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동묘려, 미륵원 → 마산동 산성 → 이현동 석불 → 가정동 묘비군
7시부터 서둘러서 아이들 챙기고, 뒷일?은 남편에게 부탁하고 남문광장으로 향하였다.
출근 시간이 겹쳐서 전민동을 벗어나는데 한참이 걸렸다.
에구....... 어쩌나~ 8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 다행이도 주차장에 들어선 게
30분이었다.
오정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등산복차림으로 기다리고 계셨고, 전날 점심값 지참하라는 메시지를 받지 못한 최연숙선생님은 달걀전과 상추, 젓갈 등을 준비해 오셨고, 멋진 선글라스 낀 임라금선생님, 답사자료를 만들어오신 4월 지킴이 담당 분 들 등 11명은 일주일 만에
만난 반가움과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설레임으로 Go! Go!!
관동묘려와 마산동산성을 먼저 갔지만, 가는 길 순서대로 기록 하는 것이
나중에 찾아가기가 쉬울 것 같아서 만나는 동네순서로 적어 내려간다.
◈ 삼정동
산에서 밭을 일구는 마을이란 뜻으로 산전골 이라 불렀는데 한 노승이 여기를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삼정승이 나올 명당이 있다” 고 말한 뒤로 삼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노승이 예언한 명당은 天穴, 地穴, 人穴인데 천혈에는 은진 송씨가 묘를 쓰고 지혈에는 여흥 민씨가 묘를 썼으며 인혈에는 박씨가 묘를 써서 모두 번창하여 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갈전동
갈대밭이 무성하여 갈밭이라 불렸다는 이곳에는 갈밭식당 앞에
선돌이 하나 있고, 조금 지나 할아버지 장승과 할머니 장승이
마주보고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었다.
◈ 배고개를 지나서 오른쪽의 이현동
마을 뒷산의 형국이 둥글넙적한 배(梨)의 형상과 같다하여 배산, 고개는 돌배나무가 많아서 배고개, 마을은 이현동이라 이름 지어진 곳으로 산골 깊숙한 곳에 마을이 있어서 심곡이라고 한다. 마을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곳곳에 심어진 배나무는 꽃이 펴서 더욱 정감있게 느껴졌다. 경주김씨의 집성촌으로 파란 지붕이 끝나는 곳에서 올라가 침엽수와 활엽수의 경계를 따라 가며 돌탑집도 지나면 이현동 석불이 나온다.
고려시대 석불로서 목이 훼손되었는데 원래 이 자리가 아니라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통견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뒷 선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아름답게 조각된 아담한 불상이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안고 갈수 있는 크기여서 분실의 우려가 있기에 임헌기 선생님께서 아무에게나 이곳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이제 대덕구에서 동구로 넘어갑니다.
김혜영선생님 왈 " 안녕히 가라는데요 ?? "
맞습니다. 맞고요. 여기서부터는 동구에 속합니다.
◈ 성치산성
지나면서 10시 방향에 버드나무 숲이 있는데 삼국시대 토기편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찬샘정 (피골)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로 인해 피가 내를 이룬 골짜기라 하여 피골이라 했으나, 얼마전 찬샘정으로 이름을 바꾸고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 견두산성
삼국시대 산성으로서 개머리산에 테뫼식으로 지은 산성이다. 이 산성 밑으로 신탄진-옥천간의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대청호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이다.
◈ 천개동
하늘아래 첫 동네.
1962년 화전민 정착지 시책의 일환으로 6.25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이곳에 터를 일구고 가정과 마을을 꾸린 곳이다. 마을사람들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말미
할먼네 식당에서 주문한 김치찌개와 최연숙선생님이 준비해 오신 밑반찬,
박규순선생님표 찹쌀떡, 최경순선생님의 제주귤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이제 아줌마의 한계에 도달해 몸과 마음이 늘어지기 시작하였다.
◈ 미륵원
미륵원은 고려, 조선 시대에 서울에서 영. 호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세워진 일종의 숙박시설로서. 조선 후기 이후 터만 내려오다가 1980년에 남루만 복원되어 있는데 이는 미륵원의 부속건물이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말 황연기가 중건하여 1332년부터 1351년까지 20년간 매년 겨울에 문을 열어 여행자를 도왔으며 그가 죽은 뒤 황수 형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낡은 원을 철거하고 새로 원을 건립하여 덕행을 계속하였다.
