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무기를 잘 보관해줘서 고맙다."
- 샤밀 바사예프
잉구세티야. 체첸 서쪽에 위치한 작은 공화국으로, 면적과 인구가 체첸 공화국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공식적인 수도는 마가스였지만, 대통령궁과 행정 관청 외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었던 계획 도시였으며, 전통적인 이 지역의 중심지는 전 수도이자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나즈란이었다. 따라서 잉구세티야 주둔 러시아군 사령부와 잉구쉬 공화국 내무부 본부는 나즈란에 위치했다. 자연스럽게 잉구세티야 경찰과 러시아 주둔군의 지휘관도 나즈란에 머물고 있었다.
잉구세티야 지도
나즈란은 북오세티야와 체첸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지나는 중심 도시였다.
2004년 6월 21일 밤 9시 반, 나즈란 시내의 잉구세티야 내무부 건물에 한발의 RPG가 날아왔다. 건물을 지키는 경비병과 당직을 서는 경찰들은 급히 상황을 확인하자 사방에서 ak와 PKM(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위험을 감지한 경찰들은 인근 시내에 있는 경찰특공대 (오몬)에 지원 요청을 하기위해 무전하였다. 그러나 무전에서 들리는 상황은 전혀 뜻밖이었다. 오몬 주둔지도 습격당한 것이다. 나즈란 시 경찰에 연락을 했으나 역시 똑같은 무전이 들렸다. 나즈란 주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에 사방에서 함성이 들렸다. "알라후 아크바르! (신은 위대하시다!)"
체첸군
체첸군은 먼저 나즈란 시를 통과하는 로스토프-바쿠 고속도로의 5개 검문소를 장악했다. 신속한 병력 이동과 안전한 철수를 위해서 였다. 도로를 확보한 뒤에 체첸군은 미리 지정해둔 목표를 향해 신속하게 투입되었다. 나즈란 외에도 카라불락, 슬렙초브스카야 마을도 공격했다. 심지어 마가스에도 병력을 투입했다. 잉구세티야 대통령 무라트 자지코프를 죽이기 위해서 였다.
나즈란 시내에 들어선 체첸군은 다시 주요 건물을 점거하기 위해 분산되어 투입되었다. 최초로 습격한 곳은 잉구세티야 내무부 건물과 오몬 막사, 그리고 잉구세티야 주둔 러시아 FSB 본부였다. 여기에 나즈란 시내 경찰서와 기동타격대(RUBOP) 본부도 체첸군의 점거 목표에 포함되었다. 건물 외에도 체첸군은 반드시 죽여야될 사람들의 명단도 갖고 있었다. 잉구세티야 내무부의 책임자와 러시아 FSB 지휘관, 그리고 잉구세티야에서 체포된 반군들을 기소했던 군 검찰들이었다.
잉구세티야 대통령 궁
잉구세티야는 완전히 기습당했다. 위에 언급된 모든 건물들이 체첸군의 손에 떨어졌다. 나즈란 시내 기차역과 잉구세티야 국경수비대 본부, 카라불락 시 경찰서도 점거됬으며 순자 주 경찰서와 네스테로프스카야 주둔 3 잉구쉬 경찰대, 트로이츠카야 주둔 러시아군 503연대도 체첸군의 습격을 받았다. 잉구세티야 주둔 경찰과 러시아군은 필사적으로 대항하려 했으나 모든 곳을 습격당해서 병력을 이동시킬 수조차 없었다.
잉구세티야 세부 지도.
체첸군은 잉구세티야 중심을 지나는 고속도로 인근의 마을을 주 목표로 정했다.
추후 발표된 러시아 정부의 설명에 의하면, 공격은 샤밀 바사예프가 직접 구상했으며 체첸 서부전선 사령관 도쿠 우마로프 휘하 병력에 잉구세티야 내 젊은 와하비인 마고메드 예블로에프가 이끄는 잉구쉬 게릴라들이 합류하여 실행되었다고 한다. 샤밀 바사예프는 한쪽 발에 목발을 댄 채로 이 공격을 직접 지휘했으며, 나즈란 시내 장악에 성공하자 내무부 무기고로 들어섰다.
