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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月庵)당 정대(正大) 큰스님 | ||
월암(月庵)당 정대(正大) 큰스님 1937년 ~ 2003년 1963년 전강 스님을 은사로 득도 전북대 대학원 졸업 1983년 용주사 주지 제4, 5, 6, 7, 8, 9, 10, 11, 12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88년 제9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1999년 제30대 조계종 총무원장. 2002년 동국학원 이사장. 사람이 만나는 삶의 과제 '여자는 사랑으로 살고 남자는 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여자라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남자에게 사랑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남자의 주요 관심사는 사회와의 접촉과 거기서 일어나는 일이고, 여자에게는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랑의 문제다. 남자가 사랑보다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고 여자가 사랑의 문제에 전부를 거는 것은 본래부터 남녀의 성적 차별에서 오는 구별이기보다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원시사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남자는 가정과 가족에 대한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이는 남자가 감성적인 애정의 문제보다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반면 여자는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가족에 대해 잔신경을 쓰면서 살다 보니 자연히 이성적인 일의 문제보다는 잔정이 가는 애정에 더 깊은 관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것이다. 역사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 중에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적인 틀을 뛰어넘은 사람도 적지 않다. 여성으로서 남성들이 할 수 없는 뛰어난 일을 한 사람도 많고, 남자의 경우도 애정의 문제로 만사를 제쳐놓은 사람이 숱하게 많다. '일'과 '사랑'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공동으로 만나게 되는 삶의 보편적 과제이다. 누구나 일을 떠나서는 단 하루라도 생을 영위할 수 없고, 또한 진한 인간적 만남에 의해 생기는 사랑 없이는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 일과 사랑이란 삶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인 것이다. 개인의 삶이 성공적이냐 아니냐는 이 두 바퀴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굴러가느냐 에 있다. 만약 남자에게 일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는 건조한 나날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요, 여자에게 있어서도 사랑만 있고 일이 없다면 그의 삶은 무료와 권태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만큼 반비례해서 많은 문제점들을 던져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것은 인간적 삶의 철저한 파괴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대사회와의 만남에서 인간적 삶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산업사회는 우리 생활양식을 한쪽으로 몰고 간다. 행복의 기준을 물량적 확대에 의해서 성취하려는 사람들은 해와 달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한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하고 아늑한 시간보다는 일에 파묻혀 살면서 반대급부로 획득하는 부와 출세만이 전부이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랑을 잃고 자신마저도 상실하게 된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철저한 쾌락에만 생의 의의와 목표 를 두고 있다. 말초적 욕망 추구, 감상적 연애감정에 빠져 창조적인 일에는 무관심하다. 현대인은 대체로 이 두 인간형 중 어느 한쪽에 속한다. 남성의 경우 수적으로 전자가 많고 여성은 후자가 많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 구분도 무의미하다. 맹렬 여성의 출현으로 남성의 고유영역이라 생각되는 일의 세계가 잠식되어 가고 있다. 물질의 풍요로 더 이상의 할 일을 찾지 못한 남성은 빗나간 사랑놀이에 낮과 밤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일에만 매달리면 사랑을 잃고 사랑에만 빠지면 일을 못한다. 어느 한쪽이 모자라는 인생은 파행곡선의 연속이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은 파행적인 현대인의 삶에 많은 시사를 준다. 부처님은 출가 전에 세속적 향락의 늪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인간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못 되었다. 향락 뒤에 오는 허무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출가 후의 6년 고행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육체적 가학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언제까지나 고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에 부처님이 선택한 제 3의 길은 중도적 수행이었다. 향락이나 고행에 치우치지 않는 방법의 발견은 마침내 그가 원하던 영원한 행복의 성취를 가능케 했다. 부처님이 발견한 '중도의 길'은 우리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해준다. 그것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일은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동안 영원히 외면 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과제다. 이 과제를 조화롭게 꾸려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이다. 일은 남자만의 것도, 사랑은 여자만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모두의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이 두 가지 과제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느냐에 있다. 1983. 4. 17. - 신륵사 주지 재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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