여름에도 더위를 피할 수 있게끔 두 형제는 미륵원 남쪽에 새로 남루를 지었다.
황연기의 손 황자후 역시 조상의 뜻을 받들어 이 원을 확장 운영하였다.
원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시대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다가 이후 개인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미륵원이란 지명이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과 대치되어 굴파원으로 불리다가 귀래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황자후, 황수의 무덤은 있으나 황연기의 무덤은 찾을 수가 없어서 복원된 남루 뒤쪽에 제단을 마련해 놓았다.
남루 뒷 편의 축대와 대청호 앞의 돌 무더기들로 당시 미륵원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단다.
◈ 관동묘려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 고흥 류씨의 재실이다. 오른쪽으로 고흥 류씨 부인 묘소가 있고 더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회덕 황씨) 황윤보의 무덤이 있다.
회덕 황씨 중시조인 황윤보의 무덤 앞 묘지석에 회덕군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회덕군에서 나오는 모든 세금을 황윤보가 관리 한다는 의미란다.
◈ 마산동 산성 (사슴골)
삼국시대에 쌓은 퇴메식 산성으로 거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입구에 두 채의 집이 있는데 한 채에는 노부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시고 할아버지가 혼자서 포도농장 하면서 끼니 때 마다 할머니 식사를 챙겨드린다고 한다.
임헌기선생님께 사슴골은 산에 사슴이 많아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냐고 여쭙자, 산의 형상을 딴 이름이라고 하신다.
마산동 산성 중턱에 있던 무덤의 비석이 끔찍하게 되어있었다. 누군가 탁본을 한다고 먹을 묻혀 놓았는데 이 사람은 TV프로그램 [서프라이즈]도 안보나보다. 남의 무덤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꼭 벌을 받던데.......
전날 장태산에 다녀온 휴유증으로 다리는 시큰거리고 온 몸이 천근 만근이라 꾸벅 꾸벅 졸다가 눈을 뜨니 유성구 도서관 주차장이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가정동 묘비군 지킴이 담당자들만 내려서 비석군을 찾아 보기로 하고 나머지는 차에서 기다렸다.
(가까운 곳이니까 다음에 시간을 내서 한 번 와봐야겠다.)
집에 돌아와 샤니크린파스를 어깨와 무릎에 부치고 끙끙거리며 누워있었다.
용균이는 엄마가 할머니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는데 그것으로 체력관리는 부족한 듯 하다.
일부 관심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관리되던 석불과 산성들.......
4월과 5월 지킴이 활동을 통해 이 문화유산의 존재를 많은 이에게 알리고
주변정리와 청소등을 병행하여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
첫댓글 자료 정리 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저도 그날 뒤로 계속 늘어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제 조상 묘 한번 안 돌아본 죄값이라 생각하며 묘소에 갈 때마다 반성했습니다. 저에겐 공부보다 더 유익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서양선생님의 말 한 마디가 가슴을 짓눌러 모른척할 수 없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참고하실 내용 있으시면 참고하시고, 틀린 부분은 알려주세요. 저는 이제 홈플러스로 쇼핑갑니다 모두들 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거 모아서 책내도 되겠네요... 최지원샘 잘 읽었어요.... 좋은날 뵙껬습니다.
It's Daejeon 에 실린 " 소제호의 봄은 오는가 " 잘 읽었습니다. 찍힌 본인들만 알아볼 수 있는 대전역 수하물 창고앞에서의 사진도 참 좋았습니다. 새학기가 시작되어 바쁘시지요 늘 건강하게 지내시구요 여유되시면 모두들 한 번 뵙지요.
지원샘 감사혀요 소인은 날라리 학생 주제에 정리해 올려 라 조르고는 솔직히 좀 미안하고 후회도 했건만 이리도 수고를 하셨네요 뭐든 실한 샘의 면목을 다시 한번 인하네요 고맙습니다.
뒷북의 제가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암튼 그날 이후 울 샘들 다리지방이 근육이 되고 가냘프던 다리가 굵어졌겠지요. 저도 그날 이후 늘어지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요점정리 매끄럽고 깔끔하고 역시 제눈이 정()했나봐요 홍보부에 팍팍 한 이유요. 한발한발 걸음마 떼는 아이처럼 느리지만 곱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샘님들 모두 이 화창한 봄날을 하고 싶어요. 겁게 지내세요. 나두 뽀뽀.. 가 아니라 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