"자비로운 알라의 가호로 체첸과 잉구세티야 무자헤딘 570명은 합동 작전을 펼쳤다. 지금 무기고 안에는 700자루의 AK와 800정의 권총, 100만발의 탄알과 장비, 군복이 있다. 전부 가져가고 싶은데 준비한 차량이 부족하다."
체첸군 한명이 들고 있던 비디오를 향해 이렇게 말한 샤밀 바사예프는 다음의 말도 남겼다. "우리 무기를 이렇게 잘 보관해줘서 고맙다" 그런 다음 바사예프는 직접 무기고 안에 들어서서 쉽게 구하기 힘든 중화기와 성능 좋은 ak 위주로 노획품을 옮겼다.
조하르 두다예프 체첸 1대 대통령.
잉구세티야는 그의 독립 선언에 호응하지 않고 연방의 잔류를 선택했다.
공격 지휘는 샤밀 바사예프가 했지만 실제 공격을 수행한 인원 대다수는 잉구세티야 인이었다. 본래 체첸인과 유사한 민족이었던 잉구세티야인들은 기질적으로 체첸인과 거의 비슷했지만 조하르 두다예프의 독립선언에 대해 호응하지 않고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였다. 그들은 그 대가로 스탈린 시절에 북오세티야로 넘어갔던 프리고로드니 지방을 넘겨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은 1992년 10월의 북오세티야와의 분쟁에서 현상유지를 택했고, 잉구세티야인들은 프리고로드니 지방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400명이 넘는 잉구세티야 인이 죽고 300가구가 불탔다.
1992년 북오세티야와 잉구쉬 분쟁 당시 불탄 잉구쉬인의 집
여기에 더해 75퍼센트가 넘는 실업율을 보이자 잉구세티야 젊은 층에서는 체첸에서 발호한 와하비 이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러시아 연방은 그리스정교 국가인 북 오세티야에 비해 잉구세티야를 위해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었으며, 같은 이슬람권이 뭉쳐서 독립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여기에 체첸인에게 동정적이던 루슬란 아우세프 잉구세티야 대통령이 물러나고 무라트 자지코프 대통령이 2002년에 임명된 뒤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신임 대통령은 잉구세티야 주둔 러시아군과 내무부 경찰들을 동원하여 '자키스트카'를 수행하였고, 이는 경찰에게 납치되어 고문당하고 죽은 사람의 몇배에 이르는 반군을 양산하였다.
무라트 자지코프 잉구세티야 대통령.
FSB 요원이었던 그는 푸틴의 신임으로 2002년 5월부터 잉구세티야 대통령이 되었다.
잉구세티야 게릴라들을 지휘한 사람은 전직 경찰이었던 마고메드 에블로에프였다. 일명 '마가스'라고 불렸던 예블로예프는 경찰 근무 경험이 있어서 잉구세티야 내무부의 근무 방식이나 주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또한 누가 자신들에게 가장 적대적이며 동시에 유능한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샤밀 바사예프와 함께 계획을 세울 당시에 반드시 죽여야 될 잉구세티야 내무부 수장과 간부급의 명단을 제공하였다.
마고메드 에블로에프
그 명단에는 잉구세티야 내무부 장관이자 경찰 총수였던 아부바카르 코스토에프, 내무부 차관인 지아우딘 코티에프, 나즈란 시 수석 검찰인 무카베크 부주타노프, 나즈란 주 수석 검찰인 베슬란 오지에프, 기동타격대 소속 수사관인 티무르 데토가조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즈란 시내를 점거한 체첸군의 일부는 동료들이 건물을 공격하는 동안 명단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움직였다.
