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국 축구 최고의 라이벌전, 여기 다 있다.

[강코치]

역대 한국 축구 최고의 라이벌전, 여기 다 있다.

세상에는 많은 라이벌이 존재한다. 무한도전과 1박2일, 태진아와 송대관,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 히틀러와 처칠,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선우와 배다해,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그리고 김현회와 조인성까지…. 정말 한 치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라이벌이 많다. 축구계 역시 많은 라이벌이 있다. 흔히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가장 흥미진진한 라이벌이라고 떠올리지만 한국 축구에도 만만치 않은 라이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오늘은 한국 축구 역사를 논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라이벌전을 엄선했다.


1930년 제2회 경평축구대회에 출전한 경성대표팀의 모습.

경평축구대회

경평축구대회는 1929년 10월 8일 당시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경기를 가진 데서 유래됐다. 이 대회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두 도시 간 대항전이란 점에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반일정신을 키우는 데에도 큰 기여를 이룬 민족 단결의 행사였다.

하지만 이 대회가 순탄하게 매년 치러진 건 아니다. 대회가 생기고 3년 뒤 일제가 대규모 군중집회를 금지시킨 탓에 이후 2년 동안 경기가 열리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6회 대회 이후 무기한 중단됐던 경평축구대회는 해방 이후 1946년 무려 10여년 만에 제7회 대회를 개최했지만 이후 남북통행이 38선을 기점으로 제한되면서 완전히 중단됐다.

당시 경평축구대회는 선수들과 관중들 모두에게 숙명의 대결이었다. 지방에 사는 관중들은 이 경기를 보기 위해 걸어서 서울까지 오기도 했고 한 평양 선수는 “나를 평양 대표팀에 뽑아주지 않으면 대동강에 빠져 죽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평양 선수들은 육로로 서울에 왔다 배를 타고 고향으로 복귀하던 중 기관총 세례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목숨을 걸고 이 대회에 나섰다.

밀려드는 관중을 막기 위해 주최 쪽에서 인분을 뿌리는 일까지 있었던 이 라이벌전은 결국 분단의 아픔 속에 아직까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경기가 끝나면 경기 소식을 담은 호외가 서울과 평양을 뒤덮던 당시의 모습을 언젠가는 다시 이 땅에서 재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도 평양 원정 응원가서 평양 여자 한 번 만나보고 싶다.


강릉의 축구 전쟁인 강릉농공고와 강릉제일고의 경기 모습. 설기현과 이을용 등도 다 여기에서 컸다. ⓒ연합뉴스

농상전 혹은 상농전

한국의 ‘원조 더비매치’가 바로 이 경기다. 강릉농공고와 강릉제일고(예전 강릉상고)가 매년 단오를 기점으로 치르는 이 경기는 강릉 지역 최고의 축구 축제이자 전쟁이다. 1935년 강릉농공고가 축구부를 만들고 6년 뒤 강릉상고가 축구부를 조직하면서 자연스레 라이벌로 부각했다. 1960년대에는 양 교 학생들이 경기를 앞두고 돌을 주우러 다니는 일도 빈번했다. 경기가 끝나면 항상 투석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976년부터 단오제에 맞춰 정기전으로 자리 잡은 이 경기는 1980년대 축구 열기와 애교심이 더해지며 더욱 치열해졌다. 경기에서 진 강릉농공고 재학생들이 분풀이로 강릉상고에 진입, 교문을 떼어 인근 하천에 버리자 강릉상고 학생들도 강릉농공고로 쳐들어가 며칠간 강릉시 전체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결국 양 교의 정기전은 이 사건 이후 6년간이나 중단됐다 재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라이벌전은 비단 재학생만의 전쟁이 아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졸업생들도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열띤 응원을 펼친다. 단오가 되면 강릉시민이 둘로 나뉜다는 이야기도 이 경기 때문에 나왔다. 강릉농공고의 팀 컬러는 붉은색이고 강릉제일고의 팀 컬러는 푸른색이어서 시각적인 효과도 대조를 이뤘다. 강릉농공고의 상징 호랑이와 강릉제일고의 상징 용을 본떠 ‘용호상박’이라는 표현도 썼다.

강릉농공고를 졸업한 김학범 전 성남 감독은 당시 경기 도중 발목에 금이 간 상태로 90분 풀타임을 뛰기도 했다. 이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라 아프다고 빠질 수 없다는 의미였다. 강릉제일고 기준으로 올해까지 24전 6승 13무 5패로 팽팽한 승부가 펼쳐진다는 점도 색다르다. 올해 경기에서도 양 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제는 경기 후 폭력사태가 줄고 응원의 일부인 기 싸움만이 남았지만 그래도 축구 전쟁은 매년 단오마다 계속된다. ‘말죽거리 잔혹사’ 저리가라다.


우리나라에 공부 잘하는 사람 참 많다.

