 선생이 아닌가?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 부부가 학교에 근무하다 보니까 언제나처럼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출근을 서둘러야 했던 그 시절, 그때 우리를 깨운 건 엄정행 선생이 6시부터 진행하는 KBS 클래식 프로그램이었다. 40여 년 전의 이야기였겠네.
우리 부부가 조금만 더 자고 싶단 생각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엄선생의 멘트는 나직하고도 감미로웠다. 이어지는 음악 역시 서양의 고전 음악이나 바로크 음악 중심이었으니 누군가 말했던가, 코끝을 벨 듯한 추위 속에서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사나히의 용기라고 했던 말 말이다.
1970년대 당시 왕십리의 한양대가 총장이었던 김연준 선생이 '청산에 살리라'와 같은 가곡을 300여 곡 작곡하고 '명태'로 유명한 바리톤 오현명 선생을 간판으로 내세워 명문 사학으로의 도약대로 삼으려 했다면, 그에 질세라 경희대 설립자이자 총장인 조영식 선생은 일찌기 인재 영입으로 대응하면서 잘 생긴 얼굴과 감미로운 목소리의 엄정행 선생이 경희대 음대의 간판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나 뭐래나. 게다가 조영식 총장은 자신이 작사한 '목련화'를 엄정행 선생이 녹음하게 함으로서 그 노래를 대중가요맹키로 유행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엄선생은 방송에 출연해서 돈을 벌면서 전국 뭍 여인들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짐과 동시에 소속 대학교도 학교 홍보에 기여한 공적이 막대하다나 뭐래나 해서리 특별 상여금을 수시로 지급했다는 뭐 전설같은 얘기도 있더만...
내가 수도권에 올라와서 동문들의 근황을 전해 들으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 동기 유지홍박사도 경희대 의과대학에서 후한(後漢)의 명의 화타(華陀)에 비견되었다고 하더만, 우리가 한창 사회의 새내기로 정신 없을 1980년대의 엄정행 선생은 그야말로 그 대학의 가오마담에 다름아니었으리라. 새삼 40여 년을 거슬러 가보는 그 시절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주인님과 함께 엄선생이 지휘하고 양산시립합창단이 연주하는 이수인 곡 '고향의 노래'를 들으면서, 40여 년 전 엄선생이 불러 당시 여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목련화'의 가사를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그대처럼 우아하게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