먼저 집을 뒤져서 안에서 자고 있을 경우에는 끌어내서 사살했고, 집에 없을 경우에는 도로 위에 검문소를 설치해서 지나가는 차량들을 하나하나 검문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체첸군은 나즈란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먼저 점거하였기 때문에 그 시간에 나즈란 시내로 들어서거나 빠져나가려는 차량은 모두 체첸군의 검문을 통과해야 했다. 체첸군은 미리 준비했거나 검문소를 점거할 때 노획한 잉구세티야 경찰복과 군복으로 갈아입었고, 자연스럽게 통행하는 차량을 정지시키고 신분증을 요구하였다.
잉구세티야 경찰들
만약 제시한 신분증이 잉구세티야 검찰이나 내무부, 혹은 러시아 FSB 소속일 경우에는 즉시 밖으로 끌려나와 사살되었다. 코스토에프 장관은 예블로예프가 직접 죽였다고 한다.당시 집에 없었던 부주타노프 수석 검사는 이 검문에 걸려서 사살되었고, 8명의 FSB 요원과 24명의 잉구쉬 경찰들도 이 검문에 의해 사살되었다. 경찰 중에 지역 순찰 요원이나 교통 경찰일 경우에만 사살하지 않았다.
노획한 무기를 싣고 있는 체첸군
러시아군이 이 공격에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4시간이나 지난 2004년 6월 22일 새벽 2시였다. 북오세티야의 블라디카프카즈에서 나즈란 쪽으로 러시아군 장갑차가 10대가 급파되었다. 그러나 증원군이 올 방향을 예상하고 있던 체첸군의 매복에 걸렸고, 그중 3대는 전투 중에 발생한 부상병들을 싣고 다시 블라디카프카즈로 돌아가야 했다. 러시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무전이 샤밀 바사예프에게 전달되자 그는 철수를 명했다.
체첸군은 2대의 트럭에 1,200정에 가까운 소총과 권총, 기관총에 7만발의 탄알을 실은 뒤에 검문에서 생포한 20여명의 잉구세티야 경찰 인질들을 데리고 준비해둔 후퇴로를 따라 빠져나왔다. 트럭에 타고 있던 샤밀 바사예프는 자신의 작전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음에 만족했다. 나즈란 시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50명의 반군들을 탈출시키지 못한 것과 마가스 시내 대통령궁의 공격에 실패하여 자지코프 대통령을 죽이지 못한 것이 완벽한 작전의 몇안되는 흠이었다.
체첸군에게 죽은 잉구세티야 경찰들
러시아군과 잉구쉬 주둔 경찰은 철수하는 체첸군을 추격하려고 했지만 체첸군의 철수는 기습 만큼이나 완벽했다. 잉구세티야와 체첸 국경 근처에 버려진 트럭과 차량 몇대를 발견했을 뿐 행방이 묘연했다. 잉구세티야 정부는 이들이 체첸과 그루지아 국경을 넘어 도주했다고 했으나 체첸 내무부 장관인 알루 알하노프는 그들이 국경을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격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잉구세티야인들이 공격자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자기 마을로 숨어들었다고 추측한다. 어느 쪽이던 체첸군은 노획한 무기를 남김없이 챙긴 채 손실없이 사라졌다.
내무부 무기고에서 무전하는 샤밀 바사예프
날이 밝자, 러시아 정부는 공격으로 인한 손실에 경악했다. 15개의 관공서와 군부대가 공격당했고 그중 대부분이 체첸군에 의해 점거되어 파괴되었다. 러시아측의 발표에 의하면 90명이 죽었으며, 그중 60명이 러시아군과 잉구세티야 경찰 및 공무원들이었다. 러시아 스페츠나츠도 10명이나 죽었는데, 그중 3명은 빔펠 소속 장교였다. 러시아군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헬기로 급파하고 착륙한 뒤에 사살되었다. 이외에 1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체첸군의 전사자는 불과 6명이었다. 그것도 러시아군이 찾아낸 시신은 2구에 불과했다. 부상자는 체첸측 발표에 의하면 14명이었다. 45대의 차량과 2대의 장갑차도 파괴되었다.