연보전 혹은 보연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의 라이벌 역사는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8회 전조선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만난 양 팀은 이 경기를 시작으로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다투게 됐다. 축구를 비롯해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 야구 등 다섯 종목이 치러지는 지금의 정기전 형태를 갖춘 1965년 이전에도 축구는 완벽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47년 제28회 전국체육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양 팀은 경기가 끝난 뒤 승리한 연세대 선수가 고려대 선수들에게 맞은 일을 빌미로 집단 난투극을 벌여 결국 럭비와 농구 등 양 팀이 더 치를 예정이던 경기가 모두 취소되기도 했다. 고려대를 졸업한 이상철 전 울산현대 수석코치는 1979년 경기에서 상대팀 응원단에 맞아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양 팀의 경기는 축구 이상의 의미였다.

선수들도 다른 경기는 다 져도 이 경기만큼은 이기려는 의지가 강했다. ‘축구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고려대 출신 김병수는 부상을 당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도 라이벌 연세대와의 경기에는 진통제를 맞고 나섰다. 온전하지 못한 몸 상태의 그가 1년에 한 번 치르는 정식 경기였다. 이임생은 국가대표 소집기간 중 부상을 이유로 잠시 선수촌을 빠져 나와 이 라이벌전에 출전, 대표팀에서 퇴출되기도 했다.

최근 빗나간 라이벌 의식으로 고려대 축구 감독이 연세대와의 대결을 앞두고 심판 매수를 하는 일을 벌이긴 했지만 양 팀은 라이벌과 함께 서로 성장, 한국 축구를 이끄는 훌륭한 역할을 했다. 고려대는 차범근, 박성화, 홍명보 등을 배출했고 연세대도 김호곤, 허정무, 조광래 등을 키워냈다. 나도 이 라이벌전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공부를 못해 그냥 구경꾼 노릇이나 하고 있어 무척 안타깝다.


수원과 안양은 참 지독히도 많이 싸웠다. 선수도 싸우고 팬도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수원블루윙즈

지지대더비

수원과 안양 사이에 위치해 두 곳을 오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지대 고개에서 유래된 ‘지지대 더비’는 K-리그 역사에서 가장 뇌리에 강하게 남는 라이벌전이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수원 김호 감독과 안양 조광래 감독의 맞대결 성적이 24전 10승 4무 10패로 동률을 이룰 정도로 팽팽했다. 이 라이벌전은 유럽 축구에 손색없는 로컬 더비로 관심을 끌었다.

양 팀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대단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원 코치로 재직하던 조광래 감독이 안양으로 떠나면서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안양 소속이던 서정원이 프랑스 진출 후 국내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법정싸움까지 벌이며 수원을 택하면서 두 팀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악화됐다. 안양 팬들은 2000년 K-리그 슈퍼컵에서 서정원 유니폼 화형식을 진행했지만 서정원은 친정팀을 상대로 두 골을 넣으며 수원의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2003년에는 안양 외국인 선수였던 뚜따가 조광래 감독과의 불화 속에 수원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양 팀의 경기는 더욱 불꽃 튀는 혈전으로 이어졌다. K-리그에 회의를 느끼던 뚜따가 수원으로 이적한 것도 안양에 반드시 복수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선수와 팬, 코치진 모두 이 경기를 져서는 안 될 중요한 경기로 인식했다. 양 팀의 모기업 라이벌 관계도 이에 한몫했다.

수원 팬들이 안양LG ‘치타스’를 당시 유행하던 과자 ‘치토스’로 빗대 경기장 바닥에 치토스 봉지로 길을 만들고 ‘"치토스 먹는 날’이라는 대형 현수막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안양 팬들은 수원삼성 블루윙즈를 ‘닭’으로 비하하면서 생닭을 경기장에 걸어 놓기도 할 정도로 볼거리가 풍성한 라이벌전이었다. 비록 지금은 안양LG가 연고지를 옮겨 사라진 라이벌전이지만 K-리그 팬들은 아직도 이 경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첼시와 맨유의 경기…가 아니고 지난 주말 벌어진 수원과 서울의 경기. ⓒ수원블루윙즈

우리의 라이벌전을 잊지 말자

지난 주말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수원과 서울의 2010 쏘나타 K-리그 19라운드 경기에는 무려 42,377명의 관중이 운집해 한국 축구의 새로운 라이벌전을 즐겁게 지켜봤다. 원래 진정한 라이벌은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니 수원-서울전은 분명 라이벌전이 맞는 것 같다. 지난 주말 보여준 열기라면 한국 축구에도 더욱 많은 라이벌전이 생길 가능성이 충분하다. 지난 주말 한국 축구는 또 다른 희망을 봤다.

많은 축구팬들은 유럽의 라이벌전을 보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도 이에 못지않은 자랑스러운 라이벌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기억할 때, 보존할 때 그 가치가 더욱 더 빛나는 법이다. 지금은 사라진 라이벌전은 다시 만들려 노력하자. 또한 지금도 성대하게 펼쳐지는 라이벌전은 지금의 분위기 그대로 이어가자. 우리의 자랑스러운 라이벌전 역사를 기억하고 즐기자. 이건 축구팬들이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