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물'같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고, 율사들에게는 율사가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됩니다.(고전9:20~22)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으로서 그 전통과 율법을 배설물로 여겼지만,(빌3:8) 기꺼이 유대인들과 그 율법을 존중합니다.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에 거리낌이 없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제사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고전8:8~10) 바울은 ‘물’같습니다. 대접에 담기면 넓고, 병에 담기면 높습니다.
자유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술을 마실 줄 알지만 금주하는 사람을 위하여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담배를 피워도 되지만 금연하는 사람을 위하여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검박한 것, 이런 것들이 자유입니다.
거꾸로, 금주와 금연이 생활의 원칙이지만 슬픈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것, 외로운 사람과 대화하기 위하여 담배를 피울 수도 있는 것, 청빈이 삶의 원칙이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연회를 즐길 줄 아는 것, 이런 것들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절제’와 같은 뜻입니다.(고전9:19,25) 자유와 절제는 얼핏 반대말 같지만, 같은 말입니다. 자유는 본성에 매이지 않고 본성마저 절제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가치관의 과잉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얻기 위하여, 즉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내 본성과 가치관의 과잉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진실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절제할 수 있는, 그래서 진실로 자유로운 사람에게 ‘상’이 있습니다.(고전9:24) 절제함으로 진실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시합에서 이깁니다.(고전9:25) 우리가 치르는 시합은 누가 사람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사람이 사람을 얻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나 자신을 잃지 않는 물 같은 사람이 사람을 얻습니다.
사람을 얻어 아무리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이 좋아도 ‘절제’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과 원칙을 절제하며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마 불가능합니다. 눈치 보기 십상입니다. 줏대 없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절제는 그래서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3) 절제는 육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 스스로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도우셔야만 맺히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만 절제할 수 있고, 사람을 얻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사람을 얻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신 까닭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 포로, 눈 먼 자, 눌린 자를 얻었습니다.(눅4:18) 성령의 사람은 물처럼 아래로 흐릅니다. 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몰락합니다. 가난한 자와 포로와 눈 먼 자와 눌린 자를 얻기 위해 땅 아래로 더 아래로 흐를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천상의 특권을 ‘절제’하고, 물처럼 땅 아래 바다까지 곤두박질 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물이 흐르는 길, 즉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령을, 보통 사람들이 꺼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찾고’, 성령께서 오시는 문을 ‘두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성령을 맞이하여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눅11:13)
‘천지창조’도 사람을 얻기 위함이셨습니다.(창1:1~31) 나를 얻기 위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 내 이웃을 얻기 위해 여전히 진행 중인 천지창조, 역사 이전부터 시작된 최대 규모 토목사업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땅에 물줄기를 낼 수 있는 것은 ‘물’입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