노획한 무기를 확인하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샤밀 바사예프
노획된 무기 만큼이나 뼈아픈 것은 죽은 잉구세티야 경찰들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연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반군들을 사냥했던 인재들이 대부분이었다. 샤밀 바사예프는 한번의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잉구세티야 경찰과 검찰의 핵심 인재들을 대부분 제거하였고, 이후에도 잉구세티야 내에서는 숙달된 요원의 부족으로 반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고전하게 된다.
2009년 8월 17일 나즈란 경찰서 테러
트럭이 경찰서 건물에서 자폭하여 20명의 경찰이 죽고 13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가 입은 큰 타격은 심리적인 요소였다. 공격이 시작된 6월 21일은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시작한 날로 러시아 전역의 추모일이었다. 64주년에 맞춰서 대대적으로 잉구세티야를 공격하여 심리적으로 가할 수 있는 타격을 극대화 하였다. 여기에 다게스탄 수도 마하칼라에도 기습 공격을 가하여 러시아군의 반응을 무디게 만들었으며, 푸틴이 낙점한 체첸 대통령 아흐마드 카디로프를 죽인 한달 뒤에 역시 푸틴이 뽑은 잉구세티야 대통령의 무능을 대대적으로 공개하게 만들어서 역시 푸틴의 북코카서스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선전을 무력화 했다.
2004년 6월 22일에 나즈란을 방문하는 푸틴
샤밀 바사예프는 이 공격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 물론 잉구세티야의 군 경찰의 핵심 인재들의 사살 및 무기 노획도 중요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체첸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체첸군이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 하나를 순식간에 장악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자신들의 군사적인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러시아 정부가 체첸군과의 협상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를 바랬으며, 자신들의 요구를 어떤 형태로든 관철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다.
체첸군
자신들의 실력을 다시 한번 입증시켰다.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유도함에 있어서, 샤밀 바사예프가 알고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2004_Nazran_raid
http://www.cacianalyst.org/?q=node/2251
http://www.gazeta.ru/2005/08/03/last166177.shtml
http://www.reliefweb.int/rw/rwb.nsf/AllDocsByUNID/016072497ea6fcb8c1256ec1004a25fb
http://www.theage.com.au/articles/2004/06/22/1087844908440.html?from=storylhs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news/2004/06/mil-040622-rferl03.htm
http://news.bbc.co.uk/2/hi/europe/3930593.stm
http://www.tol.org/client/article/12302-war-comes-to-ingushetia.html
http://www.kavkazcenter.com/eng/
|
첫댓글 역시 체첸인들이 저력이 다시 한번 살아나네요..
실력을 보여줬죠
정말 대단한 근성이네요.
대단합니다
주요 지휘관들 살아있었으면 다시 한번 그로즈니 영구 점령해버렸을 기세군요. 후덜덜...
2차 체첸전 이후로 죽은 지휘관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도 들죠
저기서 푸틴옹 사진이 나즈란을 방문후 사진이군요,,,,,,
역시 전장의 늑대들이군요 그런데 한 국가의 수도가 저렇게 쉽게 허물어지다니
샤밀 바사예프 한마디로 전장의 신입니다.
수도는 아니지만 거의 공화국의 핵심 도시를 쉽게 제압했죠
"나 아직 안 죽었어!" 인가? 요번 테러의 목적은.
얼마든지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목적이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냥 물러서기를 원하지 않죠
잉구셰티야 체첸은 같은 민족인데.. 러시아가 서쪽의 나흐족은 러시아에 저항하지않았지만 동쪽의 나흐족은 격렬히 저항해서 러시아가 서쪽의 나흐족은 잉구셰티야 동쪽의 나흐족은 체첸 이렇게 구분했다는.
그렇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인종이라던가 언어, 문화 등은 거의 유사하답니다
잉구셰티아인들의 반러시아 정서는 체첸인과 비슷했군요. 러시아를 믿은 잉구시 지도부에 문제가 좀 많았던 듯. 아무튼 샤밀 바샤에프란 인물, 정말 대단하군요.